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추석시즌에 개봉된 영화 ‘태백산맥’(1994년)은 ‘서편제’(1993년)의 한국영화 최다흥행기록 수립이 가져다 준 일종의 보너스 같은 작품입니다. 제작사(태흥영화)의 입장에서는 임권택 감독과 함께 만들어낸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서편제’ 등의 영화들마다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이번에야말로 흥행 생각하지 말고 임 감독이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어보라”며 임 감독에게 영화화 결정 전권을 일임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임 감독은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제작사에 제안했던 것이고, 이를 제작사도 흔쾌히 ‘오케이’해서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1983년부터 1989년까지 ‘현대문학’에 연재된 대하소설(전 10권)로 한국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1948년 ‘여수 순천 사건’에서부터 6.25 전쟁을 거쳐 1953년 휴전될 때까지 좌익과 우익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그렸는데요, 완간된 소설이 무려 750만부 이상 팔려나갔습니다. 흥행 생각하지 말고 영화 만들어보자던 제작사(태흥영화)로서는 입이 귀에 걸릴 일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의 흥행확률이 대체로 높았기 때문이지요.
영화의 후반부, 군경의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빨치산은 마을에 불을 놓고 퇴각한다.
여수 순천 사건으로 벌교를 장악한 염상진(김명곤, 두 손 펼쳐 설명하는 사내)의 좌익세력은 인민재판을 열어 반동 숙청에 나선다.
영화 '태백산맥'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염상구(김갑수), 김범우(안성기), 염상진(김명곤).
영화 ‘태백산맥’의 흥행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절반의 성공’ 수준이었습니다. 추석연휴 시즌에 개봉된 영화치고는 다소 아쉬운, 23만 명 정도의 관객 스코어를 기록했지요. 그래도 그해(1994년) 개봉된 한국영화들 중에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35만 명, 장선우 감독)와 ‘마누라 죽이기’(34만 명, 강우석 감독), 그리고 ‘세상 밖으로’(25만 명, 여균동 감독)에 이어 4위에 올랐습니다. 이 해에는 유난히 미국 할리우드의 ‘쎈‘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트루 라이즈‘(87만 명) ’스피드‘(86만 명) ’쉰들러 리스트‘(84만 명) ’포레스트 검프‘(70만 명) ’미세스 다웃파이어‘(46만 명) 등이 일년내내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던 때라는 걸 감안하면 좌-우익 이데올로기를 다룬 ’심각한‘ 영화치고는 제법 관객동원을 한 셈입니다.
민족주의자 김범우(안성기)는 좌익세력의 잔인한 숙청과 우익세력의 과도한 보복테러, 양쪽을 모두 비판한다.
좌익 세력을 이끄는 염상진 역의 김명곤.
영화 ‘태백산맥’은 당시 한국영화계의 제작비 규모에 비춰보면 블록버스터급에 해당합니다. 촬영 기간도 3개월 이상 되었고, 출연 배우의 면면 또한 대단했습니다. 안성기 김명곤 오정해 신현준 방은진 김갑수 최동준 이호재 최종원 안석환 등 영화계 뿐 아니라 연극계의 실력파 배우들이 총동원됐습니다. 당시 김갑수와 방은진은 연극계에서는 뛰어난 연기력을 과시하는 배우였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태백산맥'에서의 눈부신 열연은 단박에 두 사람을 인기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전남 벌교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여수 순천 사건으로부터 6.25 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의 3부까지의 이야기인 셈이죠. 원작의 4부에 해당되는 6.25전쟁에서 1953년 휴전까지의 이야기는 생략되었습니다.
빨치산이 조계산으로 퇴각한 후, 좌익 연루자들을 마구 잡아들이는 군경과 대동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김갑수, 왼쪽에서 세번째).
전남 도당 소속의 정하섭(신현준)은 무당 소화(오정해)의 집에 잠입, 소화의 도움으로 벌교에 들어선 계엄군의 정보를 빼낸다.
순천중학교 교사이자 민족주의자인 김범우(안성기)는 좌-우익 양쪽을 비판하다가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기도 한다.
염상진(김명곤)이 이끄는 좌익세력의 인민재판 장면.
해방 이후,좌-우익의 이념대립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48년,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납니다. 전남 보성군 당위원장 염상진(김명곤)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이 벌교를 장악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반동을 숙청합니다. 하지만 반란군이 패퇴하면서 좌익세력은 조계산으로 후퇴하고, 이번에는 벌교로 돌아온 우익세력이 좌익 연루자들을 연행하여 조사합니다. 이때 대동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김갑수)는 형 염상진에 대한 증오심으로 빨치산의 아내(방은진)를 겁탈하는 등 좌익 가족에 대한 보복테러를 가합니다.
이 와중에서 순천중학교 교사이자 민족주의자인 김범우(안성기)는 벌교에서 벌어지는 좌-우익의 잔인한 숙청과 과도한 보복 양상을 둘다 비판하다가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습니다. 또 전남도당 소속의 정하섭(신현준)은 무당 소화(오정해)의 집에 잠입해 빨치산 토벌을 위해 벌교에 들어선 계엄군의 정보를 빼내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소화와 사랑에 빠집니다. 소화는 정하섭의 아이를 임신하기에 이르지만 좌익에 대한 증오로 불타는 염상구의 잔인한 고문으로 낙태합니다. 설상가상 하섭의 부모는 무당이라는 소화의 신분 때문에 매몰차게 외면합니다.
이런 와중에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계속되는 계엄군과 빨치산의 싸움은 점점 더 광기에 휩싸여가고, 낮과 밤을 바꿔가며 두 아들(염상진 염상구)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지켜봐야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마침내 1949년부터 군경의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빨치산은 벌교와 산자락 마을에 불을 놓고 퇴각합니다. 영화는 불타는 마을을 뒤로 한 채 시대의 아픔에 고뇌하는 김범우의 모습을 오버랩으로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정하섭(신현준)과 관련되어 염상구(김갑수)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는 무당 소화(오정해). 소화는 이 고문으로 정하섭과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낙태하고 만다.
염상진(김명곤)의 아내 죽산댁으로 열연한 정경순. 좌익 연루자로 심문받는 과정에서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소. 자식이 굶응께 빨갱이짓 허재. 빨갱이짓 혀서 굶긴 건 아니요"라며 일갈한다.
숨어있다가 좌익세력에게 발각되어 죽기 직전 위기에 빠진 염상구(김갑수).
1994년 추석이 다가오는 9월초, 영화 '태백산맥'의 개봉을 앞두고는 우익단체들로부터 상영저지 협박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수호 애국연합(자민련)은 “우익을 악의 대명사로, 좌익과 빨치산을 해방전사로 찬양하는 빨갱이 영화를 상영할 경우 화약과 휘발유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으며, 한국전쟁참전군인연맹 등의 단체들은 공연윤리위원회와 전국의 6백여 극장에 상영저지 협조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성된 영화 ‘태백산맥’은 오히려 ‘세련된 반공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염상진(김명곤)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라면서 자신의 신념에 회의를 품는 장면이라든가, 또 그에게 김범우(안성기)가 “당신의 손을 보시오. 그 피는 숙청 이전에 인간의 피요”라며 훈계하는 대목 등이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기는 그 방대한 이야기를, 특히나 좌-우익의 이념 대립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영화로 옮겨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2시간4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로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었던 '고충'이 십분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임권택 감독이 "평생 영화하면서 제일 애먹었던 작품"이라고까지 토로했겠습니까?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민족주의자 김범우(안성기).
당시의 주변 모습을 재현한 장면.
영화 '태백산맥'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김범우(안성기), 염상진(김명곤), 염상구(김갑수).
주인공 김범우(안성기).
좌-우익의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는 두 형제 염상구(김갑수, 왼쪽)와 염상진(김명곤).
촬영현장에서 잠시 짬을 내어 한데 모인 주요 출연배우들. 왼족부터 김명곤, 안성기, 최동준(뒷줄), 오정해, 신현준, 정경순, 김갑수, 방은진.
영화 '태백산맥'의 주역들. 왼쪽부터 정경순, 방은진, 임권택감독, 신현준, 오정해, 안성기, 김명곤, 김갑수, 정일성 촬영감독.
"흥행 생각하지 말고, 감독이 찍고 싶은 영화 만들라"는 제작사(태흥영화)의 권유를 받고 임권택 감독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영화화를 결정했다.
촬영에 앞서 카메라의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임권택 감독.
영화 '태백산맥'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임권택 감독과 그의 아내 채령(오른쪽).
촬영에 들어가기 전, 전 출연배우들에게 촬영할 내용을 설명하는 임권택 감독.
영화 '고래사냥'(1986년, 배창호 감독)에서는 안성기와 함게 배우로 출연했던 김수철(오른쪽). '태백산맥'에서는 영화음악을 맡았다.
평소 친남매 이상으로 우애를 나누어온 김수철과 정경순(오른쪽)이 촬영현장에서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촬영현장을 찾은 태흥영화 이태원 대표(앞줄 가운데)는 정일성촬영감독(앞줄 왼쪽), 임권택 감독(앞줄 오른쪽)과
함께 '삼총사'로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 등을 만들며 199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끌었다.
'태백산맥'에서 정하섭과 소화 역으로 호흡을 맞춘 신현준과 오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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