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업’(1988년, 이두용 감독)은 제목에서 느껴지듯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은 응보(應報)를 이야기의 원천으로 삼은 작품입니다. ‘업’은 산스크리어(Karman)에서 나온 불교 용어입니다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업보’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는 말이지요. 영화에서도 인과응보, 숙명, 윤회사상 같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일들을 ‘업’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당시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가장 큰 이유는 강수연의 여주인공 캐스팅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강수연은 영화 ‘씨받이’(1987년, 임권택 감독)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사상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인기 상종가를 칠 때였습니다. 그녀가 월드스타로 떠오른 이후, 한국 영화계는 그야말로 너도나도 ‘강수연 모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단지 월드스타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 이후 그녀가 거의 ‘겹치기’ 수준으로 출연했던 ‘연산군’(1987년, 이혁수 감독),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1987년, 송영수 감독), ‘감자’ (1988년, 변장호 감독) 등의 영화들이 모두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출연료도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당시 한국영화의 여주인공 개런티는 대략 5백만원 정도였는데, 월드스타로 떠오른 이후 그녀를 캐스팅하려는 영화제작사들 간의 경쟁으로 급상승하게 된 겁니다. 겹치기로 출연해야 촬영 스케줄을 겨우 맞출 수 있었던 ‘연산군’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 ‘감자’ 등까지는 그래도 1천만원~1천5백만원 정도였습니다만 그 후에는 편 당 3천만원 이상으로 껑충 뛰어 올랐습니다. 영화 ‘업’의 경우에는 당시 제작사(태흥영화)와 ‘업'을 포함한 3편(’아제 아제 바라아제‘ ’그후로도 오랫동안‘)을 묶어서 1억원에 계약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편당 3천5백만원 수준인 거지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출연료였습니다.
하지만 영화계 일각에서는 볼멘 소리도 나왔습니다. 월드스타, 흥행보증수표 등 강수연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강수연 선풍’의 후유증 또한 만만찮았기 때문입니다. 강수연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출연료도 덩달아 올랐던 겁니다. 웬만한 영화의 여주인공 출연료는 1천5백만원~2천만원으로 공식화되었고, 심지어는 처음 스크린에 진출하는 TV 탤런트들의 경우에도 1천5백만원 정도는 당연히 요구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니까요.
월드스타로 떠오른 이후 강수연은 거의 겹치기 수준으로 여러 영화에 출연해야 했다. 이와 함께 그녀의 출연료도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고, '업'의 출연에는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개런티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세’ 강수연의 여주인공 출연이 대중의 관심사였다면 영화계에서는 이두용 감독의 ‘연출 외도’를 주목했습니다. 이 감독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화사(두성필름)을 운영해오면서 ‘뽕’(1985년) ‘내시’(1986년) 등의 영화를 직접 제작-연출해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화사가 아닌 다른 영화사의 의뢰를 받고 연출에 나섰기 때문에 영화가의 관심이 쏠렸던 겁니다. 사실 이 감독은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사에 있어서 가장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해외영화제에서의 수상과 평가를 많이 받으면서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만 이 감독은 그 보다 앞서 이미 해외영화제 진출을 이뤘으며, 또 해외에서도 상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198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피막’이 출품되어 특별상을 수상했는데, 무속신앙에 매달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던 시대상(조선시대)을 비판한 시각으로 당시 영화제 심사위원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는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수상기록입니다. 또 1983년에는 ‘물레야 물레야’가 칸 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도 초청받았습니다. 특히 이 때를 계기로 이 감독은 세계무대에서 독창적인 연출력을 인정받아 미국 할리우드 스튜디오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엑소시즘영화의 대명사인 ‘엑소시스트’의 여주인공 린다 블레어를 캐스팅하여 만든 할리우드 B급 액션영화 ‘침묵의 암살자’(1988년)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연출의뢰를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감독이 미국에서 ‘침묵의 암살자’를 끝내고 한국으로 막 돌아온 무렵에 ‘업’의 연출의뢰를 받았던 겁니다. 외국의 스태프들과의 영화작업으로 상당한 피로감을 느낄 때였고, 마침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같은 ‘조선시대 여인 잔혹사’와도 흡사한 소재의 영화였기에 선뜻 연출의뢰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51번째 연출작입니다. 조선시대 등 한국 전통사회에서 여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인간적인 모습에 카메라 앵글을 맞춰온 이 감독으로서는 외국에서의 영화작업으로 쌓인 여독도 풀 겸 자신의 특화된 연출관을 펼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온 나라를 휩쓰는 풍병의 액땜에 효험 있다면서 나무로 만든 남근을 시중에 내다 파는 구산의 아내(강수연).
조선팔도를 휩쓰는 풍병(문둥병) 때문에 골치를 앓던 허사또(남궁원)는 나무로 만든 남근을 액땜책으로 시중에 파는 구산 부부(김영철, 강수연)를 잡아들여 문책합니다. 그런데 구산댁을 보고 한눈에 반한 허사또는 미신을 주장하는 구산에게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을 씌워 그의 남근을 잘라 성문에 걸어놓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에 대한 처분을 항의하는 구산댁을 기어이 자기의 소실로 들어앉힙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허사또는 환영과 악몽에 시달리게 됩니다. 마을에도 끊임없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과 사고들이 생겨납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허사또는 점쟁이를 불러들이는데, 허사또의 집안에 일어나는 재앙과 마을의 기이한 변고들이 모두 구산 부부와 자신에게 얽힌 업보 때문이라는 점괘를 받게 됩니다. 이에 격분한 허사또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겨우 해후하게 구산 부부를 참살합니다. 그러나 전생의 업을 씻지 못한 허사또 역시 오랫동안 문둥병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풍병의 액땜책으로 목경을 만들어 파는 구산 부부(김영철, 강수연)는 관헌에 붙잡혀 문초를 당한다.
영화 ‘업’의 개봉시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5월 석가탄신일 연휴기간이었습니다. 이른바 ‘대목’이었지요. 그런데 개봉당일(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월요일인 석가탄신일에만 관객이 반짝했을 뿐, 그 다음날부터 극장 앞은 썰렁해졌습니다. 영화 제작 초기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기세가 영화 개봉 이후엔 사라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시사회 이후 비평가들간에 평가가 다소 엇갈리긴 했어도 영화적인 완성도나 감독과 배우들의 면면 등에 비추어볼 때,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강수연의 ‘상승세’가 주춤했다는 사실에 영화관계자들의 놀라움이 컸습니다. 더군다나 원래는 이 감독과 ‘뽕’을 함께 작업했던 이미숙이 구산댁으로 캐스팅되었는데, 가슴 노출 장면 때문에 거절한 것을 강수연이 흔쾌히 ‘구원투수‘를 자청하고 나섰던 ’미담‘ 내지는 ’용기‘마저 무색해진 셈이 되었으니까요.
극장 앞과 신문광고 등에 내걸린 영화 ‘업’의 포스터에는 “그날, 아궁이의 불빛은 요염했다!”는 큼지막한 헤드카피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작은 글씨체로 씌여진 “전생에 지은 색업(色業), 금생(今生)에 씻기에는 너무 늦었소!”라는 보조카피의 한탄만 남고 말았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허사또(남궁원)는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을 씌워 구산의 남근을 잘라 성문에 걸어놓고, 그의 아내(구산댁, 강수연)을 기어이 자신의 소실로 들어앉힌다.
강제로 허사또의 소실로 들어가게 되는 구산댁(강수연).
추운 겨울철 촬영으로 파카를 걸치고 대기하고 있는 강수연.
집안과 마을의 변고가 구산 부부와 자신에게 얽힌 업보 때문이라는 점괘에 격분한 허사또(남궁원)은 구산 부부를 참살한 후, 자신도 문둥병을 앓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한국영화 해외진출사의 선봉장이었던 이두용 감독. 미국 할리우드의 요청으로 '침묵의 암살자'라는 B급 액션영화를 찍고 귀국한 후, 첫 작품으로 '업'의 연출을 맡았다.
'업'의 촬영현장. 시나리오와 콘티를 비교해가면서 강수연(오른쪽에서 두번째)에게 설명하고 있는 이두용 감독(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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