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년, 장길수 감독)는 번역문학가이자 소설가인 안정효의 세 번 째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6.25 전쟁 중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한국의 전통마을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그린 안정효 작가의 원작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안정효 작가가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시 심곡동)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전쟁 피난 체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어서인지 전쟁의 와중에 있는 시골 마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마치 생생한 수기처럼 느껴집니다. 원작 소설의 표지에 씌어있는 “전쟁이 터지면 백성은 제각기 전쟁을 치른다”는 문구에서 보듯 다분히 반전의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안정효 작가는 대학시절(서강대 영문학과)에 처음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설을 쓰던 강원도 춘천 인근의 친구 집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 후, 1986년에는 ‘갈쌈’으로 제목을 바꿔 잡지에 발표했다가 1988년 미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출간하면서 ‘Silver Stallion' 으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미국 출간 당시 뉴욕타임즈에서는 이 소설에 대한 소개와 서평 등을 2회에 걸쳐 크게 다뤘습니다. 그 영향(?)으로 2년 후에는 국내에서도 한국어판이 출간되었고, 그 때 ’은마는 오지 않는다‘라는 최종 제목을 갖게 된 겁니다. 그리고 당시 ’코리안 뉴 웨이브‘ 감독군의 대표주자로 줄곧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영화로 옮겨내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던 장길수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6.25전쟁의 전세가 전환되던 무렵, 강원도의 작은 시골 마을이 배경입니다. 유교사상이 짙게 남아있는 이 마을에서 여주인공 언례(이혜숙)는 아들 만식(심재림)을 둔 과부로 살아가지만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냅니다.
어느 날 밤, 마을에 들이닥친 미군병사들에 의해 언례는 겁탈을 당합니다. 끔찍한 일을 겪었지만 언례는 털고 일어나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를 곧추세웁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언례를 화냥년 취급하며 멸시합니다. 아예 따돌립니다. 마을 사람들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게 언례의 유일한 밥벌이였는데,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되니 생계까지 막막해지고 맙니다.
그러던 중 강 건너편에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양색시들이 마을에 나타납니다.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인 황노인(전무송)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들과 상종하지 말 것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강 건너 기지촌의 맏언니 용녀(김보연)와 순덕(방은희)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언례에게 동정과 호의를 베풀면서 오히려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합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언례도 자식과 생계 때문에 뱃사공에게 돈을 쥐어주며 강 건너 기지촌으로 가서 몸을 팔게 됩니다.
금세 마을에는 언례의 소문이 퍼지고, 마을 사람들은 언례를 포함해서 양색시들을 모두 마을에서 내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언례는 예전처럼 고분고분 황노인이나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항변합니다.
“저는 이 마을 사람들한테 진이 다 빠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비웃고 더러운 잡년 취급했어요. 제가 무슨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진짜 악마들이 누군가요? 좋아요, 다 좋습니다. 마음대로 경멸하고 비웃으라구요. 하지만 저더러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진 말아요. 뺑코들이 저한테 그랬던 것은 제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내가, 우연히 걸려든 것 뿐이에요. 제가 아니었다면 누군가 다른 여자가 당했겠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제가 태어날 때처럼 무슨 더러운 버러지였던 것처럼 취급했어요. 당신들은 그것이 어쩌다 저에게 닥친 불행한 일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고, 마치 내가 간음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했어요. 그런 일이 생기고 난 후에 이 알량한 마을의 여러분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한테 찾아와 빈 말이나마 안되었다고, 뭐 쌀 한 톨이라도 도움이 필요하냐고 위로의 말을 했던 사람이 있나요? 어쨌든 그것도 다 괜찮아요. 난 당신들을 탓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들이 나를 냉대하고 멸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취한 행동을 놓고 나를 욕하지는 말아요. 그리고 나더러 떠나라는 소리도 하지 말구요. 난 죽을 때까지 이곳에 남아서, 두고두고 이 마을 사람들을 미워할 결심을 했어요. 그러니까 날더러 이곳을 떠나라는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마세요.”
언례의 항변에 황노인과 마을 사람들은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지만,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집니다. 이 와중에 아들 만식은 미군병사와 함께 있는 엄마의 방을 훔쳐보는 찬돌(정명현)을 내쫓으려다가 크게 다치고, 도망치던 찬돌은 미군의 총에 맞는 사태까지 일어납니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언례와 양색시들의 집을 불태우며 크게 몸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갈등은 곧 다시 마을에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면서 잦아듭니다. 저마다 피난길에 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례는 기지촌 양색시들을 따라가지 않고, 아들 만식과 따로 피난 보따리를 쌉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을 거라는 마음을 안고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미군병사들에게 겁탈당한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멸시와 따돌림을 받는 언례(왼쪽, 이혜숙)
미군 기지를 따라온 양색시 큰 언니 용녀(왼쪽, 김보연)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받고 있는 언례(이혜숙)에게 동정과 호의를 베풀며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의 촬영현장. 분장을 하다 만 채로 콘티를 보며 의견을 주고받는 배우들. 왼쪽부터 김보연, 전무송, 이혜숙.
양색시 순덕(왼쪽, 방은희)와 용녀(오른쪽, 김보연)를 따라 기지촌 클럽에 나가 몸을 팔게 되는 언례(가운데, 이혜숙). 영화 속의 안타까운 장면과는 달리 촬영 준비 중인 세 여배우의 표정은 밝다.
다분히 장황하게 영화(혹은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전쟁의 가혹함을 드러내는 작품의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6.25전쟁을 소재로 하는 많은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합니다만 시대적으로 피할 수 없었던 상황이고, 또 불편하지만 반드시 짚고 반성해야 할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죠. 전쟁의 참상이란 피 튀기는 살육의 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인간의 밑바닥 감정까지 뒤흔들어 놓는 정서적 상처와 그 후유증에도 있다는 걸,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영화 개봉 당시 홍보전단의 메인 카피가 “양공주에게 돌을 던지다 보면 바로 우리 누이를 맞추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라는, 다소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영어 제목인 ‘Silver Stallion‘(은마)에서 Stallion이 ’종마, 씨받이용 수컷 말‘이라는 뜻 외에 미국의 속어로 ’남자 건달‘ 혹은 ’성적 매력이 있는 여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영화와 소설 둘다 대중의 호평을 받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종합예술인 영화의 소구력이 소설보다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1991년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여주인공 언례 역의 이혜숙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장길수 감독 또한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영화 개봉 전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흥행 청신호가 켜졌습니다. 서울에서만 19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까 꽤 큰 흥행 성공으로 기록됐습니다.
아이러니는, 영화의 개봉이 본의 아니게 미뤄지면서 몬트리올국제영화제 수상 등의 호재를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영화는 1년 전에 완성되어 대한극장에서 개봉을 준비중이었는데, 먼저 상영중이던 외화 ‘늑대와 춤을’이 기대 이상의 흥행을 이어가는 바람에 개봉시기와 개봉극장(서울극장)이 늦춰지고, 또 바뀌게 되었던 겁니다. 제작사(한진흥업)로서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던 셈이죠. 이혜숙은 몬트리올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외에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양색시 큰 언니 용녀 역의 김보연도 청룡영화상의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원작자인 안정효 작가도 영화 종영된 지 한참 지나서 가깝게 지내던 ‘월 스트리트 저널’ 기자로부터 “그 당시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몹시 심기가 불편했다고 토로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안정효 작가는 1995년 7월 미국독립기념일 즈음해서 미국의 몬태나 주립대학 초청으로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여주인공 언례와 관련한 강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미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언례 이야기’를 교재로 택하기도 했습니다.
문득 김수철이 영화음악을 맡아 작곡한, 영화 전편을 수놓았던 테마음악의 구슬픈 선율이 언례의 이야기와 오버랩되며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뿌리 깊은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시골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황노인 역의 전무송(왼쪽)과 영화 속에서 미군의 총에 맞는 찬돌의 어머니 역을 맡은 김형자.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서 양색시 역할들을 실감나게 열연한 순덕 역의 방은희(왼쪽)와 용녀 역의 김보연.
용녀 역의 김보연은 이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 출연할 당시 신인급이었던 방은희도 이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영화관계자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 영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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