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스타 강수연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년, 곽지균 감독)은 집단 성폭력이라는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치유하지 못한 여성의 외상에 대해 탐구한 영화입니다. 그전에도 성폭력에 관한 영화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은 성폭력으로 빚어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 관계의 충돌에 대해 심도있게 파고들었던 '독특한 색깔'의 영화였습니다.
강수연은 이 영화에서 대학시절 남자친구 진우(정보석)가 보는 앞에서 다섯명의 불량배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여주인공(수미)으로 나옵니다. 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이후 7년만에 귀국하여 프랑스어학원 강사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녀는 낮에는 프랑스어학원의 강사로, 밤에는 유흥가의 클럽을 전전하며 섹스에 탐닉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그녀 앞에는 세 남자가 있습니다. 옛 연인이었던 진우, 그리고 그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학원생 강호(김세준), 또 젊은 시절의 상처로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현욱(김영철). 이 세 남자와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충돌이 이 영화를 끌어가는 동력입니다. 수미의 이중생활을 알게 된 진우는 어떻게든 수미의 정신적 육체적 방황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지만 그녀는 끝내 진우를 거부합니다. 그런가하면 학원생 강호는 수미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소동을 벌입니다. 여기에서 수미는 또한번 충격을 받고 요양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요양생활로 과거의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되자 자신처럼 상처를 지닌 현욱을 찾아갑니다. 그 사이에 진우는 과거 수미에게 집단 성폭력을 가했던 범인들을 하나씩 찾아내 모두 살해하고, 자신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곽지균 감독이 2010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웬지 모를 필연처럼 오버랩되면서 연민을 자아냅니다. 고 곽 감독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외에도 '겨울 나그네' 등 여러 영화에서 죽음을 모티프로 다룬 경우가 많았던 탓에 영화계 일각에서는 고 곽 감독의 죽음에 대해 예견된 일이었다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곽 감독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에서의 진우의 죽음(자살)에 대해서는 "수미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과 집착이 파국을 낳은 것일 뿐"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아울러 수미(강수연)와 현욱(김영철)의 관계를 통해 "사랑은 또 다른 희망과 구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곽 감독은 자신의 노트북에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라는 제목의 긴 글을 남겼는데, 이 안에는 한때는 한국 멜로영화의 대표감독으로 일컬어졌으나 수년째 연출의뢰가 들어오지 않는 현실을 비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영화계의 많은 동료 감독들과 스태프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영화작업을 함께 해온 배우들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특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의 촬영과 후반작업을 거쳐 개봉을 앞둔 시사회에서 곽 감독으로부터 "수미를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는 배우는 이 세상에 강수연밖에 없을 것"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강수연으로서는 그 슬픔이 누구보다 컸습니다. 실제로 강수연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후 '장미의 나날'(1994년)과 '깊은 슬픔'(1997년)에서 연이어 호흡을 맞춰 '곽지균의 페르소나'로 불렸을 정도였으니까요. 곽 감독의 비보를 전해들었을 때도 강수연은 한달음에 대전의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이틀 밤낮을 꼬박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던 강수연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강수연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의 복잡미묘한 수미 캐릭터를 소름돋도록 표현해냈습니다. 강수연에게 월드스타의 명예를 안겨준 '씨받이'(1987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가 강수연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탄생을 알린 작품이라면 '그 후로도 오랫동안'은 강수연의 감춰졌던 팔색조 매력이 한껏 발산된 '강수연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여러 영화에서도 연기력에 대해서는 늘 인정을 받아온 그녀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에서는 과거의 상처를 안은 채 섹스에 탐닉하는 광기 어린 다중인격을 리얼하게 펼쳐내 평단과 매스컴으로부터 열화와 같은 찬사를 들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오는 관객들 역시 이런 호평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으며, 몇몇 남성 관객들 사이에서는 강수연이 연기해낸 이중적인 수미의 캐릭터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수미가 진우의 헌신적인 사랑을 외면하는 게 옳으냐? 그렇게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게 옳으냐? 하는 것에서부터 수미는 꼭 현욱을 찾아가야만 했느냐 등등.
강수연은 다섯살 때 TBC TV의 '똘똘이의 모험'에서 처음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학교 교실보다는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현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아역배우였던 거죠. 지금도 똑 부러지는 캐릭터로 잘 알려져있지만 어린 시절에도 예쁘고 당찬 모습이었습니다. '될 성 부른 떡 잎'이었던 거죠. 당연히 촬영현장의 많은 어른들로부터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놀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찌나 그렇게 철철 눈물을 흘리며 연기하는지, 그녀를 부러워하는 성인배우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결국 강수연은 이러한 아역배우시대를 거쳐 10대, 20대, 30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원숙해지는 '월드스타'의 진면목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그후로도 오랫동안'에서 처음 만나 호흡을 맞춘 강수연과 정보석은 비극적인 연인의 관계를 가슴아프게 그려냈다.
수미(강수연)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강호(김세준).
강수연의 상큼한 헤어스타일과 표정에서 팔색조 매력이 물씬 묻어난다.
촬영을 앞두고 강수연과 김세준에게 자신의 연출방향을 설명하는 곽지균감독(왼쪽).
김세준과 심각하게 강호의 캐릭터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곽지균 감독.
강호(김세준)의 친구로 등장하는 주용만(오른쪽).
촬영할 장면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강수연, 김세준, 곽지균 감독.
'그 후로도 오랫동안'을 통해 영화계의 새로운 블루칩으로 떠오르게 된 정보석.
강수연 김세준과 촬영할 장면에 대해 설명하는 곽지균 감독. 이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강수연의 따뜻한 눈빛에서 존경의 마음이 엿보인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의 촬영현장.
쉬는 시간에 서로의 피로를 덜어주는 대화를 나누는 정보석과 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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