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정이라는 가수를 아시는지요? 80년대 후반 가요계를 평정했던, 당시 온 장안에 일명 ‘ㄱㄴ춤’이라는 요상한 춤을 유행시킨, 댄스 가수의 전설처럼 기억되는 ‘댄스본좌’가 박남정입니다. 요즘엔 TV 예능프로그램 등에 나와 자신의 딸(박시은) 자랑을 하거나, 부녀간의 훈훈한 에피소드들을 전하는 ‘옛날 가수’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요. 80년대 후반 무렵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였기 때문에 ‘옛날 가수’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그 시절의 ‘댄스본좌 박남정’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현역으로 여겨질 겁니다. 그 만큼 그 시절 박남정의 인기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비록 90년대 초반까지 비교적 짧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말그대로 ‘짧고 화려하게’ 독보적인 아우라를 발현했지요. 어느 누구보다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그의 노래와 춤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공연과 무대를 따라다니며 열광했던 수많은 소녀들이 어쩌면 ‘오빠부대‘의 진정한 시작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박남정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아, 바람이여’라는 곡으로 데뷔했습니다. 데뷔하자마자 그는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당시엔 남자 가수로는 삼인조 그룹 소방차가 경쾌한 안무의 댄스로, 여자 가수로는 김완선이 섹시한 표정과 댄스를 앞세워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 없이 나타난 신인 가수가 소방차의 군무(群舞)와 차별되는, 또 김완선의 섹시 댄스와도 전혀 다른 ‘풋워크’를 기조로 한 현란한 춤솜씨를 선보였던 겁니다. 박남정의 등장은 댄스 가수의 판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대중은 뜨겁게 반응했습니다. 10대 팬들은 열광적으로 ‘오빠’를 연호했고, 20대 팬들은 그의 춤을 흉내내느라 땀을 흘렸습니다. 그런가하면 나이든 중년의 팬들은 그들대로 ‘동생 같고, 아들 같은’ 그의 신나는 춤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소방차와 김완선이 주로 젊은 층의 지지에 힘입었던 데 반해 박남정은 그야말로 세대를 뛰어넘어 인기를 얻은 겁니다. 단박에 인기정상의 가수로 포지셔닝됐습니다. 특히 1989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박남정의 해’로 기억될 만 합니다. 그만큼 엄청난 선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널 그리며’와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히트곡이 일년 내내 방송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일년 내내 박남정의 신명나는 춤을 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얼굴의 오른쪽과 턱 아래를 손가락으로 오가며 추는 ‘ㄱㄴ춤‘은 ’국민댄스‘가 됐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냥 앉은 자리에서도 손가락으로 그 춤을 흉내내며 즐거워했습니다. 지난 2016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극중 동룡(이동휘)이 ’쌍문동 박남정‘이라며 춤실력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당시 박남정의 인기세를 실감케하기도 했습니다.
80년대 후반 가요계를 평정한 댄스본좌 박남정은 영화 '새앙쥐 상륙작전'에 주인공으로 출연, 연기 외도에 나섰다. 대학의 연극영화과 학생 역할을 맡아 같은 과 여학생 제니(하제니)를 짝사랑하는 연기를 펼쳤다.
영화 ‘새앙쥐 상륙작전’(1989년, 김정진 감독)은 바로 이 박남정을 전격 주연으로 캐스팅, 청춘영화로 만들어냈습니다. 영화 속에서 맡은 주인공 이름도 그대로 박남정이고, 대학의 연극영화과 학생으로 노래를 잘하는 인물로 설정됐습니다. 같은 과의 여학생 제니(하제니)를 짝사랑하지요. 그런데 제니는 대학의 노래 써클인 귀뚜라미의 리더 선욱(신용욱)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삼각관계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제니의 적극적인 대시에 선욱은 오히려 냉랭한 반응을 보입니다.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이 구겨진 제니는 의기소침해집니다.
한동한 조용하던 캠퍼스에는 복학생 장호(한정국)의 등장으로 활기가 살아납니다. 이 틈에 남정은 의기소침해진 제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대학가요제 출전을 기획합니다. 실제로 제니는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무대를 준비하면서 남정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시선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대학가요제 본선에서 떨어지자 제니의 신경이 다시 극도로 날카로워지고, 이에 남정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 기금마련 공연으로 제니를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 공연무대를 통해 제니는 남정의 진심을 깨닫고 감동하게 됩니다.
여주인공 제니 역의 하제니(사진 윗쪽)와 다정한 포즈를 취한 박남정. 박남정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특기인 춤과 노래하는 장면을 연기로 여러차례 선보였다.
스토리라인은 단순합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쓴 김정진 감독은 뛰어난 유머감각의 시나리오작가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이 시나리오 역시 1987년 영화진흥공사와 모스포츠신문이 공동으로 주관한 시나리오 공모에서 당선된 작품이었지요. 그런데 원래의 시나리오에서는 SF적인 판타지 요소가 가득했는데, 완성된 영화에서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SF적인 내용은 거의 없었고, 기껏 영화의 타이틀백(첫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낸 정도가 참신하게 보였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캠퍼스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던 복학생 장호가 ‘새앙쥐 상륙작전호’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설정이 유일한 판타지 요소였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당시의 국내 영화계의 기술력이 판타지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아서 시도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영화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후한 평가를 받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박남정을 주인공으로 기용하고도, 그 열매를 따먹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박남정은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그의 특기인 노래와 춤이 그야말로 화면 곳곳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대학가요제를 준비하는 장면에서나, 심장병 어린이 돕기 기금마련 공연 장면 등은 마치 박남정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영화 속 남정의 짝사랑 상대인 제니(하제니)가 박남정의 히트곡인 ‘널 그리며’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남정이 제니의 등 뒤에서 에로틱한 포즈의 춤을 함께 추기까지 합니다. 박남정에게 열광하는 소녀팬들의 ‘꺅!’하는 비명소리가 나올만한 장면이지요. 그런데, 극장 안의 풍경은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연기 경험이 없는 박남정을 위해서라도 그 외의 배우들은 박남정의 부족한 연기 부분까지 채워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결국 영화 ‘새앙쥐 상륙작전’은 인기가수 박남정의 ‘연기외도’라는 뉴스거리만 풍성하게 남겼을 뿐, 영화적인 성취는 별로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연예가 일각에서는 박남정의 히트곡 ‘사랑의 불시착’에 빗대어 ‘영화의 불시착’이라는 입방아가 나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박남정은 이후에도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습니다. ‘새앙쥐 상륙작전’의 결과가 워낙 참담해서 웬만하면 다시는 절대로 영화에 출연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박남정은 또 도전에 나선 거죠. 물론 특별출연 형식이었고, 영화 속의 캐릭터도 가수 박남정 역할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또다시 연기에 도전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배금택 만화 원작을 영화화한 ‘영심이’(1990년, 이미례 감독)에서 주인공 영심이(이혜근)가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인기가수 박남정으로 등장합니다. 이때도 사실 박남정의 연기는 여전히 어색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2년 후에 마침내 박남정은 영화 ‘위험한 상견례’(2010년, 김진영 감독)에서 일취월장한 연기력을 뽐냅니다. 역시 인기가수 박남정 역할인데요, 잠잘 틈도 없이 바쁜 스케줄 속에서 부산 공연이 광주로 변경된 걸 모르고 비몽사몽간에 무대에 올라 부산사투리로 ‘부산갈매기’ 멘트를 날렸다가 광주팬들에게 봉변 당하는 연기를 완전 능청스럽게 펼쳐보였습니다. 특별 카메오 형식으로 출연했습니다만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지요. 사실 그 에피소드는 밤낮없이 스케줄을 소화하던 시절, 박남정이 실제로 겪었던 경험담이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새앙쥐 상륙작전'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았던 김정진 감독(오른쪽)과 촬영을 앞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는 박남정.
영화 속 캠퍼스를 좌지우지하는 복학생 장호(한정국, 오른쪽)가 후배들인 남정(박남정, 왼쪽에서 세번째), 제니(하제니, 왼쪽에서 두번째), 용주(전수경, 왼쪽)에게 훈시하는 모습.
촬영현장을 구경하던 꼬마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박남정.
짝사랑하는 제니(하제니)의 냉랭한 반응에 실망하는 남정(박남정).
제니(하제니, 가운데)와 남정(박남정, 오른쪽)에게 캐릭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정진 감독(왼쪽).
'새앙쥐 상륙작전'의 촬영을 맡았던 유영길 촬영감독.
유영길 촬영감독(왼쪽)과 김정진 감독(가운데)이 제니(하제니, 오른쪽)에게 연기 지시를 하고 있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었던 박남정은 촬영현장의 모든 것들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촬영용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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