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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네온속으로 노을지다`

기사입력 [2018-06-2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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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안방극장의 최고 히로인으로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채시라는 데뷔작인 KBS TV드라마 고교생 일기’(1984)부터 최근 출연작인 MBC TV드라마 이별이 떠났다’(2018)까지의 연기인생 가운데 오직 단 한 편의 영화에만 출연했습니다.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 이현승 감독)라는 영화입니다


아주 독특한 이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이어지는 기간 내내 수많은 영화들의 출연 요청이 있었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단 한 편의 영화에만 출연했으니까요. 영화에 대한 까다로운 출연 기준을 가진 것도 아니고, 특별히 거부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겐 오직 단 한 편의 영화출연 기록밖에 없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출연도 그리 쉽게 이루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채시라의 인기는 천정부지 상종가였습니다. MBC TV 베스트셀러극장 샴푸의 요정에서 상큼발랄한 매력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 이후, MBC TV의 인기 드라마들인 여명의 눈동자’(1991) ‘아들과 딸’(1992) ‘파일럿’(1993) ‘서울의 달’(1994) 등에서 연이어 발군의 연기력을 과시하며 인기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여명의 눈동자’(1991)에서 보여준 그녀의 파격적인 종군위안부 연기는 오랫동안 방송가에 특급 화제로 회자됐습니다. 명실공히 하드웨어의 매력 뿐 아니라 빼어난 연기력까지 갖춘 초대형스타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터였습니다.

때문에 그 무렵엔 채시라를 모셔가려는작품들이 그녀의 낙점을 기다리는 풍경이 흔하게 펼쳐졌습니다. 그녀를 필요로 하는 작품들은 TV드라마와 영화를 두루 망라했습니다. 그녀의 출연작들은 하나같이 높은 시청율을 기록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까닭입니다


채시라의 캐스팅은 일종의 성공 보증수표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녀의 선택은 계속 TV드라마쪽으로 이뤄졌습니다. 평소 그녀의 출연작품 선택 기준이 다분히 섬씽 뉴(Something New)' -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성향이었던 걸 감안하면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에 얼마든지 출연했을 법한 일인데 말입니다


실제로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캐스팅 당시에도 채시라는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보다는 그동안의 반듯한 이미지를 벗고 팜므파탈 연기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면서 MBC TV드라마 아들의 여자쪽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나이트클럽 댄서 캐릭터였는데 허벅지와 배꼽을 드러내는 섹시한 춤으로 유부남을 유혹하는 요부의 연기를 리얼하게 펼쳐내 장안의 화제가 되었지요.

그러는 동안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이현승 감독과 제작사(우림영화)아들의 여자가 종영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채시라의 유일한 영화 출연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성사됐던 겁니다. 당시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일부러 영화를 멀리하는 건 아닌데, 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대체로 TV드라마들이었을 뿐이에요라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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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시라(오른쪽)의 유일한 영화출연작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상대역에는 문성근(왼쪽)이 캐스팅됐다.

 

당시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제작진은 아들의 여자를 끝내고 합류하게 될 채시라를 위해서 만반의 촬영 준비를 갖춰놓았습니다. 채시라의 상대역에는 문성근과 김의성 등이 캐스팅됐고, 이현승 감독의 전작인 그대 안의 블루때와 마찬가지로 김현철이 다시한번 영화음악을 맡기로 계약을 마쳤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채시라의 캐스팅을 성사시키 위해서라면 TV드라마 종영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제작사(우림영화) 대표(김용석)의 인내심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영화제작에 뛰어든 김용석 대표는 이현승 감독과의 계약 당시, 젊은 패기를 앞세워 채시라 캐스팅을 약속하면서 이 약속의 관철을 위해 집요하게 밀어부쳤던 겁니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채시라에 대한 이성적인 관심이 아닐까 하는 입방아도 있었습니다만 훗날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지요.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는 제작 초기,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영화로 일컬어졌던 그대 안의 블루의 속편쯤으로 인식됐습니다. 그도그럴것이 그대 안의 블루를 연출했던 이현승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영화 속의 주인공(채시라)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딪치게 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고충 등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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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인 CF감독 김규환으로 열연한 문성근(위, 아래)과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이상민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개척한 채시라(가운데).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입사한 이상민(채시라)은 가난한 출판사를 운영하는 선배 김원(김의성)을 사랑하는 사회초년병입니다. 어느날 출간 마감일이 다가온 출판물을 놓아둔 채 사라져버린 김원 때문에 이상민은 낮에는 광고회사 일, 밤에는 출판사 일을 하느라 고된 삶을 이어갑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카피라이터라는 광고회사 일에 적응해가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게 되는 차별과 소외에 적잖은 마음고생을 하게 되는 이상민. 하지만 이 벽을 뛰어 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그녀는 마침내 최고라는 인정을 받기에 이릅니다.

이때 이상민 앞에 냉소적이지만 실력파 CF감독인 김규한(문성근)이 나타납니다. 이상민은 김규한과의 작업과 교류를 통해서 더욱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좀체로 남을 인정하지 않는 김규한으로부터도 최고라는 칭찬을 듣게 된 어느날, 사라졌던 김원이 불쑥 그녀를 찾아옵니다. 두 사람은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함께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러나 김원은 얼마 후, 아무런 말도 없이 또다시 그녀 곁을 떠나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는 빅 프로젝트를 맡게 된 그녀가 일에만 몰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거지요. 같은 팀에 소속된 김규환과의 관계를 두고 주위의 오해와 질시를 받기도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미묘한 경쟁과 갈등을 슬기롭게 정리해가면서 프로젝트를 완수해 냅니다.

프리젠테이션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뒤, 그녀는 잠시의 쉼을 갖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정보 누출로 그동안의 노력과 수고가 물거품으로 바뀌고 맙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원의 자살소식까지 들려옵니다. 실신하다시피하여 병원으로 실려간 그녀는 자신의 임신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미혼모가 될지도 모를 그녀에게 사표를 종용합니다. 이에 그녀는 임신이 왜 창피한 일이냐?”며 항변하고, 출산을 강행합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이를 안고 회사로 당당하게 출근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장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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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에서 채시라와 문성근은 빅 프로젝트를 맡아 서로 다른 관점 때문에 자주 부딪치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다.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그대 안의 블루의 속편처럼 기대를 모았습니다만 완성된 영화는 속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복제품 같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두 영화는 설정도 비슷하고 구조와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까지도 흡사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대 안의 블루의 리메이크작 같았습니다.

하지만 실패한 기획이라는 평가와는 별개로 일하는 여성들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점은 박수를 받을 만 했습니다. 또한 모호한 캐릭터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규환 역의 문성근은 그간의 지적 엘리트 이미지를 넘어선 파격 연기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는 채시라의 유일한 영화출연작이기도 하지만 김원 역의 김의성에게도 의미있는 영화로 기억됩니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김의성은 대학시절부터 운동권 배우로 활동해오다가 주로 연극무대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러다가 비중있는 역할로 스크린 연기를 처음 펼친 작품이 바로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였습니다.

김의성은 그전까지 서울대 출신의 배우 정진영과 ‘2인극을 공연하며 전국을 떠돌기도 하고, 극단 연우무대에서 송강호 등과 연극을 함께 하며 지냈습니다.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에 출연할 때만 해도 요즘과 같은 개성넘친 씬 스틸러로 활약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지요


실제로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에서의 인상적인 연기를 인정받은 여세를 몰아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 김동빈 감독)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오태석 감독) 등에도 연이어 출연하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배우인생을 뒤바꿔놓은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5, 홍상수 감독)과도 만나게 되었지요.

이는 김의성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출연 이후, 사업한다면서 베트남으로 떠나 5년여의 공백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영화계 컴백을 가능하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으니까요


이처럼 적잖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닌 영화였습니다만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는 비평과 흥행, 둘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990년대 최고의 인기스타 채시라가 유일하게 출연한 영화였는데도 말이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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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의 촬영현장에서. 의견을 나누는 문성근(위 왼쪽)과 이현승 감독(위 오른쪽). 아래 사진은 인터뷰를 위해 함께 자리한 문성근, 이현승 감독, 채시라(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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