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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아버지`

기사입력 [2018-06-2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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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말 한국 사회에는 김정현 작가의 소설 아버지열풍이 불어닥쳤습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이뤄내자 사회 곳곳에서는 물질적 풍요와 여유로움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진국에 진입한 듯한 분위기가 미처 안착도 하기 전에 금세 불경기가 닥치면서 사회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했지요. 이름하여 IMF 구제금융사태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던 바로 그 때, 소설 아버지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간 겁니다.

1996년말 출간된 아버지1997IMF구제금융 사태가 본격화되고,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판의 소용돌이 등으로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마치 고통의 피난처인 양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중년 남성들의 지지가 엄청났습니다


소설 아버지가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가정과 일터 양쪽으로부터 설 자리를 잃어가던 당시 아버지들의 표상을 현실감있게 그려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경제위기에 직면했고, 이로 인한 가족해체 등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아버지는 소설 이상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새롭게 각인됐으며, 많은 가정에서는 인생 한 켠으로 물러나 있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고조되기도 했습니다. 흔히 베스트셀러 소설은 출간하는 해에 폭발적으로 팔린다는 속설을 보란 듯이 깨고 아버지는 출간 후 2년여 동안 무려 2백만 부가 팔려나갔습니다. 밀리언셀러, 출판계에서는 이른바 초대박 소설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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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한정수(박근형)의 아내 영신 역의 장미희는 넉넉한 집안 출신의 교양 있고 세련된 아내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이런 베스트 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시도는 너무나 당연한 기획이었습니다. ‘아버지 신드롬이 일자마자 충무로 영화계에서는 여러 제작자와 기획자들이 영화화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 김정현 작가와 접촉했습니다만 좀체로 계약 성사 소식은 들려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김정현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 감독으로 장길수 감독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나타내면서 영화 제작이 급물살을 타게 됐습니다. 장길수 감독은 1980년대 후반부터 밤의 열기 속으로’(1986)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0) 등의 영화들을 통해 뉴코리안 시네마의 기초를 놓은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소설 출간 무렵에는 거의 7~8년간 영화연출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때문에 충무로 영화 제작자들로서는 장길수 감독의 캐스팅(?)이 식은 죽 먹기와 같았습니다. 장 감독 역시 오랜만에 영화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으니까요.

소설을 시나리오로 옮기는 작업은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게 이뤄졌습니다. 소설이 서점가에서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영화의 캐스팅 도 매우 순조롭게 마무리됐지요. 소설 속의 주인공인 아버지(한정수) 역에는 박근형이, 세련된 아내(영신) 역에는 장미희가 각각 캐스팅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촬영도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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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암이라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아내(장미희, 오른쪽)와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죽음을 준비하는 아버지 한정수 역의 박근형(왼쪽). 

 

평범한 중년의 아버지 한정수(박근형)는 친구 남박사(이호재)의 병원에 들렀다가 췌장암 선고를 받습니다. 5~6개월 정도 남았다는 남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한정수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지방대학 출신으로 뒤늦게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료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면서 신문 등에 소개기사까지 실리기도 했던 과거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고지식한 데다 연줄도 제대로 없는 형편이어서 요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늘 한직만 전전해 왔습니다.

한편 넉넉한 집안 출신의 교양있고 세련된 아내 영신(장미희)과는 의례적이며 무미건조한 부부관계로 지내온 지 여러해 되었고, 딸 지원(최정윤)은 일에만 파묻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자신에 대한 섭섭함으로 원망의 눈빛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정수는 자신의 병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죽음을 준비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때문에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참기 위해 술에 의지하는 시간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가족들과 더욱 높은 담을 쌓고마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어느날 밤, 한정수는 술에 취해 집 앞 과일가게에서 사소한 시비에 휘말립니다. 그런데 이 시비를 지켜본 딸 지원이 쌀쌀한 표정으로 돌아선 뒤, 다음날 한 통의 편지를 탁자에 두고 갑니다. 실망과 원망과 분노가 가득 담긴 딸의 편지를 읽은 한정수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딸 지원이 지망하는 서울대 영문과 정원이 35명이라는 이유로 1년 동안 버스를 탈 때마다 35번 이내 번호의 좌석에만 앉았을 만큼 딸에 대한 사랑과 정성을 쏟아온 한정수로서는 최후 통첩과도 같은 딸의 편지에 더큰 자괴감에 빠져듭니다.

잠시라도 쉼을 갖고 싶지만 어디에서도 자신을 반겨줄 리 없는 고독 속에서 한정수는 일식집 여종업원 소령(홍리나)을 만나 잠시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습니다.

췌장암 말기의 고통과 싸우며 한정수는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질 아내와 딸을 위해 남모르게 미래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친구 남박사는 마침내 한정수의 아내와 딸에게 그의 췌장암과 시한부 삶에 대해 알립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가족들은 뒤늦게 남편과 아빠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용서와 화해가 이들 가족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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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중간에 시나리오를 읽으며 함께 캐릭터 분석을 하는 박근형(왼쪽)과 장미희(오른쪽).

  

영화 아버지는 소설과 거의 똑같은 이야기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영화는 소설만큼 반향을 불러일으키질 못했습니다. 신파영화의 틀을 갖추기는 했습니다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두웠던 탓에 관객의 발길을 극장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시쳇말로 돈 내고 극장가서 질질 짜고 싶지 않다는 게 당시 대중의 정서였습니다.


1997년 개봉되어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던 영화들, ‘접속’(장윤현 감독)을 비롯해 ’(임권택 감독) ‘넘버3’(송능한 감독) ‘초록물고기’(이창동 감독) ‘비트’(김성수 감독) ‘올가미’(김성홍 감독) ‘할렐루야’(신승수 감독) 등이 대체로 재미있다는 평가를 들었던 것과는 대조를 이뤘던 겁니다.

하지만 비록 흥행엔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평이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또는 이미 세상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아버지인 세대는 그들대로, 자신들의 인생을 반추하며 자그마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아버지 한정수 역할을 맡았던 박근형은 1940년생으로, ‘아버지의 촬영과 개봉 당시 50대 후반이었습니다. 평생 배우로 살아오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온 그 역시 개봉을 앞둔 시사회에서 마치 내 이야기인 양 주인공 한정수에 저절로 동화되었다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그들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습니다.

박근형은 촬영 중에도 아내 영신 역의 장미희와 수없이 캐릭터 분석 의견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영화 속에 비쳐지는 매 씬의 상황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서 상대역인 장미희와 최윤정 등에게도 질문하고 의견을 구하는 등 마치 연기학과 강의실 같은 분위기였다는 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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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라도 쉼을 갖고 싶지만 어디에서도 반겨줄 리 없는 외로움 에 괴로워하는 아버지 역의 박근형.

 

촬영현장을 자주 방문했던 원작자인 김정현 작가 역시 베테랑 배우인 박근형의 진지한 모습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처음엔 소설이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질까 궁금해서 촬영현장에 갔는데, 나중에는 진지한 열정으로 촬영현장에 나서는 박근형선생을 보고 싶어서 촬영현장에 자주 가게 됐다는 거였습니다


1970년대의 겨울여자’(1977, 김호선 감독)부터 1980년대의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배창호 감독), 그리고 1990년대의 사의 찬미’(1991, 김호선 감독)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계를 풍미했던 장미희 역시 박근형 선배는 언제나 선생님 같았다며 박근형의 연기자세에 존경심을 드러냈지요


PS. 소설 아버지를 쓴 김정현 작가는 경찰관 출신으로 서울시경(현재 서울지방경찰청)에서 13년 동안 강력계형사로 재직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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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연기자 장미희 역시 박근형과 함께 늘 진지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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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연출한 장길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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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췌장암 사실을 모른 채 아버지에게 독설을 퍼붓는 딸 지원 역의 최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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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수 감독(왼쪽)과 함께 촬영 리허설을 준비 중인 박근형(가운데), 장미희(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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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지원 역의 최정윤(가운데 앞)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장길수 감독(왼쪽)과  정일성 촬영감독(왼쪽에서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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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수 감독(왼쪽)과 정일성 촬영감독(왼쪽에서 세번째), 박근형(오른쪽), 장미희(왼쪽에서 두번째) 등이 촬영에 앞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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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된 장면의 모니터 화면을 확인하는 장길수 감독(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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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촬영현장에서 68세 생일을 맞은 정일성 촬영 감독이 생일케이크 앞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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