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부터 두달여 동안 안방극장 시청자들의 눈과 귀는 온통 tvN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쏠렸습니다. 우리네 주변의 평범한 아저씨들이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이야기와 거칠고 비루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젊은 여인의 이야기가 얼키면서 서로에게 위로와 치유를 안겨주는 해피엔딩 드라마였습니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 삼형제 역으로 나온 이선균 박호산 송새벽 등과 여주인공 지안 역의 아이유의 연기케미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시청율 고공행진이 당연하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그리고 또 한 명,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중년배우 고두심의 존재 역시 드라마 성공의 한 축이었습니다. 가슴 먹먹한 감동과 울림을 주었던 이 드라마에서 고두심은 삼형제의 엄마 변요순 여사 역을 맡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특유의 ‘국민엄마’ 캐릭터를 십분 발휘했습니다. 억척스럽고 생활역이 강한 엄마, 그녀에게는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캐릭터였습니다.
드라마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캐릭터는 한때 영화감독으로 잘나가던 둘째 아들(송새벽)이 일자리를 잃고 집으로 들어온 데 이어 큰 아들(박호산)까지 빈털터리가 되어 여편네한테 쫓겨나 집으로 들어온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마흔 넘은 아들 둘이 집으로 들어와 있으니 열이 뻗쳐 욕을 한 바가지 퍼붓다가도 삼시세끼 따뜻한 밥은 챙겨 먹이는 엄마였지요.
죽기 전에 아들 셋이 제 짝들과 우애좋게 사는 것을 보고 죽어야 눈이 감길 텐데, 철부지 아들 둘이 추레하게 혼자 늙을까 걱정이 태산인 엄마에게 급기야는 막내 아들(이선균) 문제까지 닥칩니다. 공부면 공부, 회사면 회사, 가정이면 가정 등 모든 면에서 모범생이었던 막내 아들의 느닷없는 마음고생을 알게 되어 가슴앓이하는 엄마의 모습은 영락없는 ‘고두심 표’였습니다.
1980년대 데뷔 초기의 고두심 모습.
고두심 표’는 곧 ‘국민엄마’를 일컫는 것이지요. 1972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MBC TV 5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데뷔 초부터 갓난 아이를 업고 다니는 엄마 역할을 주로 맡았습니다. ‘국민엄마’의 싹이 이때부터 자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그녀는 애엄마 역할을 비롯해 자신의 나이보다 많은 여인네의 역할을 유난히 많이 맡았습니다.
MBC TV드라마 ‘정화’(1976년)에서도 제주도 출신의 거상 김만덕의 일대기를 연기했고, ‘설중매’(1984년)에서는 68세에 죽는 인수대비의 노년 역할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냈습니다. 당시 드라마 관계자들 역시 젊은 탤런트 고두심의 완벽에 가까운 노년 연기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특히 그녀의 필모그라피 중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MBC TV드라마 ‘춤추는 가얏고’(1990년)에서의 가야금 장인 연기는 지금도 방송가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명연기’로 꼽습니다. 극중 가야금 장인 이금화의 나이가 70세쯤으로 설정되었으니 30대의 그녀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연기였지요. 하지만 그녀는 정말 꼿꼿한 할머니의 모습을 극명하게 표출해냈습니다.
당시 그녀의 딸로 출연한 오연수는 막 데뷔한 신인이었는데, 훗날 고두심과 연기를 함께 했던 게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연기인생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기는 고두심도 최근 어느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가장 ‘무서운 배우’로 오연수를 지목했습니다. 바로 ‘춤추는 가얏고’에서 눈여겨 본 오연수의 모습을, 즉 자신의 촬영이 없을 때도 늘 카메라 옆에서 선배들의 연기를 지켜보던 ‘연기집념’을 칭찬했던 겁니다.
2005년 '2004 KBS MBC 연기대상'에서 두 방송국 연기 대상을 수상한 고두심.
고두심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은 MBC TV의 ‘전원일기’(1980년~2002년)입니다. ‘전원일기’의 중심 가족인 김회장 댁(최불암, 김혜자)의 큰 며느리이자 ‘영남엄마’로 22년을 살았으니까요. 김회장의 큰 아들 용진 역의 김용건과 22년간 드라마 속의 부부로 살면서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대한민국 엄마를 연기한 겁니다. 그녀 역시 ‘전원일기’와의 22년 인연에 대해서 “힘든 적도 많았지만 서민들의 아픔을 다독여주는 치유의 드라마였다”며 애착을 드러냈지요.
그녀는 대체로 평범한 가정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던 편입니다. “잘났어 정말!”이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방송국 연기대상 첫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KBS TV드라마 ‘사랑의 굴레’(1989년)에서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부잣집 아내로 연기한 것 외에는 대부분 서민 가정의 어머니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들보다는 딸의 엄마로 많이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드라마 구도가 남자 주인공은 백마 탄 왕자, 여자 주인공은 그의 사랑을 얻는 신데렐라 형태로 짜여지는 게 공식처럼 되어 있다보니 고두심 역시 바로 그 여주인공의 어머니 역할로 많이 등장했던 거지요.
'제 28회 황금촬영상 시상식'에서 영화 '엄마'(2005년,구성주 감독)로 인기상을 수상한 고두심.
때문에 고두심의 연기 인생 속에서는 사랑에 빠지는 멜로 연기를 펼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정작 본인은 멜로 연기를 하고 싶어했지만 웬만해서는 그녀에게 멜로의 주인공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물론 아주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녀의 멜로 연기는 안방극장이 아닌 스크린에서 주로 시도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멜로 연기를 펼치기에는 TV보다 스크린이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가 KBS TV드라마 ‘사랑의 굴레’로 연기대상을 수상한 후, 영화 ‘자유부인’(1990년, 박재호 감독)에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연하남(강석우)과 불륜에 빠지는 연기를 펼쳤습니다만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유부인’의 실패 후 곧바로 MBC TV드라마 ‘춤추는 가얏고’에서의 열연으로 또다시 방송국 연기대상을 수상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기운(?)을 받아 다시한번 스크린에서의 멜로 연기에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는 ‘겨울나그네’ 등 멜로 영화 연출로 정평이 난 故곽지균 감독의 ‘이혼하지 않은 여자’(1991년)였습니다. 남편의 외도로 소외된 위기의 주부가 그녀에게 맡겨진 캐릭터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멜로 연기의 상대는 연하남이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18살 아래였습니다.
상대 배우는 박상민이었습니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의 성공으로 주연급 배우로 우뚝 선 박상민과의 멜로 호흡도 괜찮았습니다.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의 감정을 밀도있게 그려냈습니다. 곽지균 감독의 연출도 거들었지요.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키스 장면은 일품이었습니다. 노출을 앞세운 섹스신 대신 말그대로 ‘딮키스’가 스크린을 가득 덮었습니다. 얼마나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묘사됐는지 관객들 사이에서도 이 키스 장면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가십처럼 흘러 다녔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멜로 연기에 한(?) 맺힌’ 고두심의 뛰어난 감정처리가 뒷받침됐습니다. 물론 박상민도 고두심의 리드에 잘 따라줬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가 처한 방황과 절박한 심정 등이 고스란히 연기로 전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고두심 자신도 ‘이혼하지 않은 여자’의 출연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비록 이 영화도 흥행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고두심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훗날 곽 감독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을 때(2010년), 그녀는 많은 이들이 찾지 않아 쓸쓸했던 그의 빈소를 하루종일 지키며 고인을 애도했습니다.
2005년 '제 32회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서 사회를 맡은 고두심이 "방송은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나타내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는 인사말을 하고 있다.
멜로 연기에 대한 그녀의 도전은 이후에도 한 차례 더 있었습니다. ‘가족의 탄생’(2006년, 김태용 감독)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연하남이었는데, ‘이혼하지 않은 여자’보다 한 술 더 떠 23살이나 아래였습니다. 상대배우는 엄태웅이었습니다.
집을 나갔던 동생(엄태웅)이 5년만에 돌아오면서 데리고 온 연인이 고두심이었습니다. 누나(문소리)는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동생의 연인을 보고 기가 막힌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 영화에서 고두심은 순진한 듯 천연덕스럽게 엄태웅의 연인 캐릭터를 유머러스하게 펼쳐냈습니다. 진지한 멜로 감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따스한 인간 드라마를 펼쳐내는 연륜이 짙게 묻어났습니다.
하지만 역시 고두심에게는 ‘국민엄마’ 연기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지난 해에 공개된 영화 ‘채비’(조영준 감독)에서 그녀의 ‘국민엄마’ 진가가 다시한번 잘 드러났지요.
발달장애 아들(김성균)을 데리고 사는 시한부 인생의 엄마가 그녀의 역할이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는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들에게 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것저것 가르칩니다. 계란후라이도 만들고 혼자 밥을 챙겨 먹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다소간 마음을 놓는 엄마 고두심의 모습은 짠하기 그지 없습니다.
특히 지인의 장례식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엄마도 저렇게 갈 거야”라며 엄마의 죽음을 대비시키는 장면에서는 눈물콧물이 다 나오고 맙니다. 한국의 방송국 3사(KBS, MBC, SBS)의 연기대상을 모두 수상한 저력의 연기내공이 영화 전편에서 물씬 풍겨났지요.
고두심은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까지 수상, 국내 배우중에서 가장 많은 수상기록을 지닌 배우이기도 합니다. 어느 방송비평가는 “그녀의 왕성한 연기활동을 감안하면 2020년대에도 연기대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망하기도 합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2005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시상식'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고두심.
2007년 연극 '친정엄마'에서 열연하는 '국민엄마' 고두심.
2007년 '문화의 날' 행사에서 대중예술부문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한 고두심.
2008년 '앙드레김 패션쇼'에 참석한 고두심.
2008년 '핑크리본 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고두심.
2010년 특별기획물 '희망로드 대장정'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고두심.
2012년 연극 '여섯주 동안 여섯번의 댄스레슨'에서 열연하는 고두심.
2013년 드라마 '미래의 선택'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고두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