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여름(8월3일), 모두들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나기 위해 몸도 마음도 분주하던 때에 영화 ‘하얀 비요일’(강정수 감독)이 개봉됐습니다. 극장가에서는 여름방학 시즌을 성수기로 꼽습니다. 요즘과 달리 그때만 해도 극장 관객의 상당수가 10대~20대로 편중돼 있던 시절이어서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겨냥한 영화들은 대개 여름방학시즌에 맞춰 개봉되곤 했습니다. ‘하얀 비요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스포츠신문에 인기리에 연재되던 배금택의 원작만화를 영화로 옮겼다는 점과 ‘비오는 날의 수채화’(1990년, 곽재용 감독)에서 샛별처럼 떠오른 신인여배우 옥소리의 두 번째 주연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최고의 뮤지션으로 오빠부대를 몰고다니던 그룹 무한궤도의 리더 신해철이 영화음악에 참여했다는 점 등으로 개봉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어찌보면 ‘하얀 비요일'이 지난 2014년 10월 27일, 장협착수술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마왕 신해철’의 첫 영화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8년 MBC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혜성처럼 떠오른 무한궤도의 신해철은 당시 대학가요제의 심사위원장인 조용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90년 첫 솔로앨범을 냈습니다. 그리고 이 첫 앨범이 소위 말하는 ‘빅히트’를 쳤습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와 ‘안녕’ 등의 곡은 각종 가요차트를 휩쓸었고, 신해철은 단박에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MBC 10대 가수상 등 각 방송사의 연말 가요제 무대에 서면서 자연스럽게 오빠부대를 몰고다니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지금이나 예전이나 대마초 관련 연예인에 대한 제재나 처벌은 엄격한 편이었습니다만 1989년 당시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됐던 신해철은 구속적부심 재판에서 “대학생 신분의 초범이고, 친구들이 산 대마초를 호기심으로 두 모금만 피워 가담정도가 경미하다”는 이유로 보름만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첫 솔로앨범을 출반했고, 또 이 앨범의 빅히트로 신해철은 자연스럽게 가수활동을 재개했지요.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해 연말에는 MBC 10대 가수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영화 ‘하얀 비요일’의 영화음악에도 참여하게 된 것이구요.
고 신해철의 영화사랑은 가까운 동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 미아리에서 자라난 그는 동네에 있던 동시상영관(대지극장)에서 많은 영화를 섭렵(?)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의 청소년기에 흔히 영화계에서는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등 세 여배우를 일컬어 ‘트로이카’로 부르곤 했는데, 그는 이 호칭에 극렬 반대했답니다. 정윤희를 다른 여배우들과 동급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거였죠. 혹시 자신의 친구 중에 누가 정윤희에 대해 험담이라도 할라치면 물리적인 싸움도 불사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영화음악에도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졌습니다. 특히미국영화 ‘오멘’의 영화음악감독인 제리 골드스미스처럼 자신도 ‘간지 나는’ 영화음악을 만들어보길 바랬습니다. 비록 영화음악감독으로서는 아니었지만 영화음악 작업에 처음 참여한 작품이 ‘하얀 비요일’이었습니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서 샛별처럼 떠오른 옥소리(오른쪽)은 '하얀 비요일'에서 또다시 애타는 사랑의 여주인공 연지 역을 맡았다.
아버지 고과장(남궁원)으로부터 현필(변우민)과의 관계에 대해 추궁받는 연지(옥소리).
어려서부터 자신의 집에서 키워온 현필(변우민)과 딸 연지(옥소리), 그리고 아들 고묵(이경영)의 사랑과 증오의 관계 때문에 갈등하는 고과장(남궁원, 왼쪽)과 아내(태현실, 오른쪽).
어린 시절 소매치기였으나 고과장(남궁원)에 의해 고과장의 집에서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현필 역의 변우민.
‘하얀 비요일’의 원작인 모 스포츠신문의 연재만화 제목은 원래 ‘여고생과 대학 3년생’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연재만화 ‘여고생과 대학 3년생’의 연재기간(5월~9월) 중에 영화도 동시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스포츠신문에 만화가 연재될 무렵, 영화화 결정이 이루어진 겁니다. 다만 영화의 제목을 ‘하얀 비요일’로 바꾼 겁니다. 얼핏 뻔해 보이는 만화 제목보다는 훨씬 영화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기간(5월)에는 또한 ‘하얀 비요일’이라는 제목의 영화소설도 출간됐습니다. 그러니까 배금택 만화의 이야기를 ‘소스’(Source)로 영화와 소설이 동시에 만들어진, 원쏘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 1차 컨텐츠를 바탕으로 2차, 3차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전략)의 전형이었던 셈입니다. 90년대 초반 배금택이라는 인기 만화가의 위상을 감안했을 때, ‘하얀 비요일’이라는 제목으로의 변경은 ‘대단한 배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오히려 원작만화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라도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이나 ‘비트’(허영만)‘ ’바람의 파이터‘(방학기) 등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영화제목으로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배금택 원작만화를 영화화했던 다른 작품들인, 청소년 코미디물 ’열네살 영심이‘나 성인물로 분류되던 ’변금련뎐‘은 ’영심이‘(1990년 이미례 감독)와 ’변금련‘(1991년, 엄종선 감독) 등으로 원제목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하얀 비요일‘이라는 제목으로 바꾸겠다고 결정한 강정수 감독이나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배금택 작가의 아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고아로 자란 꼬마 김현필은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갑니다. 유치장에 수감된 현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경찰서의 고과장(남궁원)은 현필을 자신의 집에 데려갑니다. 고과장의 집에서 자라게 된 현필(변우민)은 고과장의 아들 고묵(이경영)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고과장 부부와 딸 연지(옥소리)의 따뜻한 사랑으로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고묵의 냉대와 배척이 계속되자 현필은 고과장의 집을 뛰쳐나옵니다. 현필과 연모의 정을 키워오던 연지는 깊은 상심에 빠지고, 마땅히 갈 곳 없는 현필은 고아 시절에 어울렸던 왕팔(조상구) 일당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연지와 떨어져 지내면서 현필은 비로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필과 연지 앞에는 안타까운 현실, 특히 고묵의 반대와 질시가 두 사람을 가로막습니다.
'하얀 비요일'의 주된 이야기는 현필(변우민, 오른쪽)과 연지(옥소리, 가운데)의 사랑을 중심으로 오빠 고묵(이경영, 왼쪽)의 질시와 증오가 뒤엉켜 펼쳐진다.
대략의 줄거리에서 보듯 ‘출생의 비밀’과 남녀 주인공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그런데 다분히 신파적인 이러한 이야기가 제법 솜씨있는 연출로 ‘깔끔한 청춘영화’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강정수 감독의 연출데뷔작으로는 성공적인 출발이었죠. 무엇보다도 강 감독의 소녀적인 감성 연출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떤 비평가는 “한 편의 순정만화를 보는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남녀 주인공, 옥소리와 변우민의 애타는 사랑은 적지 않은 여성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여성관객들로부터 ‘욕’을 먹었던 고묵 역의 이경영 역시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주인공이 욕망을 이루려는 것을 가로막는 인물)의 캐릭터를 영화 전체의 긴장을 이끌어내는 열연으로 화답해냈습니다. 여주인공 옥소리는 전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이어 또한번 청순가련, 애달픈 사랑의 여주인공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얀 비요일’은 여름방학 시즌에 개봉했습니다만 만족할만한 흥행결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관객들의 평가는 후한 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영화음악 때문이었겠죠. 앞서 신해철의 영화음악 참여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만 ‘하얀 비요일’의 OST앨범에는 9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인기 작곡가 서영진의 작곡으로 만들어진 신해철의 ‘하얀 비요일’(주제가)과 ‘그대의 품에 다시 안기어’ 등 2곡 외에 훗날 김민종의 히트곡이 되었던 ‘또 다른 만남을 위해’, 80년대 대표적인 발라드 가수 이정석의 ‘안타까운 이별’, 그리고 남녀 주인공인 변우민이 ‘나의 꿈 속으로’를, 옥소리가 ‘사랑하는 그대여’를 각각 불러 녹음했습니다. 그래선지 영화 OST앨범은 영화보다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PS. 90년대 영화를 추억하는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를 연재하면서 안타깝게 느끼는 점은, 어느 사이엔가 세상을 떠난 고인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얀 비요일’만 해도 마왕 신해철 외에 강정수 감독이 지난 7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특히 강 감독은 미혼이었던 데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오랫동안 홀로 당뇨합병증으로 투병해오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어서 유족도 없는 빈소는 영화계 동료들과 친구들에 의해 어렵게 마련됐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고 강 감독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기를 바랍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하얀 비요일'의 중심인물들이 밝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고묵 역의 이경영, 연지 역의 옥소리, 강정수 감독, 현필 역의 변우민.
'하얀 비요일'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변우민 옥소리 이경영. 이들은 촬영기간 내내 친남매 이상으로 화목한 관계를 유지, 순조로운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소녀적인 감성 연출로 '하얀 비요일'을 성공적인 연출데뷔작으로 갖게 된 고 강정수 감독(왼쪽).
'하얀 비요일'에서도 청순가련 여주인공(연지) 역을 열연한 옥소리.
'하얀 비요일'의 촬영현장은 젊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고 강정수감독(왼쪽)을 비롯해 신옥현 촬영감독(카메라 뷰파인더 들여다보는 중) 등 제작 스태프들 대부분이 젊은 층으로 짜여졌다.
영화 '하얀 비요일' 포스터
영화 '하얀 비요일' 포스터
'하얀 비요일'의 제작발표회. 흥행성공 케익을 자르는 옥소리, 고 강 감독, 변우민(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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