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격랑의 시기였습니다. 1979년 10.26 이후 이른바 잠시 ‘서을의 봄’을 맞이하는가 싶더니 4월의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에 이어 5월에는 ‘광주민주화 항쟁’의 비극이 빚어졌으며, 9월에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여대생의 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화여대 성악과 4학년에 재학중인 성악도 이경애는 프리마돈나로 무대에 서는 일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벨기에 유학을 준비 중이던 그녀에게 운명처럼 한 청년이 나타납니다. 그해 7월, 고교시절 가정교사의 부탁으로 수배중인 운동권 청년을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겨주게 된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되어 도피중인 그 청년의 이름은 배기선. 이미 학창시절에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던 그는 고시생으로 위장하여 이경애의 다락방에서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경애는 신문 방송에서 쏟아져나오는 수배자 검거령에 관한 뉴스들을 배기선에게 전달해 나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이들 사이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생기게 됩니다.
어느날 밤에는 이경애가 소주와 파전을 쟁반에 담아 들고 배기선의 방으로 가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서로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부터 꿈과 희망, 심지어는 학교 옥상에서 ‘유신정권 반대’ 유인물을 뿌리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던 배기선의 ‘옥중기’까지도 마치 데이트하는 듯 두 남녀의 정겨운 한담은 밤 새는 줄 모르고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한밤중의 정담은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당시 스물 다섯 살의 이경애와 서른 살인 배기선은, 어느듯 수배자와 숨겨주는 자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남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피어났던 거죠.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다락방에서 촛불을 켜고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경애의 집안에서는 시쳇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는 “빨갱이는 절대 안된다”며 펄펄 뛰며 반대했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딸과 남편의 가운데에서 둘을 중재하느라고 몇 년 동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이경애의 집에 들이닥친 형사들에 의해서 배기선은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그가 얻어터지고 수갑채워 끌려갈 때, 이미 이경애의 배에는 두 사람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치범 면회는 배우자라야 가능하다는 교도소의 규칙(?)에 따라 이경애는 혼인신고를 하려고 했으나 친정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교도소장을 찾아가 잔뜩 부른 배를 보이며 “배기선의 아이가 뱃 속에 있다”고 통사정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면회를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친정 아버지는 첫 딸이 태어나기 직전에야 혼인신고하는 걸 허락해줬습니다. 그래서 이경애는 ‘공식적인 남편’이 된 배기선의 면회를 첫 딸 낳기 며칠 전에야 겨우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경애의 고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딸의 양육과 남편의 옥바라지를 홀로 감당해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뮤지컬 ‘에비타’의 주인공 에바 페론을 뽑는 오디션이 있다기에 응모해서 1백대 1이 넘는 경쟁을 뚫고 주인공에 선정됐습니다. 하지만 뮤지컬 ‘에비타’는 군사독재를 비판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단 4회만 공연하고 무대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이경애에게 당시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가수 조영남이 “밤무대에서 노래를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이경애는 ”프리마돈나를 꿈꾸던 내가 자존심을 버리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며 눈물 지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억척스럽게 밤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녀는 간혹 밤무대에서 드레스를 잘 차려입고 ‘그리운 금강산’이나 ‘선구자’ 같은 가곡도 불렀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았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남편 배기선이 1983년 8.15특사로 출감했습니다. 다락방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 지 3년만에 주위의 축하를 받으며 진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물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해피엔딩입니다. 이경애는 ‘에비타’ 뿐 아니라 ‘올리버’ ‘사운드 오브 뮤직’ 등 숱한 뮤지컬 무대의 디바로 활약했고, 한국예술신학교 뮤지컬학과 교수를 지내는 등 강단에서 후학을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남편 배기선은 1985년 미국에서 돌아온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해서 1995년 민주당 국회의원(14대)을 시작으로 16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지요.
'서울 에비타'의 촬영현장에 들러 영화 속에서 자신들로 등장하는 황신혜와 박상원(오른쪽에 선 두 사람)을 격려하는 배기선 이경애 부부(왼쪽에 선 두 사람).
여성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듣던 고(故) 박철수 감독(오른쪽에서 두번째)도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서울 에비타'의 촬영을 앞두고 늘 고민이 많았다.
바로 이 두 사람, 이경애 배기선 부부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 ‘서울 에비타’(1991년, 박철수 감독)입니다. 이른바 운동권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지라 고(故) 박철수 감독(2013년 2월, 영화 ‘러브 컨셉츄얼리’의 후반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 음주운전차량에 치어 사망)도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꽤 골머리를 썩여야 했습니다. 마침 연극연출가이자 희곡작가인 이윤택이 바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금지’라는 제목의 희곡으로 써놓을 것을, 박 감독이 시나리오로 바꿔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다만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절이 민주화로 가는 터널의 끄트머리를 통과하던 때였던 탓에 정치적인 색채는 가능하면 지우고 남녀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러브스토리에 포커스를 맞추는 데 연출의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의 실제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두 주인공의 러브 스토리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가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시국사범으로 도피중인 수배자와 그 수배자를 숨겨준 은닉자의 헌신과 사랑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 시대의 아픔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권위주의 정권의 끝 자락에서 만들어진, 운동권 학생과 성악 전공 여학생의 지고지순한 사랑 영화를 기대했던 젊은 관객들에게는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장년층의 비평가들로부터는 “정치적 색채를 배제한 것이 오히려 두 남녀의 헌신적인 사랑을 완성도 높게 그릴 수 있었던 요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듣기도 했습니다.
사실 ‘서울 에비타’는 영화기획 단계부터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영화계 안팎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선 인기 정상의 여배우 황신혜와 당시 안방극장에서 싱그러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던 박상원을 남녀 주인공으로 선정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습니다. 특히 성악도인 여주인공 역의 황신혜가 과연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의 노래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크게 일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립싱크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웬만큼 음악적 소양과 감각이 있어야 립싱크 연기를 실감나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는 연출을 맡은 박철수 감독 역시 이미 ‘어미’(1985년) ‘안개기둥’(1986년) ‘접시꽃 당신’(1988년) ‘물 위를 걷는 여자’(1990년) 등으로 여성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가수 조영남이 영화음악감독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수 조영남 역으로도 출연하여 ‘어설픈 듯 리얼한 연기력’을 뽐내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뮤지컬 ‘에비타’에서 체 게바라 역할은 비평가들로부터도 열렬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한편 ‘서울 에비타’의 촬영현장에는 실제 주인공 배기선 이경애 부부가 가끔 들러 박 감독과 황신혜 박상원 조영남 등 촬영팀을 격려하면서, 자신들을 대신하여 부부로 연기하는 황신혜와 박상원에게는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며 덕담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서울 에비타’의 개봉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론적으로 기대에는 못미쳤습니다. 박 감독의 섬세한 멜로 연출은 그런대로 평가를 받았지만 관객동원은 3만8천여 명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황신혜의 립싱크 연기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박상원도 안방 브라운관에서의 이미지를 잘 살리지 못했지요. 결국 이 와중에서 조영남만이 반사이익을 얻은 셈이 됐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누나(황신혜, 왼쪽)가 시국사건 수배범을 숨겨주고, 결혼식까지 치렀다는 소식에 어머니(정혜선, 오른쪽) 앞에서 화를 내는 남동생(윤다훈, 군복).
'서울 에비타'는 영화 속에서 뮤지컬과 밤무대 등을 통해 노래하는 장면이 많아 마치 음악영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울 에비타'의 영화음악감독을 맡은 가수 조영남(오른쪽)이 여주인공 황신혜(왼쪽)에게 영화 속에서 부르게 될 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불러야 하는 노래를 립싱크로 연기하기 위해 준비하는 황신혜.
영화 속에서 친정어머니(정혜선)는 딸과 남편 사이를 중재하느라고 속깨나 태운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배기선(박상원)과의 결혼식을 강행한 이경애(황신혜). 하지만 투옥된 남편을 기다리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할 상황이 막막하다.
'서울 에비타'의 촬영현장에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실제 주인공과 촬영팀(왼쪽부터 이경애, 황신혜, 배기선, 박상원, 조영남, 박철수 감독).
영화기획 단계부터 커다란 화제를 낳았던 '서울 에비타'. 하지만 완성된 영화의 결과는 기대에 못미쳤다. 왼쪽부터 박상원, 조영남, 황신혜, 박철수 감독, 이경애, 배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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