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레사의 연인’(1991년, 박철수 감독)은 사실 영화보다 원작 소설이 훨씬 더 유명했습니다. 1984년에 출간된 ‘테레사의 연인’(김병덕, 소설문학사)은 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 PD와 미모의 신인 아나운서 사이에 있었던 실제의 사랑 이야기를 거의 일기체로 기록해놓은 연애소설이었습니다. 문학 작품은 아니었지만 출간 당시 감수성 풍부한 10대, 20대 여성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30만 부 이상 팔려나갔습니다. 1980년대 출판 시장의 규모에서 30만 부라는 판매부수는 베스트셀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도 남을 수준이었습니다. 때문에 소설이 출간되던 무렵부터 이를 영화화하려는 시도 역시 여러 감독과 영화사들에 의해 추진됐습니다. 그러나 곧 영화나 TV드라마로 만들어질 것 같던 ‘테레사의 연인’은 7년 여쯤 지난 1991년에 이르러서 박철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습니다. 물론 상업성이 있다고 판단한 제작사(황기성 사단)의 적극적인 의지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1984년 소설의 출간 당시 소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소설의 OST음악이 만들어진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출반된 레코드판 표지에는 <실화소설 ‘테레사의 연인’의 주제음악>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 음반에는 ‘사랑의 테마’를 비롯해 ‘랭그리 팍의 회상’ ‘고독’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런 사랑노래’ ‘이별의 노래’ ‘디벨티멘토와 사랑의 詩’ 등의 곡들이 김도향의 노래로 수록됐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OST 음반에 수록된 곡들 모두 소설을 쓴 김병덕 PD가 작사하고 작곡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이지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MBC 방송국의 PD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직접 겪어낸 러브 스토리를 소설로 쓰고, 또 이것을 토대로 노랫말을 붙여 주제 음악까지 작곡했으니까요.
영화 '테레사의 연인'의 남녀 주인공 황신혜와 이영하.
그렇다
그해 가을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첼로 소나타가 있었고,
내가 피해 갈 수 없는 슬픈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 테레사를 나로부터 영원히 떠나보내고
가눌 수 없는 비애에 젖어 지난 날의 아름다웠던
슬픈 사랑의 회상에 잠긴다.
(소설 ‘테레사의 연인‘ 중에서)
영화에서는 황신혜와 이영하가 주인공으로 등장했습니다. 황신혜는 조각같은 미모로 데뷔 때부터 주목받아온 연기자였습니다. 특히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배창호 감독)과 ‘꿈’(1990년, 배창호 감독)을 통해서 한국영화계의 ‘뉴 히로인’으로 부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철수 감독은 ‘테레사의 연인’에 앞서 이미 ‘물 위를 걷는 여자’(1990년)를 황신혜와 함께 작업했던 터라 수월한 호흡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기차에서의 데이트 장면을 촬영 중인 박철수 감독(왼쪽)과 황신혜, 이영하.
영화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실화에 기초해서 펼쳐집니다.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PD인 김병덕(이영하)은 TV 뉴스 캐스터인 신인 아나운서 테레사(황신혜)를 DJ로 기용합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스튜디오의 차단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꽃피웁니다. 술과 음악, 그리고 가정 밖에 모르던 김병덕의 외도에 충격을 받은 아내(김혜옥)는 돌연 가출을 하고, 이에 가책을 느낀 테레사는 방송국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얼마 후 아내는 돌아왔지만 김병덕은 테레사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테레사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가정을 흔든다는 죄책감에 갈등하면서도 그를 향한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김병덕은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수술 끝에 한 쪽 다리를 절단한 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시간이 지나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과도 헤어져 상심에 빠진 김병덕은 7년여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옵니다.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서울로 돌아와 테레사를 찾지만 이미 그녀는 수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원작 소설과는 달리 남녀 주인공 이영하와 황신혜에 의해 펼쳐지는 영상 연기는 훨씬 더 구체적인 느낌으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영화로 만들어진 ‘테레사의 연인’은 아무래도 소설보다 훨씬 구체적인 느낌으로 신파 멜로의 분위기를 풍겨냈습니다. ‘어미’ ‘안개 기둥’ ‘접시꽃 당신’ 등을 통해 여성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박 감독의 연출관은 그대로라는 평가였습니다만 ‘테레사의 연인’에서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불륜이긴 하지만 가능하면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애썼고, 그 흔한 베드신 하나 없이 찍었습니다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전형적인 신파영화’로 치부해버렸습니다. 불륜을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공감으로 유도하기 위해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을 화면 곳곳에 배치했습니다만 제대로 먹히질 않은 겁니다. 테레사 역의 황신혜와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병덕 역의 이영하도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몫을 충분히 했습니다만 관객들과의 교감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원작인 연애 소설은 베스트셀러로 떠오를 만큼 여성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을지 몰라도 영화에서 보여지는 ‘금지된 사랑’의 직접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모습이 이런 양상이었으니 영화의 흥행 역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OST에 대해서는 의외로 호평이 많았습니다. 영화는 실패했지만 영화에 사용된 음악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겁니다. 영화 OST는 7년 전에 나왔던 실화소설의 OST를 편곡해서 사용한 수준이었음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중에서도 낯선 제목의 ‘랭그리 팍(Langley Park)의 회상’은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며 지금까지 애청되고 있습니다. 랭그리 팍은 미국 메릴랜드 주의 프린스 조지 카운티의 공원 이름입니다.
‘테레사의 연인’의 OST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습니다. 1984년에 나온 실화소설의 OST 음악이 1987년 KBS 드라마의 음악으로 무단 사용된 적이 있었습니다. OST 음악의 작사 작곡자인 김병덕 PD가 이걸 놓고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요구를 하는 등 한바탕 시비가 일었습니다. 당시 김병덕 PD의 주장은 “실화를 토대로 만든 음악인데, 전혀 다른 내용의 드라마에 무단 사용하는 바람에 장차 영화에 음악으로 사용하는데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김병덕 PD의 주장이 다분히 공상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만 4년 뒤에 결국 그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된 셈입니다.
바위는 남자 나뭇잎은 여자/ 바람은 슬픔 비는 그리움/ 하늘엔 종달새 내 마음은 외로움/ 내 사랑이 있는 곳 오 랭그리 팍
사랑은 강물 지난 날은 눈물/ 맹세는 소리 꿈은 메아리/ 하늘엔 종달새 내 마음은 외로움/ 눈물로 아롱진 오 랭그리 팍
어제는 옛날 오늘은 단 하루/ 내일은 태양 그리고 또 옛날/ 하늘엔 종달새 내 마음은 외로움/ 지금도 보인다 오 랭그리 팍
김도향의 애절한 목소리로 녹음된 ‘랭그리 팍의 회상’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영화 속에서 김병덕 역의 이영하와 테레사 역의 황신혜는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기차역 플랫폼 벤치에서의 촬영 장면. 박철수 감독(등 돌린 사람)이 황신혜 이영하와 촬영장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박철수 감독
'테레사의 연인' 영화제작에 앞서 리딩(대본읽기) 중인 이영하, 박철수 감독, 황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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