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서울올림픽(1988년 9월 17일~10월2일)이 열리기 일주일 전(1988년 9월 10일), 한밤중 귀가하던 한 주부가 으슥한 골목길에서 젊은 두 남성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남성은 힘으로 이 여성을 넘어뜨린 뒤, 그 중 한 남성이 그 여성의 위로 올라타고 그녀의 입 안으로 혀를 들이밀며 키스를 시도했습니다. 위기를 느낀 여성은 어금니를 악물고 그 혀를 깨물었습니다. 혀가 잘린 남성은 비명을 지르고 길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명명백백한 성추행 사건이었습니다만 당시 상황은 묘하게 돌아갔습니다. 혀를 잘린 성추행 가해자 가족들이 이 주부를 상대로 혀 잘린 데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나선 겁니다. 이에 분개한 주부가 이들을 성폭행혐의로 고소하자 가해자들은 또다시 주부를 무고혐의로 맞고소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으로 옮겨져 공방을 벌이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가해자들은 “술 취해 길바닥에 앉아있던 여성이 자신들에게 매달리며 집까지 데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를 부축해 골목길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뺨이 맞닿아 ‘술김에’ 호기심으로 키스한 것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의 변호사는 “한밤 야심한 시각에 술에 취한 여자가 흐느적거리며 다녔다는 점, 평소 집안에서도 불화을 일으키며 문제가 많은 여자였다는 점, 이처럼 부도덕한 여자의 마수에 걸려 전도양양한 청년들이 씻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피해자 여성을 몰아붙였습니다.
실제로 1심 법원은 주부에게 징역 5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습니다. “상가가 밀집돼있고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니 공포에 질려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정당방위로 보기에 지나친 행위”라고 판결한 겁니다.
당시 재판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사건 발생 11일만에, 서울올림픽 기간 중(1988년 9월21일)에 1심 판결이 난 것이었습니다. 올림픽 뉴스로 온 매스컴이 떠들썩하는 상황이었던 터라 이 사건의 재판 뉴스는 그다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성인권 단체 등 여성계에서는 사법부의 이같은 판결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도대체 여성의 인권은 강간범의 혀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었죠. ‘도대체 그렇다면 성폭력의 위기에 처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정당한 자기방어란 어디까지라는 말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습니다.
1심 판결 후, 4개월 후에 열린 항소심 법정 앞에는 100여명의 여성들이 몰려와 피해여성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등법원 항소심에서는 1심의 판결을 뒤집고 정당방위를 인정, 피해여성에게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한밤중 골목길에서 건장한 젊은이들이 달려들어 양팔을 붙들고 강제로 키스를 하며,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강간하려는 위기 속에서 혀를 물어뜯은 것은 성적 순결과 신체안전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라는 결정문과 함께였습니다.
1990년 추석 시즌에 개봉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김유진 감독)는 이 실제의 사건을 거의 그대로 영화로 옮긴 작품입니다. 관심을 모았던 주부 역에는 원미경이 캐스팅됐습니다. 당시 원미경은 안방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칠 때였습니다. 분주하기 짝이 없는 스케줄을 감안하면 영화출연 결정이 쉽지 않았을 때였지만 원미경은 의외로 명쾌하게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이 사건을 시나리오로 구성한 이윤택 작가와 연출자인 김유진 감독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을 듣자마자였습니다. 평소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스타일의 원미경답게 “시나리오는 읽을 필요도 없다”고도 했습니다. 여주인공 역할에 대해 일종의 사명감 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습니다.남편 역에는 이영하, 그리고 문제의 혀 잘린 젊은이 역은 김민종, 그리고 가해자 측 변호인은 이경영, 피해여성의 변호인 역에는 손숙으로 각각 결정됐습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이렇듯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시나리오 탈고, 캐스팅 등의 과정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김유진 감독으로서는 ‘영웅연가’(1986년)와 ‘시로의 섬’(1988년)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과정들을 ‘힘들게’ 겪었던 터라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순탄한 과정이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고까지 얘기했을 정도였습니다. ‘호사다마’를 걱정한 거죠.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법정 장면이 많은 점도 김유진 감독에게는 적잖은 부담이었을 겁니다. 김유진 감독은 이 영화의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성폭행 피해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것’으로 봤습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때 만주로 끌려갔던 아녀자들이 고국에 돌아온 뒤에 “오랑캐놈들한테 더럽혀졌다”며 손가락질 받고 버림받으며 ‘두번 죽임’을 당했던 아픈 역사적 사실을 배우들에게 설명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이를테면 성폭행 피해 여성을 바라보는 기존의 사회적 시선이 ‘부주의했다거나, 아니면 틈을 보인 행실 때문’이라며 오히려 박해하는 풍조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겁니다. 김유진 감독의 이러한 연출관으로 인해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웰메이드 페미니즘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김유진 감독의 외모에서는 페미니즘의 ‘ㅍ‘이나 ’f’도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그 신체적 하드웨어와는 달리 섬세한 연출솜씨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여주인공 역의 출연 제의를 단박에 결정한 원미경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연기 열정에 대해서는 이미 방송가에서 소문이 자자했지만,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서는 연기를 한다기 보다는 마치 실제 사건의 주인공으로 분신한 듯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웬만해서는 만족감을 나타내지 않기로 유명한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얼굴에도 촬영 내내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하기는 MBC TV 의 '조선왕조 5백년‘을 촬영하면서 조연출(이창순)과 불같은 열애에 빠져 1년만에 결혼식을 올린 그 열정이 어디 가겠습니까? 원미경의 이같은 연기열정은 남편 역의 이영하나 가해자측의 변호사 역을 맡았던 이경영, 심지어 여주인공에게 항소심을 함께 하자며 용기를 북돋워준 여성변호사 역의 손숙 등 모든 배우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영화의 개봉 후 원미경은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영평상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영하도 대종상과 영평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손숙도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출연배우들 대부분에게 크나큰 상복이 터졌습니다. 김유진 감독 역시 ‘주목할만한 감독‘의 반열에 올랐죠.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개봉 후, 여성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영화 속에서 원미경이 또박또박 강변하는 대사를 외우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네, 이혼을 했고, 술 마시고 새벽 한 시에 비틀비틀했어요. 그럼 강간당해도 되는 건가요?”
원미경은 작년에 MBC TV드라마 ‘가화만사성’으로 14년만에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워낙 오랜만의 복귀인지라 여러 매체에서 앞다퉈 인터뷰 기사를 실었는데요,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촬영할 때면 늘 기자들에게 이렇게 요청하곤 했습니다. “주름 지우지 마세요”라고요. '성형이 대세'인 요즘에는 웬만하면 사진기자들이 다 알아서 사진 보정작업을 하는 데,원미경은 ‘늙음도 아름다움’이라며 당당하게 보정작업을 거절했던 겁니다. 참 멋있지 않습니까?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원미경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출연 제의를 받자마자 곧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성추행을 하면서 강제로 키스를 시도하던 젊은이(김민종, 가운데 흰 죄수복)의 혀를 깨물어 법정에 서게 된 여주인공(원미경).
법정 장면이 많아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였으나 원미경 등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이 넘쳐났다.
원미경은 연기를 한다기 보다는 마치 실제 사건의 주인공으로 분신한 것처럼 보일 만큼 연기열정을 불태웠다.
성추행하며 키스하려다 혀를 잘린 젊은이(김민종)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사건의 진술을 글로 쓴다.
영화 속에서 거짓 진술로 여주인공(원미경)을 곤란에 빠뜨리는 시누이(진희진,남편 이영하의 오른쪽)와 그녀의 남편(독고영재, 오른쪽).
아내(원미경)의 재판을 착잡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남편(이영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영화 전체 중 법정 장면의 비중이 20%정도나 된다.
법정 장면의 촬영에는 대부분의 출연배우들이 등장했다.
김유진 감독(오른쪽)과 유영길 촬영감독(왼쪽).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출연배우들의 상복이 터졌던 영화로도 유명하다. 왼쪽부터 이경영 손숙 이영하 원미경.
김유진 감독과 배우 원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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