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에는 이른바 대(代)를 이어 배우로 활동하는 ‘2세 배우’들이 꽤 있습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2세 배우’ 원조들로는 이덕화 최민수 허준호 독고영재 박준규 조형기 등이 있지요. 이들의 부친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까지 스크린을 화려하게 누볐던 고(故)이예춘 고(故)최무룡 고(故)허장강 고(故)독고성 고(故)박노식 고(故)조항 등입니다. 그런가하면 아직 부친이 생존해 있는 2세 배우들도 꽤 많습니다. 김용건의 아들 하정우를 비롯해 최주봉의 아들 최규환, 연규진의 아들 연정훈, 백윤식의 아들 백도빈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3세 배우‘도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이는” 까닭이겠지요.
“20대 청춘의 영화는 20대 감독이 찍어야 한다”면서 ‘청 블루 스케치’(1986년)라는 영화로 데뷔한 이규형 감독은 ‘2세 배우’들로 캐스팅 진용을 갖춰 화제를 낳았습니다. 천호진 허준호 독고영재 등이 주연이었습니다. 사실 천호진의 경우에는 부친(프로레슬러 천규덕)이 배우가 아니었으므로 ‘2세 배우‘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영화 ’청 블루 스케치‘의 홍보 마케팅 전략 중에서는 천호진까지 묶어넣은 ’2세 배우‘ 아이템을 가장 많이 써먹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영화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1991년, 최성식 감독)도 ‘2세 배우’의 캐스팅으로 대중의 시선을 끌었던 경우입니다. 최민수와 이혜영을 남녀 주인공으로 내세웠지요.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연출 데뷔를 앞둔 시점에서 최성식 감독은 “특별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젊은이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감독 데뷔의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 탈고 후 캐스팅 등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는 최 감독 자신이 감독 뿐 아니라 제작까지 겸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제작비도 최 감독이 조달해야 했던 겁니다. 만일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야말로 ‘쪽박’을 차게 되는 상황이었지요. 애초의 연출 의도는 다분히 컬트적 성향을 지향했습니다만 영화 제작 과정을 거치면서 상업적인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에 출연할 당시 이혜영은 뮤지컬과 연극무대를 넘어 영화계에서도 점차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카지노 손님의 돈(1억원)을 빼돌려 성임(이혜영)과 돈을 물쓰듯 하며 정처없이 여행에 나선 길우(최민수, 운전석). 렉커차(자동차를 싣고 촬영하는 트럭)에서 자동차 질주 장면을 찍고 있다.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에 출연할 당시 최민수와 이혜영은 막 ‘남부군’(1990년, 정지영 감독)의 촬영을 끝낸 직후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민수는 '최무룡 강효실의 아들'로 더 유명할 때였고, 이와 달리 이혜영은 ’고(故) 이만희 감독의 딸‘ 보다는 색깔있는 여배우로서 이미 상당한 관록을 쌓은 뒤였습니다. 말하자면 이혜영은 한국영화계에서 몇 안되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추앙받는 이만희 감독의 딸이라는 ’후광’을 업지 않고, 스스로 일어선 배우였던 셈이죠. 1981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시작으로 ‘에비타’ ‘바담 바담 바담’ 등의 뮤지컬에서 춤과 노래와 연기력을 발휘하며 이름을 떨쳤습니다. 자연스럽게 영화관계자들의 눈에도 띄었습니다. ‘애마부인’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정인엽 감독은 ‘김마리라는 부인’(1983년)에 이혜영을 비중있는 조연으로 기용하여 시쳇말로 재미를 톡톡히 봤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이장호 감독이 ‘무릎과 무릎사이’(1984년)에서 안성기 이보희 임성민과 더불어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했지요. 한국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감독들의 영화에 연거푸 ‘주연 같은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이혜영은 자신만의 색깔을 강렬하게 그려냈습니다. 이후 이혜영은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넘어 영화계로 본격 진출하면서 ‘개성 넘친 여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심어놓은 겁니다. ’땡볕‘(1985년,하명중 감독), ’겨울나그네‘(1986년, 곽지균 감독), ’티켓‘(1986년, 임권택 감독), ’거리의 악사‘(1987년, 정지영 감독), ’성공시대‘(1988년, 장선우 감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년, 장길수 감독), ’남부군‘(1990년, 정지영 감독)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이혜영만의 매력을 물씬 풍겨냈습니다.
‘겨울꿈은 날지 않는다’의 최 감독도 이헤영에게 기대한 부분이 이런 것이었겠지요. 게다가 ‘거장‘ 이만희 감독의 딸이라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었을 것이구요. 상대역으로 캐스팅한 최민수 역시 ‘최무룡의 아들’이라는 후광을 넘어 서서히 떠오르고 있던 차세대 스타였기에 최 감독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고생을 ‘아름다운 추억’처럼 얘기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겠지요.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의 최성식 감독(가운데)과 전조명 촬영감독(오른쪽).
영화는 철저하게 최민수 이혜영, 두 주인공에게 의지합니다. 내용 역시 두 사람의 이야기 외에는 별다른 ‘곁가지’가 없습니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있는 스물아홉살의 성임(이혜영)은 권태와 무의미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삶을 혐오합니다. 일탈을 꿈꿔보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26세의 청년 길우(최민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온 인생입니다. 하지만 카지노 웨이터로 일하면서 큰 돈들이 왔다갔다하는 도박판의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님의 돈 1억원을 빼돌립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성임과 길우의 우연한 만남과 동행을 쫓아갑니다. 길우가 지닌 큰 돈을 물 쓰듯 쓰는 게 두 사람에겐 일상에서의 탈출입니다. 성임과 길우는 뚜렷한 목적지 없이 여행을 계속 하면서 마치 세상에 복수를 하듯 돈을 쓰며 응어리를 풉니다. 이 짧은 여행의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길우는 차에 타고 있던 성임을 차 밖으로 밀쳐냅니다. 그리고는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고 절벽 끝으로 날아오릅니다.
에필로그,,,,길우의 죽음 이후, 성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는 로드무비 형식이어서 길거리에서의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다.
카메라는 성임과 길우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생각과 일탈행위를 화면에 담아냅니다.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펼쳐집니다. 길우가 고급 호텔에서 돈을 펑펑 쓰고나서 성임에게 자조적으로 내뱉는 대사에서는 그의 외로움과 절망이 잘 묻어납니다. “내가 아무리 호텔 같은 데서 돈을 물쓰듯 하면서 부티나게 보이려해도 그들은 다 안다. 날 보는 그들의 눈에는, 넌 하류인생이야, 이런 데 올 부류가 아니야라고 씌어있거든”
아마도 최 감독은 최민수와 이혜영이라는 ‘좋은 배우’를 통해서 ‘웰메이드 필름’을 만들어보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여러 장면에서 최 감독의 연출은 신선했습니다. 특히 성임(이혜영)을 차 밖으로 밀쳐내고 홀로 죽음의 길에 이르는 길우(최민수)의 마지막 장면은 마지막 대사와 함께 꽤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당신, 나하고 인생을 두고 도박하기엔 아직 절망하지 않았어,,,”
얼핏 홍콩 느와르 ‘천장지구’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는 합니다만 이 마지막 장면은 제법 잘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 감독은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몇몇 비평가들로부터 “참신한 연출”이라거나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들은 게 고작입니다. 흥행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결국 최 감독은 그의 두 번째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는 이 영화 출연 이후 최민수는 ‘미스터 맘마’(1991년, 강우석 감독) ‘결혼 이야기’(1992년, 김의석 감독)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이혜영 역시 ‘개벽’(1991년, 임권택 감독) ‘화엄경’(1993년, 장선우 감독)등의 영화로 해외영화제 진출의 기쁨을 누렸다는 겁니다.
PS. 이 지면을 빌어 얼마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2세 배우‘ 고(故) 김주혁이 하늘나라에서 편안한 안식에 들었기를 바랍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최민수는 이 영화 출연 이후 '미스터 맘마'와 '결혼 이야기' 등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개성넘친 여배우로 관록을 쌓아온 이혜영.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의 연출과 제작을 겸했던 최성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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