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성’은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여성문제에 대한 역사적이면서 사회적인, 그리고 생리적인 고찰을 담은 책입니다. 여성에게 자의식을 불어넣어준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페미니즘 저서로 불리기도 하지요.
“지금의 여성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주체인 남성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제 2의 성인가”
전세계 여성들의 필독서가 되었던 ‘제 2의 성’의 이 화두를 영상에서 다뤄보겠다며 야심찬 기획으로 제작된 영화가 ‘제 2의 성’(1989년, 고영남 감독)입니다. 하지만 1986년 보부아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여성운동의 최고 사제’라거나 ‘페미니즘의 성서’라는 추도사를 들었던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페미니즘 보다는 에로티시즘의 향기가 더 짙게 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故임성민이 당대 최고의 섹시가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와 조각같은 마스크를 앞세워 독점적으로 스크린을 누볐습니다. 당시 내로라하는 정상급 여배우들과는 대부분 한두 번쯤 호흡을 맞췄을 정도였으니까요.
당대 최고의 섹시가이였던 故임성민과 이혜영의 출연만으로 화제가 됐던 영화 '제 2의 성'
‘고래사냥’(1984년)과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년) 등 배창호 감독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상큼한 매력을 발산하던 이미숙과는 ‘바람난 도시’(1984년, 김양득 감독)에서 멜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런가하면 ‘애마부인’으로 인기 절정을 누리던 안소영과는 미스테리 터치의 멜로영화 ‘달빛 멜로디’(1984년, 이황림 감독)에서 에로틱 무드를 한껏 자아냈으며, 역시 80년대 유행했던 에로티시즘 영화를 통해 각광받던 신예 오혜림과는 ‘탄드라의 불’(1984년, 김성수 감독)에서 아슬아슬한 수위의 에로티시즘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무릎과 무릎사이’(1984년, 이장호 감독)에서는 한국의 마리네 디트리히로 불리는 뇌쇄적 각선미의 여배우 이보희와 빗속에서의 농염한 정사 장면을 연기해내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이 컬럼에서 소개하는 ‘제 2의 성’에서는 이지적인 매력의 여배우 이혜영과 서로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괴로워하고 방황하는 부부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임성민의 출연작들을 살펴보면 눈길을 끄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 작품이 모두 1984년 한 해 동안 촬영됐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한 편 찍는 데 아무리 빨리 찍어도 두어 달은 걸린다고 감안할 때, 도대체 그가 언제 잠을 자고 언제 일어나 촬영했을지 상상조차 안될 정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영화계가 임성민의 존재를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비단 1984년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1985년에도 그는 영화와 방송을 오가며 촬영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영화 ‘색깔있는 남자’(1985년, 김성수 감독)에서는 섹시 여배우로 오수미와 오혜림의 상대역으로 출연했고, ‘장사의 꿈’(1985년, 신승수 감독)에서는 금보라와 호흡을 맞춰 백상예술대상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제 2의 성'에서 이혜영은 지성미를 갖춘 매력과 과감한 노출연기로 시선을 모았다.
당시의 이같은 상황에서는 임성민이 출연하는 영화라면 으레 에로티시즘을 연상케 되는 게 당연했습니다. ‘제 2의 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는 별로 상관없는 영화로 완성됐습니다.
영화 개봉에 앞서 공개된 포스터와 전단에서도 노골적으로 ‘에로티시즘’을 표방했습니다. 어깨를 드러낸 반나의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이혜영의 사진 위에는 “女子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라는 문구와 “침대는 女子에게 있어 봉사의 장소인가”라는 문구가 도발적으로 씌어 있었습니다. 그 아래로는 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왜 女子의 잘못은 세상사람들이 크게 떠벌립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와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도 다분히 자극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남자없이는 잠 못 이루는 체질의 끼가 넘쳐흐르는 여자~아내 이혜영”으로 시작해서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도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남자~남편 임성민”이라고 설명해놓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집에는 철망을 두르고 남의 집 철망은 끊으려는 남자 ~情夫 남궁원”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80년대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섹시스타였던 임성민.
공사장의 현장감독 허빈(임성민)은 직업상 잦은 지방 출장으로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어느날 허빈은 경주의 호텔 공사장으로 장기 출장을 떠나게 됩니다.
아내 서연(이혜영)은 남편의 출장으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자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급기야 외로움을 못이긴 서연은 외도하게 됩니다.
잠깐 서울에 올라온 허빈은 우연히 아내 서연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고 큰 배신감과 충격을 받습니다. 경주에 다시 내려온 허빈은 아내에 대한 배신감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이때 함께 일을 하던 인테리어 디자이너 지수(방희)가 허빈을 유혹하고, 그 역시 지수와 불륜관계를 갖습니다.
한편 서연은 외도 관계를 정리하고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경주로 오는데, 남편과 지수의 관계를 눈치챕니다. 그렇게 허빈과 서연의 부부관계는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걷고 둘의 가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 때문에 상처받고 괴로워하던 서연의 친구(조주미)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친구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은 서연은 남편 허빈과 다시 대화를 통해 부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의미를 깨달으며 화해하게 됩니다.
'제 2의 성'의 촬영현장. 故고영남 감독(가운데)이 이혜영에게 촬영에 앞서 설명하는 장면.
영화의 줄거리에서 보듯 부부간의 사랑과 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아내(이혜영)는 아내대로, 남편(임성민)은 남편대로 각각 외도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묘사가 다분히 에로티시즘에 무게를 두고 있는 형태로 펼쳐졌지요.
영화를 소개하는 전단지에도 “왜 나만 탓해요? 당신은 다른 여자의 향수냄새를 거절했던가요?”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관객의 발길을 극장으로 유인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故고영남 감독은 “부부의 외도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연출의 변을 밝혔습니다만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강조했던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화두를 제대로 영화로 풀어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비평가들이 회의적인 시선을 나타냈습니다.
다만 고 감독의 노련한 연출솜씨로 인해 당시 군사독재정부의 3S(Screen, Sports, Sex) 정책으로 인해 붐을 이루다시피했던 이른바 ‘싸구려 에로영화’로 전락하지는 않았습니다.
하기는 고 감독은 1964년 ‘잃어버린 태양’으로 데뷔한 이후 200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108편의 영화를 연출한 베테랑 감독이니까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영화들을 연출해온 것으로 유명한 그는 특히 박노식 장동휘 허장강 등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스타들이 총출동한 전쟁액션영화 ‘결사대작전’(1969년)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설국’(1979년), 마약조직을 둘러싼 액션영화 ‘코리안 커넥션’(1990년) 등으로 한국영화감독사에 족적을 남겼지요.
한편 ‘제 2의 성’에는 임성민 이혜영의 딸로 아역배우 이재은이 출연했습니다. 훗날 ‘노랑머리’(1999년, 김유민 감독)에서 과감한 노출연기를 펼치며 성인배우로 폭풍성장하게 된 ‘될 성 부른 떡잎’이었던 셈입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故임성민이 불과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지요. 만일 그가 지금까지 연기생활을 계속 하고 있었더라면 한국 영화계의 든든한 남자 배우로 자리하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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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고영남 감독은 베테랑다운 연출로 '제 2의 성'을 수준급의 에로티시즘영화로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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