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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물 위를 걷는 여자`

기사입력 [2017-09-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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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배우를 딱 한 명만 꼽으라면 누구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남녀노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마도 50~60대 이상 장년층은 압도적으로 신성일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겁니다. 어쩌면 20~30대 젊은이들도 그의 출연 영화를 직접 보진 않았더라도 이런저런 풍문으로, 또는 정보들을 통해 , 신성일이라는 배우가 한국영화사의 상징 같은 배우였구나하는 정도는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신성일이라는 이름 석자는 한국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960년 고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신필름)에서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2013년의 야관문까지 무려 500 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매년 10편 가까운 영화를 촬영해야 가능한 일이니, 쉽게 믿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신성일은 예명입니다. 고 신상옥 감독이 뉴 스타 넘버 원이란 뜻으로 지어준 이름입니다. 훗날 국회의원 생활을 잠시 하면서 자신의 원래 성씨인 강씨를 앞에 붙인 이후에는 강신성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요. 신성일은 자신의 출연영화 리스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한국영화 제작의 황금기라 불리던 60년대에는 동시에 3~4편의 영화를 찍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죠. 소속사의 매니저가 운전해서 데려다주는 대로 이 촬영장, 저 촬영장을 오가며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자신이 찍는 영화의 제목이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얼마전 송중기-송혜교 커플의 결혼 소식을 두고 세기의 결혼이라고들 했습니다만 196411월의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이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할 만 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영화에서 커플로 출연했는데, 신성일은 동백아가씨’(1964, 김기 감독)를 같이 하면서 사랑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전국에서 4천여명의 팬들이 몰려와 큰 혼잡을 빚었습니다. 서울 시경 관할의 수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에스코트를 맡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결혼 이후 신성일은 계속 영화배우로 활동했지만 엄앵란은 전업주부로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두 사람은 전격적으로 영화사(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하고 영화제작에 나서게 됩니다. 창립작품으로 제작한 코리안 커넥션’(1989, 고영남 감독)의 흥행 실패 이후, 신성일은 당시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박철수 감독을 스카우트합니다. 당시 박철수 감독은 어미’(1985) ‘안개기둥’ (1986) ‘접시꽃 당신’(1990) 등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로 여성 영화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신성일이 박철수 감독에게 연출의뢰를 맡긴 영화가 물 위를 걷는 여자입니다. 100만 부 이상 팔린 신달자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원작의 영화화는 안전한 기획이었으니까요. 친구의 남편과 불륜에 빠진 여주인공의 이야기 역시 매우 대중적인 소재였습니다. 창립작품의 흥행실패로 고전하던 신성일(성일시네마트)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기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해(1990) 1월에 개봉된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흥행 성공(31만명 관객동원)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원작의 영화화, 스위스와 미국 등 해외 로케이션 촬영 등이 물 위를 걷는 여자의 촬영에 그대로 적용된 셈입니다. 왜냐하면 물 위를 걷는 여자에서는 프랑스 촬영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죠.

 

사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난희(황신혜)와 민희(강문영)가 재민(이덕화)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입니다. 가난을 딛고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는 난희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뒤, 파리에 출장온 민희의 남편 재민과 사랑에 빠집니다. 난희는 귀국 후에도 재민과의 불륜을 계속 이어가는데, 결국은 친구 민희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들키고 맙니다.. 민희에 대한 미안함으로 난희는 재민과 헤어져 다시 파리로 돌아가고, 민희는 재민과 이혼하고 패션사업을 이어받아 전업주부에서 커리어우먼으로 변신합니다.

 

얼핏 보면 치정에 얽힌 삼각관계 신파처럼 보이지만, 원작에서와 달리 영화는 오히려 이 관계의 틀을 깨트린 여성들의 주도적인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난희와 남편 재민의 불륜을 민희가 끝까지 모르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영화에서는 이를 알게 하고, 삼각관계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남편과 불륜에 빠진 친구의 배신을 극복해낸 민희는 남자가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자주적으로 나아갑니다. 남편이 불륜에 대해 변명하려 할 때, “말하지 마세요. 더 말하면 정 떨어져요라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민희의 모습은 많은 여성관객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파리로 찾아간 민희가 난희와 해후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남자 하나 때문에 인생과 우정을 놓치지 않겠다는 두 여주인공의 의지에 공감의 박수를 보내기까지 합니다. 한 마디로 페미니즘 영화입니다.

 

황신혜와 강문영, 두 여배우의 연기가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여성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또 안전한 기획을 증명하듯 프랑스 파리 일원을 오가며 촬영한 풍광과 색감도 여성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필자 역시 이 영화 촬영 당시 파리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 빈센트 반 고흐의 마을인 오베르 쉬와즈에서의 촬영은 장면 하나하나가 예술이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던 고흐의 그림들 오베르 교회라거나 까마귀 나는 밀밭등의 소재였던 풍광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교통사고로 갈비뼈 대부분이 으스러져 촬영 합류 여부 조차 불투명했던 이덕화가 파리 촬영 내내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다고 했겠습니까. 당시 이덕화는 갈비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 파리 촬영 합류를 계속 미뤄왔던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파리 촬영에 대해 흡족해 했습니다만 처음 한동안은 갈비뼈의 통증으로 난희(황신혜)와의 포옹신 조차 찍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불륜에 빠진 남녀의 사랑이니 당연히 격정적으로 묘사되어야 하는데, 사랑 행위 장면마다 조심스럽게 찍어야 했던 이덕화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에피소드들을 풍성하게 펼쳐내며 촬영한 물 위를 걷는 여자1990년 추석에 개봉됐습니다. 신달자의 원작 물 위를 걷는 여자가 출간된 게 1월이었으니 8개월여만에 기획에서 시나리오 탈고, 촬영, 후반작업을 거쳐 개봉까지 끝냈습니다. 초스피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제작과정에도 불구하고 관객도 15만명(서울 개봉관 기준)이나 들었습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총지휘한 박철수 감독의 내공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다르게 말하면 신성일이 왜 박철수 감독을 스카우트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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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걷는 여자'의 여주인공 난희 역의 황신혜. 가난을 딛고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겠다는 야심의 여주인공 난희 역을 무난하게 연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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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물위를 걷는 여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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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어미'를 비롯해 '안개기둥'과 '접시꽃 당신' 등의 영화로 페미니즘 영화의 새 지평을 연 박철수 감독(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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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 역의 강문영과 난희 역의 황신혜가 촬영을 앞두고 박철수 감독의 연기 디렉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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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민희의 남편 재민(이덕화)과 불륜에 빠진 난희(황신혜)에게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의 갈등에 대해 설명하는 박철수 감독(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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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목표 달성을 자축하는 축하연의 촬영장면. 당시 재민 역의 이덕화는 교통사고로 갈비뼈를 크게 다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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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목표달성 축하연에 참석한 내외빈에게 인사말을 전하는 재민(이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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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촬영에서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엑스트라 배우들을 동원해서 찍는 파티 장면이다. 파티에 어울릴만한 캐릭터의 배우들과 의상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 수없이 많은 리허설을 거쳐야만 촬영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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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수 감독의 연출 내공은 '물 위를 걷는 여자'의 기획과 촬영완료, 그리고 개봉까지 불과 8개월여에 끝냈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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