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진부하게 들리면서도 사실이잖아요. 영화도 사람의 생각과 정서에 각인되어서 그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꽃피우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흥행만을 목표로 하는 영화보다는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내 방식대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물론 나를 신뢰하는 투자자들이 있어서 보다 많은 사람에게 내 영화를 보여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요. 그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2011년 4월, 시네마테크부산 주최로 마련된 ‘배창호, 그 情의 세계’라는 주제의 특별전 개막행사에서 배창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관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8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한국의 스필버그’로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명성을 떨친 감독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성을 뒤로 하고 홀연히 ‘춥고 외로운’ 작가주의 영화로 방향을 틀어온 그의 영화인생 속내에는 진정성이 진하게 느껴졌지요.
그는 졸속 제작되어 관객들로부터 외면받던 한국영화를 ‘보고 싶은 영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었습니다. 만드는 영화마다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시나리오에는 투자자들이 줄을 섰고, 장르와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지요. 그저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영화든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영화세계가 달라졌습니다. ‘황진이’(1986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전까지 관객을 매료시키던 재미난 이야기와 할리우드 영화 못지 않은 속도감은 사라졌고, 오직 주인공의 인생을 묵직하게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점만 보였습니다. 그동안 여러차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보아왔던 기생 황진이는 온데간데 없고, 마치 희생과 사랑을 구현하는 구도자의 고행을 그린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의 영화는 이때부터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본질 중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그의 가치관이 영화에 투영되어 나타난 겁니다. 영화 ‘천국의 계단’(1991년)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영화들 중의 하나입니다.
'천국의 계단'의 여주인공 유미 역의 이아로(왼쪽). 당대 최고의 배우인 안성기(오른쪽 뒤편 흐릿한 모습)의 상대역으로 좋은 연기를 펼쳐보였다.
이 영화 역시 그의 페르소나(원래는 ‘가면‘이란 뜻의 그리스어이지만, 영화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분신이나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일컬음)인 안성기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80년대 한국영화의 위상을 끌어올린 이른바 ’최인호 사단‘의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작가 고(故)최인호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영화 집단을 ’최인호 사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감독으로는 이장호, 배창호, 곽지균 이명세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배우들로는 안성기 장미희 이미숙 강석우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성기의 상대역으로 낯선 신인 여배우 이아로가 캐스팅됐습니다. ‘최인호 사단’ 혹은 배창호 감독의 영화에 주인공을 신인으로 기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영화계의 관심이 집중됐지요. 이아로는 광고 모델 출신이었습니다만 그나마도 대중이 알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세간의 호기심 역시 비등했습니다. 그러나 시원한 이마에 오똑한 콧날, 무엇보다도 흡인력 강한 눈빛 연기를 통해 이아로는 ‘혹시나’ 하는 우려를 씻어냈습니다.
유미를 발굴하여 인기 배우로 끌어올리는 매니저 마카오 김 역의 안성기(오른쪽)와 콘티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배창호 감독(왼쪽).
세탁소집 딸 유미(이아로)는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는 대학생 명길(박찬환)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명길이 입대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유미는 홀로 남아 딸을 낳고, 명길은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실종됩니다.
고교 졸업후 유미는 우연히 매니저 마카오 김(안성기)에게 발탁되어 모델로 입문하고 배우로도 크게 성공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쁜 스케줄에 얽매이는 생활과 딸을 조카라고 속여야 하는 거짓된 삶에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한 신문기자(전무송)로부터 딸의 존재를 확인 취재하겠다는 압박을 받으면서 불안과 초조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익사사고로 딸이 죽게 되자 삶에 회의를 느낀 유미는 출연영화 ‘첫 사랑’의 개봉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자청, 자신의 신상에 관하여 하나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습니다. 그녀의 고백으로 흥행에 참패할 줄 알았던 영화 ‘첫 사랑’은 오히려 큰 성공을 거두고, 극장에서는 월남에서 실종됐던 명길이 휠체어에 앉아 감동과 회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영화가 끝난 후, 유미 역시 자신에게 배달된 장미꽃다발이 명길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유미는 전쟁에서 상처를 안고 돌아온 명길과 자신의 방황으로 빚어진 딸의 죽음에 대해 보상하려는 마음에서 명길과 함께 시골로 내려갑니다. 인기배우로서의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린 채,,,
유미(이아로)는 딸을 조카라고 속여야 하는 거짓된 삶에 지쳐간다.
미혼모 여배우의 순정이 영화의 내용이지만 가부장제적 문화 속에 갇힌 여성의 억압된 욕망과 그늘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제시하려는 게 게 배 감독의 연출의도였습니다. 연출의도는 상당부분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신인으로써 버거운 여주인공 유미 역을 맡은 이아로 역시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지요. 흥행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영화 속의 유미 캐릭터와 이아로의 성장과정이 흡사하다는 점은 오래도록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영동여고를 졸업(1988년)한 후 대학입시에 실패한 것과 우연히 만난 대학생과의 연애스토리, 그리고 광고모델로 시작해서 영화배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그랬던 겁니다. 당시 그녀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가 너무 대학 선호사상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면서 “어느 분야에서든 자기의 재능을 발휘해서 인정 받는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인생은 아이러니합니다.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연기자로 인생의 승부를 걸어보겠다던 그녀는 ‘천국의 계단’ 이후 스크린에서는 더 이상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간혹 몇몇 TV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는 했습니다만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연기활동을 완전히 그만 두었습니다. 어찌보면 이 또한 영화 ‘천국의 계단’의 여주인공 유미의 삶을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기는 ‘천국의 계단’을 연출한 배창호 감독도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에 적응하는 게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니다”는 얘기를 후배들에게 종종 합니다. 영화감독으로, 혹은 영화배우로 살아가려는 꿈을 포기하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삶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거지요. ‘천국의 계단’으로 가는 길은 ‘사랑’으로 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천국의 계단' 촬영 당시 미혼모 역할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던 여주인공 이아로.
딸의 익사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와 오열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배창호 감독(오른쪽)의 영화에는 거의 대부분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창호 페르소나' 안성기(가운데).
'천국의 계단'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유미(이아로)의 딸 익사사고 후의 병원 장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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