영화 ‘관능의 법칙’(2014년, 권칠인 감독) 이후 4년만에 ‘마녀’(2018년, 박훈정 감독)로 스크린 컴백을 알린 조민수의 연기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난 6월말 개봉된 ‘마녀’에서는 그녀 특유의 에너지가 변함없이 뜨겁게 분출됐습니다. ‘닥터 백‘이라는 영화 속의 차가운 캐릭터가 그녀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겁니다.
그녀에게선 4년여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오랜 세월동안 응축된 에너지가 마치 화산 폭발하듯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암에 걸려 대변봉투를 찬 채로 애인과 열정적인 섹스에 몰두하는 ‘관능의 법칙’의 싱글맘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뇌과학자 ‘닥터 백’으로 완벽 변신한 겁니다.
의문의 사고로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집단 시설에서 홀로 탈출한 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여고생 자윤(김다미)을 10년 동안 추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0년 전 뇌를 갈라 유전자 조작을 해놓았다가 놓쳤던 그 아이를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 포스‘가 영화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지요.
‘마녀’를 통한 4년만의 스크린 복귀에 대해서 그녀 역시 매우 흡족한 듯 보였습니다. “쉬고 싶었던 게 아니라 시나리오가 없었을 뿐”이라며 4년의 공백기를 설명한 그녀는 ‘마녀’의 제작보고회에서 “후회없는 영화작업이었다”고 자신있게 밝혔습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닥터 백’이 남자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훈정 감독이 조민수를 캐스팅했습니다. 말하자면 여배우에게 남자 캐릭터를 연기해내라고 주문한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품에 몰입하면 연기 에너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조민수로서는 ‘후회없이 연기해야 할 명분’까지 갖게 된 셈이었지요.
그리고 박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듯 조민수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닥터 백’을 만들어냈지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콤플렉스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사랑할 줄도 모르는 여성 뇌과학자 ‘닥터 백’, 언제나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영화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1990년, 이규형 감독)에 출연한 조민수.
하지만 이를 결코 쉽게 만들어낸 건 아니었습니다. 조민수는 ‘마녀’의 시나리오를 받아든 뒤,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릅니다. 읽고 또 읽고, 분석하고 또 분석했습니다. 대사 하나하나에 ‘닥터 백’의 차가움을 담아내기 위해 비슷한 장르의 외국의 영화들도 숱하게 모니터링 했습니다.
조민수의 몰입은 촬영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계속됐습니다. 촬영 현장에서 그녀의 긴장은 한시도 늦춰지지 않았습니다. 매 장면 촬영 후,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여길 때면 어김없이 “한번만 더” 찍자고 졸랐습니다.
“제가 완벽주의자여서가 아닙니다. 부족한 걸 알기 때문에 그만큼 더 열심을 내는 거지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요령을 피우게 될까봐 더욱 제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는 겁니다.”
4년여의 공백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시나리오 상 남성이었던 캐릭터를 자신에게 맡겨준 박 감독에게 보답하는 길 역시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라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촬영현장에 대본을 들고 가지 않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조민수는 사라지고 온전히 ‘닥터 백’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 자신을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진이 다 빠져서야 비로소 ‘마녀’의 올가미9덫)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녀는 데뷔 때부터 열정이 넘치는 배우였습니다. 여고 3학년때 CF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한 뒤, 처음 연기를 시작한 영화 ‘청 블루스케치’(1986년, 이규형 감독)와 KBS TV드라마 ‘해돋는 언덕’(1986년)에서 그녀는 신인답지 않은 당찬 모습으로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영화 ‘청 블루스케치’가 연출데뷔작이었던 이규형 감독은 당시 “조민수는 마치 5~6년차쯤의 배우처럼 능청스러웠다”면서 “신인 감독인 나를 비롯해 독고영재나 허준호 등 선배 배우들이 오히려 편안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얘기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과찬이었겠지만 그 정도로 조민수는 매 작품마다 능동적이며 열정적인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민수와 영화나 TV드라마 등 작품을 함께 했던 동료 배우들은 대부분 그녀에게 편안한 파트너십을 느꼈다고 입을 모읍니다. 1986년 데뷔 이후부터 지금까지 32년여의 연기생활을 해오는 동안 특별한 스캔들 한번 없이 늘 반듯한 아미지로 각인되어온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특히 국민 드라마로 일컬어진 SBS TV드라마 ‘모래시계’(1995년)에서 주인공 중의 한 명인 강우석 검사(박상원)의 부인 정선영을 연기했던 게 그녀의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정선영은 강우석의 하숙집 주인 딸로, 훗날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검사가 된 그에게 청혼을 받는 인물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강우석은 의식불명 상태인 정선영의 아버지 병실침대 옆에 앉아 “어르신, 아랫방 사는 강우석입니다. 어르신께 허락받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따님을 맞게 허락해주신다면 평생 아끼고 지키겠습니다”라고 청혼합니다.
하숙집에서 사법시험 준비하는 내내 헌신적으로 수고한 정선영에게, 또 하숙집 어르신이 자신과 딸이 잘 맺어지기를 바랐던 마음을 헤아리듯 청혼하는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정선영이 강우석에게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버지 안심하셨을 거예요. 이젠 됐어요.”라면서 조심스럽게 청혼을 고사하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신 같은 여자와 검사의 결혼은 ‘격이 맞지 않는다’며 조용히 고사하는 정선영,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라면서 “평생 노력하며 살겠다”며 청혼하는 강우석의 모습은 수많은 청춘남녀 시청자들에게 적잖은 감동을 안겨주었지요.
사실 드라마에서는 두 남자(강우석, 박태수)가 윤혜린(고현정)을 사랑하지요. 말하자면 조민수는 이런 상황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종녀의 전형 캐릭터를 연기한 겁니다. 그래서 이 정선영이 한동안 조민수의 실제 이미지처럼 굳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적어도 영화 ‘피에타’(2012년, 김기덕 감독)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2009년 SBS TV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의 제작발표회에서 선우선과 대화하는 조민수.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소식과 함께 화제작으로 떠오른 ‘피에타’에서 조민수는 상대배우인 이정진의 ‘엄마와 여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스테리한 인물 ‘마리아’로 나와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했습니다. 맨발로 얼음 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산 닭과 산 장어를 맨 손으로 잡는 모습도 서슴없이 보여주었지요.
베니스 영화제 당시 현지의 언론들도 “성스러우면서도 도발적인 매력의 여주인공”이라거나 “흑발의 마리아”라는 호평을 쏟아내며 여우주연상 수상을 예상하기도 했습니다.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바람에 여우주연상 수상의 아쉬움을 남겼습니다만 조민수는 ‘피에타’로 국내에서는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습니다.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영화평론가협회상의 여자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혔지요.
뿐만 아닙니다. 조민수는 지난 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독립영화인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왔음이 밝혀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녀는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탄압을 받았던 영화 ‘다이빙 벨’의 제작배급사 ‘시네마달’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 펀딩 등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이미 영화계에서 그녀는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배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지난 2015년 가수 디 아크의 ‘빛’ 뮤직비디오에 출연해서 일찌감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던 거지요. ‘빛’ 뮤직비디오는 세월호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는데, 그녀는 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서 “세월호는 명백하게 어른들이, 나라가 잘못한 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겁니다.
2016년 겨울부터 3개월여 이어진 국정농단 촛불집회에도 꾸준히 참여하며 촛불시민들과 적극 연대해 SNS상에서는 ‘개념배우’로 오르내리기도 했던 조민수.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본업이 연기임을 잊지 않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선택받는 직업이라는 엄연한 사실도 냉정하게 받아들입니다.
‘마녀’ 이후 차기 출연작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쉬는 시기’를 성장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잘 쉴’ 예정입니다.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는 음악도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영화 ‘위플래쉬’(Whiplash)에서 존재증명을 해보인 미국의 중견배우 J.K 시몬스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