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한국영화 중 관객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공포스릴러 영화들이 많습니다만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공포스릴러 장르의 한국영화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수입된 외화들을 통해 공포스릴러 장르의 ‘재미’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사실 한국 영화사에는 공포스릴러 장르의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던 196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공포스릴러 영화들이 관객들의 발길을 꽤나 극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납양’(納涼)용 영화들이 앞다투어 극장에 간판이 내걸리곤 했습니다.
신파적인 원귀형 공포영화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았던 ‘살인마’(1965년), 또 추리형 공포영화였던 ‘목 없는 미녀’(1966년) 등 공포스릴러 영화들을 주로 만들어온 이용민 감독에게는 ‘한국 최초의 공포영화 전문감독’이란 닉네임이 붙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를테면 당시엔 공포스릴러 영화가 꽤 대중적인 장르였던 겁니다. 지금까지도 여름철 ‘납량영화의 고전’처럼 회자되고 있는,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나오는 ‘월하의 공동묘지’(1967년, 권철휘 감독)도 이때 나왔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까지 활발하게 제작되던 한국의 공포스릴러 영화들은 유신정권을 거치면서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공포스릴러 영화들은 그나마도 80년대 컬러TV의 보급과 함께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전설의 고향’ 등의 TV드라마가 ‘뻔한 귀신 이야기’를 지나치리만치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안방극장의 시청자들이 ‘납량드라마’라고 하면 “오히려 덥다”며 TV 채널을 돌리기까지 했겠습니까.
이처럼 극장에서 한국 공포스릴러 영화를 만나기 어려워진 1995년 1월, 한겨울에 ‘스릴러‘를 표방한 ‘손톱’(김성홍 감독)이 극장 개봉을 알렸습니다. 공포스릴러 영화의 ‘제철’은 여름철로 인식되어온 ‘관행’도 뛰어넘은 것이었지요. 관객들도 오랜만에 대하는 스릴러 영화를 반겼습니다. 또 여름철이 아닌 한겨울에 만나게 된 것도 신선한 느낌을 안겨 주었습니다
'손톱'의 두 여주인공 심혜진과 진희경.
엇보다도 ‘손톱’은 귀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질투가 파멸로 이끄는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 그리고 그 질투의 화신이 바로 영화의 여주인공이라는 점 등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충무로 영화계의 여주인공 캐스팅 1순위로 ‘핫’하게 떠오른 심혜진과 역시 모델 출신의 팔등신 미녀배우 진희경이 주연을 맡았다는 점도 대중의 이목을 끄는 데 한 몫 했습니다. 당시 ‘손톱’의 영화포스터 역시 반라상태의 심혜진과 진희경이 각자의 가슴을 손으로 가린 포즈로 찍은 사진을 사용했는데, 섬뜩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습니다.
공포스릴러 영화가 거의 제작되지 않던 시절, 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한 사람들은 강우석 감독과 김성홍 감독, 이춘연 프로듀서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청소년영화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의 연출과 각본, 프로듀서로 의기투합했던 ‘패밀리’였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성공으로 시나리오작가였던 김성홍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속편 격인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년)의 연출을 맡아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4년만에 다시 만나 ‘손톱’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었습니다. 강우석 기획, 김성홍 감독, 이춘연 제작으로 크레딧에 이름이 올랐지요.
'손톱'에서 심혜진은 모든 걸 다 가진 커리어우먼 소영 역을 맡았다.
인테리어 총괄 디자이너인 커리어우먼 소영(심혜진)은 아이 없다는 점만 빼면 대학교수 남편 정민(이경영)과의 원만한 결혼생활까지 모든 게 완벽한 여성입니다.
어느날 대학 동창 모임이 열리는 호텔에 갔다가 다소 초라한 행색의 여고 동창생 혜란(진희경)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혜란은 여고시절부터 소영의 모든 걸 닮고 싶어 대학에서도 미술을 전공했는데, 모든 게 잘 풀리는 소영과 달리 그녀는 늘 불운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화려하고 아늑한 집에서 살아가는 소영과는 반대로 어둡고 쓸쓸한 지하 단칸방에서 살아왔습니다.
얼마 후, 소영은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편에게 오랜만에 만났던 여고 동창생의 험담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에는 혜란이 타고 있었습니다. 소영이 혜란이 함께 탄 줄 몰랐던 겁니다.
이때부터 소영에 대한 질투와 복수를 결심한 혜란은 의도적으로 소영의 남편 정민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소영이 지방출장을 떠나고 집에 없는 사이, 샤워하고 있던 정민에게 노골적인 유혹으로 육체관계를 갖습니다. 그리고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소영은 혜란을 찾아가 온갖 독설을 퍼붓다가 몸싸움을 벌입니다. 이때 혜란은 유산을 하게 되고,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한편 소영은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있던 혜란이 간호사를 죽이고 병원을 탈출, 소영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만삭 상태인 소영이를 실신시킨 뒤, 소영의 집에 불을 질러 함께 죽음을 택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남편 정민에 의해 소영은 극적으로 구조되고, 혜란은 화재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소영은 길을 가던 중 거리에서 혜란의 환영을 보고 또다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손톱'에서 진희경은 '팜므파탈' 혜란 역을 섬뜩한 연기로 표현, 찬사를 받았다.
손톱’에서 심혜진과 진희경은 “모델 출신 여배우들의 연기력 대결”이라는 여러 매체의 기사들에 어울릴 만큼 열연을 펼쳤습니다. 특히 진희경은 모델 출신으로 첫 출연한 영화 ‘커피카피코피’(1994년, 김유민 감독)에서의 혹평을 딛고, 빼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그해(1995년) 대종상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손톱’에서의 심혜진과 진희경의 연기 하모니를 지켜본 강제규 감독은 다음해(1996년)에 연출하는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두 여배우를 일찌감치 캐스팅하겠다고 선언해 눈길을 끌었는데요, 톱스타로 검증된 심혜진과 달리 진희경의 경우에는 ‘은행나무 침대’의 캐스팅에 반대하는 스태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은 “내가 책임지겠다”며 캐스팅을 밀어부쳤고, 당시 같은 소속사였던 심혜진 또한 진희경의 캐스팅에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은행나무 침대’의 미단공주(진희경)를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손톱’에서 심혜진과 진희경의 섬뜩한 연기는 이전까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영화계에 스릴러 영화의 기획과 제작의 물꼬를 트는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손톱’ 이후 ‘여고괴담’(1998년, 박기형 감독)을 비롯해서 ‘폰’(2002년, 안병기 감독), ‘장화 홍련’(2003년, 김지운 감독), ‘4인용 식탁’(2003년, 이수연 감독), ‘친절한 금자씨’(2005년, 박찬욱 감독) 등 공포스릴러 영화들이 계속 나오기 시작했지요.
아마도 진희경에게는 ‘손톱’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영화일 겁니다. ‘은행나무 침대’의 미단공주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캐릭터로 남았습니다만 ‘손톱’의 흥행순항 당시 한동안 그녀는 ‘한국의 캐시 베이츠’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할리우드 스릴러영화 ‘미저리’(1991년, 로브 라이너 감독)의 캐시 베이츠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손톱’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은 뮤지컬계의 톱스타로 활약하는 박해미가 ‘손톱’에 단역으로 잠깐 출연한 겁니다. 영화 속의 소영(심혜진)이 인테리어를 맡아 개점하게 된 대형 가구점 주인으로 잠깐 등장합니다. 언젠가 TV에 출연한 박해미가 자신의 첫 영화출연작을 ‘손톱’이 아닌 코미디영화 ‘내 남자의 순이’(2010년, 김호준 감독)로 꼽는 걸 보니, 그녀도 아마 기억을 못하는 듯 싶습니다. 어쨌든 젊은 시절 박해미의 매력적인 모습을 만나는 즐거움도 ‘손톱’에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심혜진과 진희경은 모델 출신의 여배우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심혜진과 진희경은 '손톱' 촬영 당시 같은 소속사로 절친관계였다.
'손톱'에서 소영(심혜진)의 남편 정민 역으로 출연한 이경영(왼쪽).
'손톱'의 제작발표회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심혜진 이경영 진희경(왼쪽부터).
수영장에서 촬영중인 소영(심혜진)과 혜란(진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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