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로맨틱코미디 영화의 대명사와도 같은 ‘결혼 이야기’(1992년, 김의석 감독)는 한국영화계에 ‘기획영화’의 바람을 불러온 신씨네(신철 대표)의 가장 성공적인 ‘기획영화’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이 컬럼에서 ‘기획영화의 효시‘로 명명했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강우석 감독)가 당시 대입시험을 앞둔 고교생 500여명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고민을 담아냈듯이 ’결혼 이야기‘ 또한 20대~30대 결혼 연령층을 상대로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에 대한 설문조사를 거쳐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신세대 부부의 결혼생할과 성을 솔직하게 다루면서 기존 멜로영화의 패턴을 깨트리는데도 성공한, 신씨네의 기획과 아이디어가 빛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영화 속의 주인공 남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티격태격 이야기가 오로지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영화 속의 남녀 멜로라인에는 두 사람 외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모나 가족, 혹은 친구나 주변부의 인물들과 얽히는 곁가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만 ‘결혼 이야기’에서는 그러한 에피소드들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로맨틱코미디의 정석과도 같은 만남과 갈등, 그리고 헤어졌다가 화해를 통한 해피엔딩의 구조를 따르면서도 그 갈등조차 두 사람의 캐릭터에서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그 흔한 삼각관계 등의 신파적인 색깔은 그야말로 눈 씻고 봐도 안나옵니다. 그러니까 관객들에게 신선한 공감과 감흥을 줄 수 있었던 겁니다.

남녀 주인공은 최민수와 심혜진입니다. 이 시절 영화 이야기를 할 때, 곧잘 언급되는 사실입니다만 최민수는 영화 ‘남부군’(1990년, 정지영 감독)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여 MBC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년)의 ‘대발이’ 연기로 그야말로 대박을 치며 ‘최무룡 아들’의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버린 직후였습니다. 심혜진 역시 ‘톡 쏘는 매력’의 콜라광고 모델을 시작으로 ‘그들도 우리처럼’(1990년, 박광수 감독)을 통해 낭뜨3대륙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급부상한 때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 영화계는 월드스타 강수연의 독주체제나 다름없었는데, 심혜진으로 인해 경쟁체제가 구축될 수 있었던 거죠. 결국 최민수 심혜진의 남녀 주인공 캐스팅 카드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인기 절정의 심혜진(왼쪽)과 최민수(오른쪽) 주연의 '결혼 이야기'는 신세대 부부의 결혼생활과 성을 '유쾌 발랄 솔직'하게 그려내 한국 로맨틱 코미디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독립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주인공 지혜(심혜진, 오른쪽)는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태규(최민수)와 사사건건 부딪치며 갈등에 휩싸인다.

방송국 라디오국 PD인 태규(최민수)와 단역 성우 지혜(심혜진)는 결혼한 사이입니다. 일과 사랑을 다 이룬 듯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주위 사람들에게 매우 성공적으로 비쳐집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거의 대등한 부부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결혼 전에 여성해방론자 같았던 태규가 은근히 남성우월주의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면서 둘의 결혼생활에 갈등이 몰아칩니다. 양치할 때 치약을 짜는 일에서부터 밥 짓고 설거지 하는 일, 심지어는 침실에서의 문제까지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칩니다. 사랑과 섹스, 결혼이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결국 서로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게 되고, 극심한 갈등의 끝에서 두 사람은 이혼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태규는 자신이 한순간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아프게 했던 상처와 기억도 이젠 웬만큼 아물었다고 생각한 태규는 지혜에게 다시 시작해보자고 화해를 청합니다. 그렇지만 지혜는 두 번 다시 악몽을 겪고 싶지 않다면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에 태규는 지혜가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엽서를 보내고는 지방 전근을 자청합니다. 그리고는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적인 결말, 해피엔딩입니다. 태규와 지혜는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언덕의 나무 아래에 마주 섭니다.

태규(최민수)와 지혜(심혜진)의 결혼생활은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행복한 모습으로 비쳐진다.

'결혼 이야기'의 수중 촬영장면. 최민수와 심혜진, 두 사람 모두 수영에 일가견을 갖고 있어 매우 순조롭게 촬영을 마쳤다.

영화의 내용에서 보듯 태규와 지혜, 두 사람의 이야기 외에 곁가지 에피소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곤 별로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남녀 주인공만의 이야기를 두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다는 건,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만큼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돼야 하고, 이야기 또한 촘촘하게 전개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 이야기’는 이런 부담을 기꺼이 감수했고, 또 뛰어 넘었습니다. 여기에는 태규와 지혜라는, ‘기획적으로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든든한 받침이 되었습니다. 특히 독립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지혜의 캐릭터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현대 여성상의 새로운 모델이었습니다. 결혼 후의 생활에서 가사분담은 물론이고,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비전과 자신감도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임신에 대한 강박도 전혀 없습니다. 흔히 독립적인 커리어우먼이라도 나중에 애낳고 난 뒤에는 그냥 전업주부로 눌러앉곤 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아이 문제가 됐든, 남편 문제가 됐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그만 두지 않을 캐릭터였던 거죠.

그뿐 아닙니다. 부부간의 성문제에 관해서도 지혜는 태규를 곧잘 다그칩니다. 남편의 섹스 테크닉을 탓하기도 하고, 미숙한 손놀림에도 핀잔을 줍니다. 침실에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요. 지혜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영화 개봉 후에 적잖은 여성 관객들로부터 “지나친 설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20대~30대 여성관객들의 입장에서는 20대 중반의 여주인공 지혜가 성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설정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겠죠. 그런데다가 상대적으로 태규는 이미 혼전 성경험을 충분히 가진 뒤에 결혼한 커플답지 않게 아내를 대하는 방법이 너무 서툰 것으로 묘사된 점도 이같은 비판을 낳게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온 어느 여성관객은 “태규의 일방적인 섹스 집착이 무식하게 보였다”면서 “특히 싫다는 아내에게 강제적으로 섹스하자고 덤벼드는 부부강간은 불편하기까지 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래도 결국 ‘결혼 이야기’의 지혜는, 지혜의 독립적인 결혼생활은 많은 여성관객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심혜진의 상큼발랄한 이미지가 단단히 한몫 했습니다. 어찌보면 ‘결혼 이야기’의 지혜는 심혜진과 너무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습니다. ‘자기한테 잘 맞는 옷’을 입었을 때, 그 옷이 빛나듯 심혜진도 ‘결혼 이야기’가 자신에게 잘 맞는 영화였던 거죠. 아마 심혜진이 아닌 다른 여배우가 지혜 역할을 연기했다고 하면,,,, 글쎄요. 서울에서만 52만명이라는 관객동원기록을 남기는 흥행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이 영화에는 훗날 스타급으로 우뚝 선 배우들이 단역이나 엑스트라로 여러차례 화면에 등장합니다. 엄정화는 태규(최민수)의 직장 동료로 나오는데, 꽤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대사는 거의 없이 슬쩍슬쩍 비칠 때마다 ‘표정연기’를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아마도 당시 최민수를 돌봐주던 고(故) 배병수 매니저의 입김으로 엄정화의 출연분량이 많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엄정화도 최민수와 같은 소속이었으니까요. 방송국 DJ로 잠깐 출연한 독고영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해 그때를 생각해보니, 그야말로 엑스트라로 잠깐 얼굴 옆모습만 보였던 정선경으로서는 많이 섭섭(?)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2년 뒤에 그녀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년, 장선우 감독)를 통해 남부럽지 않은 인기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결혼 이야기’는 심혜진에게 당시 경쟁관계에 있던 강수연을 제치고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습니다. 최민수는 남우주연상, 이 영화로 감독데뷔한 김의석 감독은 신인감독상을 받았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결혼 이야기' 촬영 당시 최민수는 영화 '남부군'과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로 인기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결혼 이야기'에서 방송국 라디오국 PD 태규 역할을 자연스럽게 연기해낸 최민수.

'결혼 이야기'의 여주인공 지혜(심혜진)는 부부간의 성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솔직했다. 남편 태규(최민수)의 섹스 테크닉을 탓하기도 하고, 미숙한 손놀림에 대해 핀잔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