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키드 캅’(1993년)은 이준익 감독의 연출 데뷔작입니다. 이 감독은 잘 알려진 것처럼 1230만명의 관객 동원기록을 남긴 ‘왕의 남자’(2005년)를 비롯해서 ‘황산벌’(2003년) ‘라디오 스타’(2006년) ‘님은 먼 곳에’(2008년) ‘평양성’(2011년) ‘소원’(2013년) ‘사도’(2015년) ‘동주’(2016년) ‘박열’(2017년) 등 제목만 들어도 쟁쟁한 화제작들을 쉼 없이 찍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대표 감독’ 중의 한 명이지요. 하지만 ‘키드 캅’을 감독하겠다던 시절에 그의 원래 본업은 영화 광고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종 업계에 종사하던 관계자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당시에도 영화에 대한 그의 집념과 열정을 잘 아는 측근들은 적극적으로 ‘이준익 감독 데뷔’를 지지했습니다만, 이 감독 스스로 “영화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 적도 없고, 다른 감독의 촬영현장도 제대로 가본 적이 없는 상태”를 인정했던 터라 많은 이들의 ‘반신반의’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감독은 영화연출을 학문적으로 이수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학비가 없어 중퇴한 게 그의 학력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결핍이 성장을 낳는다는 속설을 그는 온 몸으로 실증해 보였습니다. 비록 생계를 위해 시작한 잡지사(주부생활)의 디자인 아르바이트였지만 전력을 다했습니다. 임시직 디자이너라는 자리가 무색할 만큼 하룻밤에 300컷 이상의 삽화를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은 훗날 감독이 되어 영화 촬영을 위해 준비하는 콘티 작업의 ‘연습’과도 같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미친 듯이 잡지의 삽화를 그리던 당시 그의 주변에는 지금의 영화평론가 정성일, 대중문화평론가 하재봉, 영화감독 이세룡 등이 역시 잡지사에서 기자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영화에 대한 자극을 받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그가 얼마 후 서울극장 선전부장 겸 도안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도 이세룡 감독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서울극장의 선전부장 자리를 맡아, 신문광고 동판을 만들고 신문에 광고를 배정했다. 개봉영화의 포스터도 만들었다. 포스터 시안을 만들면서 카피 뽑아내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비로소 영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알게 됐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데뷔작 ‘키드 캅’을 만들게 됐다.” <‘나는 영화가 좋다’(이창세, 지식의 숲)에서>
할리우드 영화 '나홀로 집에'와 유사한 컨셉으로 만들어진 '키드 캅'에는 5명의 아역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왼쪽부터 김민정(은수), 이재석(준호), 정태우(승우), 고규필(상훈), 장영철(형태).
할리우드 영화 ‘나홀로 집에’처럼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감독을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울 극장의 고(故) 곽정환 사장의 앞에서 시나리오도 없이 3시간동안 마치 모노드라마를 하듯 온갖 의태어와 의성어를 써 가면서 영화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혼신을 다한 그의 열연(?)에 감복한 곽 사장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자고 했습니다. “돈은 내가 대고, 영화는 네가 만든다”
그런데, 이 계약은 영화 연출을 맡아줄 감독을 찾지 못해 무산됐습니다. 영화화 프로젝트가 흐지부지되는가 싶던 무렵, 가전제품 사업 확장을 위해 영화투자업에 뛰어든 대기업(대우)에서 투자의향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감독도 직접 해보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때서야 이 감독은 사무실 근처 명동에서 촬영중인 영화 ‘그대 안의 블루’(1993년, 이현승 감독)의 현장을 몇 차례 견학했습니다. 낮 촬영은 어떻게 하고, 조명기가 많이 필요한 밤촬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야말로 주마간산 격으로 눈에 익혔습니다.
용감하게 시작해서 한 달 동안 열심히 찍었습니다. 이렇게해서 ‘키드 캅’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린이 5명이 주인공입니다. 당시는 천진한 아역 배우들이었습니다만 훗날 이들은 성인배우로 잘 성장하게 됩니다.
'키드 캅'의 개봉 당시 메인 포스터.
준호(이재석)는 은수(김민정)의 생일선물을 준비하지만 형태(장영철)에게 선수를 빼앗깁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 은수가 좋아하는 가수(잼)의 사인을 받아주기 위해 사인회가 열리는 백화점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형태와 승우(정태우) 상훈(고규필) 등도 이미 은수와 함께 백화점에 와 있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어 사인받기 어려워지자 이들은 아예 주차장으로 가서 잼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그러나 경비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백화점 폐장시간이 임박한 순간, 경보장치를 부수는 도둑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도둑들이 경보장치를 고장낸 후 경비원들을 제압하고 중앙조정실을 장악하자 준호와 은수, 형태, 승우, 상훈 등 어린이 5명은 직접 도둑들을 소탕하기 위해 힘을 합쳐 싸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준호 역의 이재석은 당시 인기있던 MBC TV드라마 ‘무동이네 집’(1991년)에서 ‘무동이’로 제법 얼굴을 알린 아역배우였습니다. 은수 역의 김민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야무지고 예쁜 배우지요. 또 정태우도 진즉 ‘될 성 부른 떡 잎’ 같은 아역배우였습니다.
도둑 두목 역할을 맡은 독고영재는 당시 청룡영화상에서 ‘하얀전쟁’(1992년)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성가를 올리던 때였는데, 이 감독의 출연 요청에 흔쾌히 ‘얼라들 영화’의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도둑 일당으로 나오는 장세진도 독고영재의 뜻에 동참했구요.
서울 중계동에 있는 건영옴니백화점의 전폭적인 협조(백화점 건물이 이름도 선명하게 화면에 클로즈업으로 나옵니다)로 영업이 끝나고 난 시간부터 아침 영업을 준비하는 새벽까지의 7~8시간 동안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비어있는 공간에서의 촬영이어서, 영화 속 인기가수로 등장하는 그룹 잼의 사인회 장면도 순조롭게 찍을 수 있었습니다. 10대 청소년 엑스트라들을 동원해서 촬영한 잼 사인회 장면은, 처음 영화를 연출하는 초보감독 같지 않게 매우 원숙(?)하게 찍었습니다.
백화점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도둑들을 물리치는 ‘엎치락뒤치락’ 액션도 이 감독이 영화촬영에 앞서 밝혔던 것처럼 할리우드영화 ‘나홀로 집에’와 비슷한 스타일로 찍었습니다. 심지어는 ‘나홀로 집에’에서 매컬리 컬킨이 보여준 폭력적인 장면도 ‘키드 캅’에서 유사하게 등장합니다.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프라이팬이나 아령, 야구방망이 같은 도구로 어른들의 머리를 내리쳐 기절시키는 장면 등을 두고서는, “성인끼리 치고받아도 충분히 폭력적인 어린이 영화”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습니다.
또 어린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인데,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승우(정태우)가 확성기로 “은수와 재호가 사랑에 빠졌대요”라며 소리치자 많은 군중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두 주인공 은수와 재호가 손을 맞잡고 카메라를 향해 “우리 사랑 이렇게 시작됐어요!”라는 자막을 넣어 스톱모션으로 끝나는 장면은 다소 과장된 묘사라는 지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키드 캅'의 흥행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흥행요소를 잘 비벼 넣었지만, 이미 개봉 전부터 같은 날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 '주라기 공원'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견되던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거지요. 당시 이 감독은 흥행 실패의 책임을 지려는 듯 “다시는 감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그는 '황산벌'을 만들어 보란 듯이 감독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키드 캅'의 도둑 두목 역할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출연한 독고영재(가운데)와 도둑 일당 역할을 맡은 배우들. 왼쪽부터 김동호, 송소이, 장세진, 김상익.
'키드 캅'때 은수역을 맡았던 아역배우 김민정은 훗날 야무지고 예쁜 배우로 성장했다. 오른쪽은 2013년 tvN 드라마 '제 3병원'에 여의사로 출연했을 때의 모습.
'포토북 제작발표회'(2012년)에서 포즈를 취하는 김민정.
tvN드라마 '제 3병원' 제작발표회 무대에 선 김민정.
무더운 어느 여름날, 서울 청담동의 갤러리 런칭쇼에 참석한 김민정.
'키드 캅' 출연으로부터 23년이 지난 뒤, 영화 '터널'(2016년)의 시사회에 참석한 정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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