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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노는 계집 창`

기사입력 [2018-01-0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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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국내 극장가에는 어느 해보다도 영화 관객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199512월에 새로 제정된 영화진흥법과 영화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던 검열제도가 1997년에 폐지되고, ‘상영등급제로 바뀐 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그동안 검열로 인해 다루기 어려웠던 분단 문제 등의 사회정치적 이슈나 성적 표현의 한계를 성인 등급으로 매기는 등 다양한 영화에 대한 창작의 자유가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한국영화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어서 과거 같으면 국내에 수입 공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쇼킹 아시아등 외화들도 극장에 버젓이 간판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1997년 국내 극장가에서의 관객동원 기록을 살펴보면 1위부터 3위까지는 모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채워졌습니다. 여름방학 성수기를 겨냥해 개봉된 주라기 공원2- 잃어버린 세계’(1, 100만명)를 비롯해 콘 에어’(2, 97만명) ‘5원소’(3, 85만명) 등의 순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영화 편지’(74만명)4, ‘접속’(70만명)6위에 올랐습니다.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해에는 유난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꽤 많이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페이스오프’(5, 71만명) ‘에어포스 원’(7, 67만명) ‘맨 인 블랙’(8, 66만명) ‘제리 맥과이어’(9, 46만명) 등 제목만 들어도 화려한 이 영화들과의 경쟁에서 이 정도로 선전했다는 건 한국영화의 경쟁력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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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가로 흘러들어온 여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노는 계집- 창'에는 전국의 사창가 풍경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사창가 세트에서 호객행위하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엑스트라 배우들. 

 

흥미로운 사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전쟁터였던 여름방학 성수기를 지난 추석시즌에는 야심차게 기획 제작한 한국영화들이 극장가에서 뜨거운 경쟁을 펼쳤다는 점입니다. 바로 오늘 컬럼에서 소개하는 노는 계집- ’(임권택 감독)를 비롯해 접속’(장윤현 감독) ‘블랙잭’(정지영감독) ‘마리아와 여인숙’(선우완 감독) ‘현상수배’(정흥순 감독) 등이 모두 추석 대목을 노리고 개봉되었습니다. 각 영화들의 감독 만큼이나 주연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했지요. ‘노는 계집- 에는 신은경, ‘접속에는 한석규 전도연, ‘블랙잭에는 강수연 최민수, ‘마리아와 여인숙에는 심혜진 신현준, ‘현상수배에는 박중훈이 각각 주연으로 등장했습니다.

 

결과를 먼저 밝히자면 이들 영화 중 흥행성공으로 웃음 지은 작품은 접속노는 계집 - 이었습니다. ‘접속만큼은 아니었지만 노는 계집- 역시 41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1997년 흥행랭킹 10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노는 계집- 의 경우에는 검열제도 폐지에 따른 대표적인 수혜 영화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어둠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창녀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 영화에는 검열제도가 존속했더라면 잘려나갈 장면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성년자 관람 불가 등급을 받고 언론 시사회를 가진 뒤에는 여주인공 신은경의 노출연기가 여러 신문과 방송의 가십기사로 다뤄지면서 일파만파 세간의 화제거리로 회자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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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벽제에 지은 사창가 세트. 

  

신은경은 노는 계집- 의 출연 직전, 음주운전 파문으로 한동안 자숙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녀는 깊은 슬픔’(곽지균 감독)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작 스태프들과의 회식에서 술을 마신 채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가다가 추돌사고를 냈던 겁니다. 그것도 길가에 주차되어 있던 전투경찰버스를 말입니다. 음주운전 사고는 그 즉시 알려졌고, 영화 깊은 슬픔에서도 하차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는 당분간 자숙하겠다며 자의반타의반 연기활동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권택 감독과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 그녀를 카메라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의 공중파 방송 출연에는 제약이 있었지만 영화에 출연하는 건 관행적으로 묵인되어 왔던 터였습니다.

 

신은경은 노는 계집- 의 촬영을 앞두고 가진 제작발표회에 참석해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면서 최선을 다해 좋은 연기로 속죄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쳤습니다. 임 감독도 노는 계집 - 에 신은경을 캐스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거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폐 중의 하나인 사창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야 하는데, 이곳에서 몸을 팔아 살아가야 하는 여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을 비극적으로 연기해낼 배우로 신은경이 적임이라고 판단했다고 말이지요.

 

실제로 신은경은 임 감독의 기대와 주문에 철저하게 부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 감독과 함께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이름난 사창가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사연부터 편하게 살기 위해 제발로 들어와 매춘을 한다는 강변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결연히 노는 계집으로 변신했습니다. 당시의 신은경으로서는 절치부심의 기회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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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계집- 창'에서 여주인공 영은(신은경, 사진 위 왼쪽, 아래 사진)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퇴기로 열연한 정경순.(사진 위 오른쪽)

  

열일곱의 영은(신은경)은 시골에서 상경해서 청계천 피복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꼬임에 술집으로 옮깁니다. 하지만 술만 파는 접대부는 애초부터 없었고, 더군다나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영은은 직업소개소의 사기에 휘말려 사창가로 팔려가게 됩니다.

1970년대의 사창가는 폭력과 착취가 난무합니다. 이곳에서 영은은 포주와 건달들에게 윤간을 당한 뒤, 매춘을 강요받게 됩니다. 영은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점차 사창가 생활에 적응해가는데, 어느날 착한 남자 길룡(한정현)이 가끔씩 나타나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를 안겨주곤 합니다.

1970년대 산업화의 변천과 더불어 사창가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영은은 중년의 나이에 이르도록 전국의 사창가를 전전하며 매춘인생으로 연명해갑니다. 그 사이에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사기를 당해 빚만 잔뜩 짊어진 채 그저 고향만 그리워하는 퇴기로 전락한 겁니다. 어느날 젊은 날부터 자신을 찾아다녔던 길룡을 오랜 세월만에 재회하게 된 영은은 그에게서 고향의 모습을 느끼며 한바탕 서럽게 눈물을 쏟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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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 역의 신은경은 과감한 노출 연기로 임 감독 등 스태프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임권택 감독은 오래전에 지방 항구도시의 티켓 다방 여종업원의 매춘 이야기를 그린 티켓’(1987)을 선보였습니다. ‘노는 계집- 티켓과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가장 크게 차별되는 점은 티켓에는 여배우들의 노출신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티켓의 여주인공인 김지미를 비롯해서 전세영 이혜영 안소영 등의 여배우들이 다방에서 티켓을 끊어도 이른바 매춘의 직접적인 묘사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는 계집- 은 여주인공 신은경 뿐 아니라 정경순 등 조단역 여배우들까지 노출연기를 적나라하게 펼쳤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성년자관람불가등급이 면죄부라도 되는 듯, 영화 포스터에도 큼지막한 글씨로 매춘의 歷史- 누구나 가보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 골목 안 세상을 생생히 그려낸 영화라고 써놓았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결국 신은경에게는 음주운전 파문을 딛고 확실하게 재기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영화 개봉하고 두어달 후에 열린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그녀는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자랑스럽게 높이 들어올렸으니까요. 하지만 이와는 달리 여성관객들이 뽑은 ‘1997년 최악의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그래도 임 감독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사회 변혁기 속에서 한 여인이 어떻게 노는 계집으로 내몰렸는지를 극명하게 그려내려고 꽤 공을 들였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부터 서울 올림픽에 이르기까지의 사회 변화와 매춘의 역사를 연관지어 펼쳐낸 장면들이 그렇습니다. 사창가의 수퍼마켓 TV를 통해 박대통령 유고 뉴스가 전해질 때, 수퍼마켓 주인이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었는데라고 얘기하자 한 창녀가 이렇게 맞장구칩니다. ”나 창녀 된 것도 저분 덕이지

 

노는 계집- 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남자 주인공 길룡 역의 한정현입니다. 그는 참신한 외모로 신은경의 상대역을 연기했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발연기수준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임 감독이 그의 대사를 최대한 줄이고 그저 오토바이만 씽씽 달리도록 했겠습니까. ‘노는 계집- 이후 그의 행적은 전혀 오리무중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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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가에서 자포자기한 심경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영은(신은경,오른쪽)에게 위로를 안겨주는 길룡(한정현,왼쪽). 길룡은 영은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질주하며, 바깥 세상의 공기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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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외모로 주목받았던 길룡 역의 한정현(사진 위 왼쪽)과 신은경이 커플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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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은(사진 위) '노는 계집 -창'의 촬영을 앞두고 전국의 사창가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해서 지어진 사창가 세트장. 영화 검열제의 페지로 '티켓'(1987년) 때보다 훨씬 과감한 노출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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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계집- 창'의 제작발표회. 왼쪽부터 길룡 역의 한정현, 임권택 감독, 신은경,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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