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세상 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욕심많은 사람들 얼굴 찌푸린 사람들/ 마치 그림처럼 행복하면 좋겠어/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콜릿색 물감으로/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불 아랜 보라색 물감으로,,,,
아마 이 노래는 요즘의 젊은 세대들도 많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곡입니다. 몇 해 전쯤 조사 발표했던 ‘노래방 애창곡 100 순위’에도 들어있었으니까,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지고 있다는 얘기겠죠. 이 곡은 젊은 날의 방황을 감성적으로 그려낸 멜로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1990년, 곽재용 감독)에 삽입되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후에는 아예 이 영화의 주제가처럼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강인원이 작사 작곡한 이 곡은 강인원과 권인하, 그리고 안타깝게 요절한 김현식 등이 함께 불렀습니다. 특히 고 김현식은 당시 간경화 투병 중이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앨범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죠. 아쉽게도 영화와 이 곡이 세상에 선보인 그 해(1990년) 11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는 곽재용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곽재용 감독은 잘 알려졌듯이 '엽기적인 그녀'(2001년)와 '클래식'(2003년) 등의 영화를 통해 젊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영상 표현에 일가를 이룬 감독입니다. 또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서는 전지현과 차태현, '클래식'을 통해서는 조인성 조승우 손예진이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해낸 감독으로도 유명하죠. 이를테면 이러한 곽재용 감독의 등장을 알린 영화가 '비오는 날의 수채화'인 셈입니다. 곽 감독은 직접 시나리오를 썼고, 연출과 제작까지 혼자 다 맡아서 했습니다.그리고 당대의 정상급 인기배우를 캐스팅하겠다는 계획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데뷔 감독이고, 또 친구들과 의기투합한 제작사(청기사그룹) 또한 신생 제작사인지라 이름있는 배우들에게 출연제의를 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는 감독도 신인, 출연배우들도 옥소리 강석현 이경영 등 풋풋한 새내기 신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영화로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특히 강석현은 아버지 강신성일과 함께 출연하여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지요.
영화는 고아원 출신인 지수(강석현)가 지방의 농장주인(강신성일)에게 입양가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새 집에 처음으로 간 날, 양부의 딸 지혜(옥소리)를 처음 보면서부터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밝고 따뜻한 성격의 지혜도 자신의 새 오빠가 된 지수를 다정하게 대하며 크게 의지합니다.
시간이 흘러 지수는 양부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지수 역시 지방의 한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둘은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떨어져 지내면서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수는 지혜를 향한 마음을 숨길 수 없어서 양부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고백하지만 얘기를 전해들은 양부는 충격을 받고 지수를 내칩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과 양부와의 갈등으로 방황하던 지수는 집을 나와 한 술집에 취직합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함께 일하던 한 여성을 보호하려다가 주인을 칼로 찌르게 됩니다. 결국 교도소에 수감된 지수는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하고, 지혜 역시 지수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며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물론 영화는 해피엔딩입니다. 지수의 출감일, 지수의 고아원 친구(이경영)와 지혜가 교도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죠. 건강을 되찾은 지혜의 활짝 웃는 모습에 기뻐하며 달려가 끌어안는 지수....
영화는 1989년에 촬영하고 완성되었습니다만 개봉일은 1990년으로 미뤄졌습니다. 흔히 극장가에서는 관객들이 많이 몰려드는 성수기 시즌을 ‘몸비‘라고 하는데, 몸을 비비고 봐야 할 정도로 관객이 많이 몰린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런데 ’비오는 날의 수채화‘는 ’몸비‘ 시즌의 영화로 평가받지 못했던 겁니다. 감독을 포함해서 배우들 모두가 신인이니, 그런 평가는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사회를 가진 후 평단의 비평 또한 그다지 후하지 않았습니다. 신인배우들의 어색한 연기와 영화의 ’톤 앤 매너'가 다분히 소녀감성적인 측면이 많았던 탓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말연시의 성수기와 ’구정‘(설날) 연휴까지 다 지나고난 2월17일에 개봉됐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중고등학생들의 봄방학을 겨냥해볼 수 있었다는 거죠. 실제로 봄방학 시즌과 3.1절 등을 거치면서, 무엇보다도 영화를 보고나온 청소년 관객들의 입소문에 힘입어서 6만5천명의 관객을 끌어들였습니다. '몸비' 시즌이 아닌 시기에, 또한 신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가 이 정도의 관객을 동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옥소리와 강석현의 멜로드라마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많은 얘깃거리를 낳았습니다. 온통 하얀 색 레이스 커튼과 침구 등으로 꾸며진 지혜(옥소리)의 방 세트는 여학생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영화 보고난 뒤, 부모들에게 하얀 레이스 커튼 달아달라는 여학생들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믿거나 말거나) 후문도 있었습니다.
스크린 데뷔라는 부담 때문인지 옥소리의 연기는 상당히 어색했습니다만 그 어색한 연기조차 ’깜놀‘수준의 천연 미모로 완벽하게 커버해냈습니다. 오히려 옥소리는 이 영화로 단박에 캐스팅 1순위에 오르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영화에 함께 출연하는 아들(강석현)과 남편(강신성일)을 응원하기 위해 자주 촬영현장을 찾았던 엄앵란도 “어쩌면 이렇게도 이쁘게 생겼을까”라면서 옥소리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 촬영현장에서는 강신성일 엄앵란 강석현 옥소리가 마치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죠. 덩달아 촬영현장의 분위기도 ‘업’됐구요. 뭐든지 일이 잘 되려고 하면 이렇게 다 잘 돌아가는 게 세상 이치겠지요. 다만 최근에는 강석현의 활동 소식도 별로 없고, 또 강신성일 엄앵란 부부가 '졸혼' 상태에서 각각 암투병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와 안타까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옥소리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여주인공으로 스크린 데뷔에 성공했다.
철조망에 걸린 지혜(옥소리)의 치마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주는 지수(강석현).
농장 뒤 숲 속 장면을 이동차로 촬영하고 있는 촬영팀.
풋풋함이 느껴지는 당시의 신인감독 곽재용(왼쪽)과 옥소리, 강석현.
'비오는 날의 수채화' 촬영현장은 신인들의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곽재용 감독(오른쪽)으로부터 연기지시를 듣고 있는 옥소리.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남녀 주인공, 옥소리와 강석현.
지수(강석현)의 양부로 출연한 강신성일(오른쪽)의 모습에서 세월을 거스른 한국 대표 미남의 포스가 느껴진다.
아들(강석현)에게 한 수 지도하는 아버지 강신성일.
아들과 남편이 함께 출연 중인 영화 촬영현장에 응원차 자주 찾아온 엄앵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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