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영화계의 유의미한 대표작을 꼽으라면 관객과 비평가 할 것 없이 대부분 ‘서편제’(1993년, 임권택 감독)를 떠올릴 것입니다. 남도 판소리의 매력을 전국민에게 알려준 ‘판소리 홍보영화’와도 같습니다만, 바로 이 ‘서편제’를 통해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되돌아보는 대대적인 각성이 뜨겁게 일었습니다. 요즘과 같은 멀티플렉스 상영이 아닌 지역별 한 극장 상영(단관 개봉)이라는 당시의 상황에서, 서울에서만 113만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봤으니까요. 이 수치는 요즘으로 따지면 1천만 명을 너끈히 넘어서는 ‘대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편제’ 이전의 한국영화 흥행기록은 오랫동안 ‘겨울여자’(1977년, 김호선 감독)의 58만 명으로 되어 있다가, 1990년에 ‘장군의 아들’(임권택 감독)의 68만 명으로 새롭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다시 깬 겁니다. 한 마디로 ‘서편제’는 ‘90년대의 국민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서편제’의 개봉 주말(1993년 4월 10일)에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말 이틀 동안에는 60% 정도의 좌석을 채웠을 뿐이고, 그 다음 주 평일에는 좌석의 절반도 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매스컴과 비평가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또 영화를 보고나오는 관객들의 입소문에 개봉 두 번째 주말부터 관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관람을 필두로 정치인들의 관람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람이 불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관객들의 발길로 이어졌고, 극장 앞 매표구에는 길게 꼬리를 물며 줄 서는 풍경이 연일 펼쳐졌습니다. 단성사 한 극장에서만 6개월 이상 상영을 계속했으니 어느 정도의 ‘흥행바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서편제'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김규철, 오정해, 김명곤.
'서편제'는 90년대의 '국민영화'로 일컬어질 만큼 전국민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영화는 1960년대 초, 전라남도 보성 소릿재의 산골주막으로 30대의 남자가 들어서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막 여인네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며 그는 깊은 회상에 잠깁니다.
그 옛날, 이 동네로 떠돌이 소리꾼 유봉(김명곤)이 흘러들고, 동네 아낙이던 동호(김규철) 엄마는 유봉의 판소리에 반해 유봉을 따라 마을을 떠납니다. 동호 모자와 유봉, 유봉의 딸 송화(오정해)는 한 가족으로 살게 되는데, 얼마 후 동호 엄마가 죽게 되자 유봉은 동호와 송화에게 판소리와 북을 가르칩니다. 6.25전쟁으로 생활이 궁핍해진 중에도 끊임없이 소리를 가르치려는 유봉을 견디다 못한 동호는 집을 나가버립니다. 동호가 집을 나가자 송화는 식음을 전폐하고 소리도 포기한 채 동호만을 기다립니다. 유봉은 송화마저 동호의 뒤를 따를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리의 완성에 집착한 나머지 약을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한이 맺혀야 진정한 소리를 낼 수 있다”면서.
유봉은 시력을 잃은 송화를 정성껏 돌보지만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화에게 눈을 멀게 한 일을 사죄하고 숨을 거두지요.
그로부터 몇 년 후, 집을 나간 동호는 수소문 끝에 송화의 소식을 알아내 이름없는 주막에서 송화와 재회합니다. 북채를 잡은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고, 송화는 아비와 똑같은 북장단 솜씨를 가진 그가 동호임을 눈치챕니다. 둘은 그동안의 한과 그리움을 소리와 북으로 달랩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동호는 갈 길을 서두르고, 송화 역시 길잡이 소녀를 앞세운 채 길을 떠납니다.
동호 역의 김규철. 단역으로 출연하는 아역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서편제'의 여주인공 송화 역의 오정해(왼쪽).
‘서편제’를 본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명장면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 의문의 여지없이 유봉, 송화, 동호 세 식구가 시골 황톳길을 걸어내려오면서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일 겁니다. 멀리서 조그맣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하면서 들려오던 ‘진도 아리랑’ 가락이 마침내 흥에 겨운 나머지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면서 하나되는 세 사람의 소리가 화면을 가득 메우는 장면이죠. 조금 전까지 각자의 마음에 품었던 그 어떤 원망이나 갈등도 “아라리가 났네에, 에헤헤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에~“라는 가락과 함께 세 사람의 마음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용서와 화해요, 이해와 사랑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 연출기법적 측면에서도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 한 장면(쇼트, shot)을 무려 5분40초에 걸쳐 커트(cut) 없이 한 번에 찍은 겁니다. 영화용어로 롱 테이크(long take)라고 하는데요, 대개 하나의 장면(쇼트)은 1분을 넘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니까 5분40초에 이르는 하나의 장면은 굉장히 긴 셈이죠. 그런데, 이 장면을 길고 지루하게 느낀 관객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 속의 세 사람이 어깨춤까지 덩실거리며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 임권택 감독은 ”소리꾼들의 한이 흥으로 승화되는 이 장면을, 관객들도 고스란히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 커트를 나누지 않고 그대로 찍었다“고 밝혔습니다. 촬영을 맡았던 정일성 촬영감독 역시 ”임 감독과 20여년 동안 영화를 찍어왔지만 이렇게 기막힌 호흡은 처음“이었다면서 ”카메라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내가 다 소름이 돋았다“고 했습니다.
‘서편제’는 숱한 기록과 얘깃거리를 남겼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여주인공 오정해의 등장은 참으로 운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정해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었습니다. 매년 전북 남원에서 개최되는 미스 춘향선발대회에서 1992년도 미스 춘향으로 뽑힌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TV를 보던 임 감독의 눈에 ‘명창 김소희(1917~1995)에게 사사받았다’는 미스 춘향이 들어온 겁니다. 하기는 미스 춘향 출신의 연기자들이 더러 있기는 합니다. 윤손하가 1994년 미스 춘향이었고, 이다해와 장신영은 나란히 2001년 미스 춘향 진과 선에 선발되었던 적이 있네요.
아무리 그렇다해도 연기경험이 전무한 신인을 제법 큰 규모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기용할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거겠죠. 왜냐하면 ‘서편제’는 말 그대로 판소리가 소재이자 영화 자체였으니까요. 영화 속의 소리꾼 유봉 역의 김명곤 역시 젊은 시절 명창 박초월(1917~1983)의 제자로 판소리를 익혔던 ‘준비된 배우’였습니다. 결국 ‘판소리 할 줄 아는 미스 춘향’ 오정해의 합류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형국이 된 겁니다. 그래서 ‘서편제’에는 보통의 음악영화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립싱크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서편제’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시골 황톳길에서 부르는 ‘진도 아리랑’도 오정해와 김명곤이 직접 불렀습니다. 이 곡 뿐 아닙니다. ‘춘향가’ 중의 ‘사랑가’와 ‘쑥대머리’ ‘옥중가’를 비롯해 ‘흥부가’의 ‘박타령’, ‘심청가’ 등의 곡들을 거의 ‘판소리 공연’ 수준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이는 결국 평소에 ‘판소리’를 거의 접해보지 못했던 일반 대중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맛깔스럽다”는 ‘서편제 소리‘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서편제‘가 나오기 전까지 판소리는 기껏해야 가끔씩 TV의 국악무대 같은 프로그램에서 구색 맞추기 위해 공연되는 정도로만 여겼던 게 현실이었으니까요.
'서편제'의 촬영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진행됐다. 위의 사진은 전남 완도의 촬영현장.
여주인공 송화 역의 오정해에게 연기지시를 하고 있는 임권택 감독(가운데).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떠돌이 소리꾼 송화로 분장하는 오정해(왼쪽).
'서편제'에서 의붓 남매인 동호와 송화로 열연한 김규철(왼쪽)과 오정해.
1992년도 미스 춘향에 뽑혀서 '서편제'의 히로인으로 발탁된 오정해. 신인티가 역력한 그녀의 모습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소리꾼 유봉 역의 김명곤 역시 명창 박초월의 제자로 판소리를 익혔던, '서편제'를 위해 준비된 배우였다.
'장군의 아들'로 한국영화 최다흥행기록을 썼던 임권택 감독은, 또다시 '서편제'로 이 기록을 깼다.
‘서편제’는 그해 국내의 수많은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 남녀주연상, 신인상 등 상이란 상은 죄다 휩쓸었습니다. 특히 1993년 창설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최우수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제작사(태흥영화)의 이태원 대표와 임 감독, 그리고 오정해 등 전 제작진들에게 매우 감격적인 경사였습니다. 그 시절 상해국제영화제를 취재하고 있던 필자 역시 그 시절의 감흥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중국의 시진(심사위원장)과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 브라질의 헥토르 바벤코 등 세계적인 감독 심사위원들이 압도적으로 임권택 감독의 감독상 수상을 발표할 때의 흥분이란,,, 2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심사위원중의 한 명인 미국의 올리버 스톤 감독은 오정해의 판소리 열연을 몇 번씩이나 언급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습니다. 아울러 올리버 스톤 감독은 ‘서편제’의 영화음악에 대해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김수철이 작곡한 주제음악 ‘소리길’의 대금연주곡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습니다. 평생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서온 천재뮤지션의 야심작이라 하기에 충분합니다. ‘서편제’의 흥행과 더불어 김수철의 ‘서편제’OST음반도 엄청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우스개 소리 하나 덧붙입니다. 당시 상해국제영화제 시상식에는 중화권 최고의 여배우들인 공리와 장만옥도 참석했습니다. 시상식 후 축하연 자리, 가까이에서 본 그녀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우라’에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 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에 참가한 '서편제'의 제작팀과 취재진.
'장군의 아들'의 한국영화 최다흥행기록(58만 명)을 넘어선 뒤, 개봉관인 단성사 앞에서는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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