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인 영상미로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찬사를 들어온 이명세 감독이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의 영화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강수연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영화가 ‘지독한 사랑’(1996년)입니다. 영화 제작발표회 당시 ‘지독한 사랑’은 ‘이명세와 강수연의 조합‘이란 이유만으로 영화계 안팎의 화제를 집중시켰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감독은 데뷔작인 ‘개그맨’에서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은 데 이어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3년)를 통해서는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까지 얻는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감독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강수연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으니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지독한 사랑’에는 촬영 전부터 심상찮은 아우라가 어른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내용이 이른바 불륜을 다루는 것이었으니 영화계는 영화계대로, 영화팬은 영화팬대로 비상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지요. 늘 순수한 사랑을 마치 그림엽서처럼 영상에 옮겨내던 이 감독이 유부남과 처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대(?), 또는 예상과 달리 ‘지독한 사랑’은 이명세 감독 특유의 미장센으로 가득한 ‘이명세표 영화’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사랑에 눈먼 두 남녀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헤치면서도 파격적인 러브신과 대담한 노출장면조차 이 감독은 철저하게 계산된 세트 촬영을 통해 펼쳐냈습니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부산 다대포 바닷가의 외딴 집이었는데, 바로 이 외딴 공간에 두 남녀를 밀어넣고 엽기적인 사랑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포착해낸 거지요.
특히 바닷가 외딴 집의 촬영을 위해 15톤 트럭 4대 분량의 물과 모래, 금가루, 은가루 등이 운반되어 세트를 꾸몄습니다. 바닷가 외딴 집의 풍경이 실내에서 찍힌 겁니다. 금빛 모래에 반사되는 햇볕, 또 초록색 창틀에 비치는 석양의 바다 장면 등을모두 이 실내세트에서 찍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바다가 비치는 하늘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 맑은 하늘, 흐린 하늘, 밤하늘 등의 배경도 만들었습니다.
사실 당시 ‘지독한 사랑’의 제작사(시네 2000) 대표(이춘연)는 이 감독의 이같은 세트촬영에 대한 집착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해서 찍을 필요가 뭐 있냐”며 이 감독을 설득하는 데 공을 들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감독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을 찍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지독한 사랑’을 찍기 위해서는 더더욱 세트촬영이 필요하다는 거였습니다.
이명세 감독은 부산 다대포 바닷가의 외딴 집을 세트로 지어 영민(김갑수)와 영희(강수연)의 '지독한 사랑'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이 감독은 채호기 시인의 동명의 시 ’지독한 사랑‘을 읽었던 감흥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습니다.
기차의 육중한 몸체가 순식간에 그대 몸을 덮쳐 누르듯
레일처럼 길게 눕는 내 몸
바퀴와 레일이 부딪쳐 피워내는 불꽃 같이
내 몸과 그대의 몸이
부딪치며 일으키는 짧은 불꽃
그대 몸의 캄캄한 동굴에 꽂히는 기차처럼
시퍼런 칼 끝이 죽음을 관통하는
이 지독한 사랑
내 자궁 속에 그대 주검을 묻듯
그대 자궁 속에 내 주검을 묻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 첫눈에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영민(김갑수)과 영희(강수연).
대학교수인 영민(김갑수)과 신문기자인 영희(강수연)는 어느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이내 두 사람은 여관을 드나들면서 서로의 몸을 미칠 듯이 탐하게 됩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열병에 빠진 두 사람은 잠시라도 헤어질 수 없어 마침내 부산 다대포 근처에 셋방을 얻어 동거에 들어갑니다.
문을 열면 하얀 백사장과 짙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두 사람만의 공간에서 매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뜨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커피를 마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집을 나왔지만 영민의 마음 한 구석에는 집의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심적 부담이 밀려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갈등 또한 차츰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사랑은 점점 더 지독해지고, 점점 더 유치해지게 됩니다.
두 사람 스스로도 자신들의 사랑이 영원할 수 없음을 압니다. 헤어져야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느낍니다. 헤어지려는 이들의 행동도 유치하게 나타납니다. 일부러 다른 남자와 선을 봐서 영민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영희에게 영민은 난리를 피웁니다. 손찌검을 하기도 합니다. 영희도 영민에게 악을 쓰며 대들다가 비오는 거리로 뛰쳐나갑니다. 영민이 쫓아나가 영희를 붙잡고는, 여관방으로 끌고 들어가 한바탕 정사를 벌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쉬움 섞인 체념으로 이별의 시간을 맞습니다. 지독한 사랑 뒤에 찾아오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두 사람은 허름한 주점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더 이상은 이별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는 영민에게 “울지 마, 뭐야. 코도 흘리고 더럽게,,,김치국물은 또 언제 묻혔니? 울지 말라니까. 전에도 네가 우는 바람에 못헤어졌잖아”라면서 영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영희의 뺨에도 눈물이 흐릅니다.
영희(강수연)와의 격정적인 사랑에 탐닉하던 영민(김갑수)는 집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로 인해 심적 부담에 사로잡힌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이별을 보여주면서 페이드아웃(영상이 점차 어두워지다가 완전히 검은 색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영화 내내 싸우고 헤어지려다 다시 만나고, 또 싸우다가 다시 정사를 벌이고를 반복했던 두 사람의 지독한 사랑을 봐왔던 터라 엔딩자막이 올라가도 몇몇 관객들은 “혹시”하는 기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는 끝났습니다.
엔딩 자막 위로 한영애의 허스키한 음색으로 흐르는 ‘봄날은 간다’가 ‘지독한 사랑’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꽃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이 감독의 색깔은 영화에 그대로 입혀졌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도 그랬고, ‘첫사랑’에서도 그랬습니다만 오롯이 영민과 영희, 두 사람의 지독한 사랑에만 카메라 포커스를 집중했습니다. 때문에 유부남 영민과 영희의 지독한 사랑에도 도덕적으로 불륜이란 잣대를 들이댈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탓입니다. 이 감독의 연출의도가 잘 살아났던 거지요.
이 감독의 영화에서는 좀체로 볼 수 없었던 장면도 있습니다. 바로 영민과 영희역으로 나왔던 김감수와 강수연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당시 강수연은 거의 독보적인 ‘원톱 여배우’로, 요즘으로 따지면 그녀가 갑의 지위에 있었던 터라 그녀의 전라출연을 이끌어낸 이 감독의 ‘연출솜씨’에 온 영화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그다지 달변가도 아닌 이 감독이 어떻게 강수연의 전라 연기를 설득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지금도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늦은 밤 귀가하는 영희(강수연)의 택시잡는 장면을 좔영중인 이명세 감독(사진 아래 왼쪽).
영민(김갑수)과 영희(강수연)가 처음 만나는 술자리의 촬영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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