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한국영화계에는 의미있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암흑기를 벗어나기 했지만 검열 등으로 여전히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던 상황에서 90년대초부터 선보였던 기획영화 등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이 봇물 터지듯 세상에 나온 겁니다.비리 경찰을 풍자한 코미디영화 ‘투 캅스’(강우석 감독)를 비롯해 특수효과를 도입한 블록버스터급 ‘구미호’(박헌수 감독), 분단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한 ‘태백산맥’(임권택 감독), 포스트 모더니즘 영화로 분류됐던 ‘너에게 나를 보낸다’(장선우 감독), 에로틱 스릴러를 표방한 ‘장미의 나날’(곽지균 감독)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와 관객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이러한 영화 중의 하나인 ‘세상 밖으로’(여균동 감독)도 역시 여러 가지로 신선한 감흥을 안겨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연출을 맡았던 여균동 감독이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되는 바람에 학교를 중퇴해야 했습니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마당극의 작가와 연출가로 활동했지요. 그런가하면 월간지 ‘마당’의 기자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사회사진 연구소’를 설립하여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사진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겔미학입문’이나 ‘리얼리즘 역사와 이론’ 등의 번역서를 내며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이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계로 진출해서는 박광수 감독의 조감독으로 ‘그들도 우리처럼’과 ‘베를린 리포트’의 작업에 참여했지요. 뿐만 아니라 장선우 감독의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주인공인 은행원 역할을 맡아 배우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다재다능한 그의 영화감독 데뷔작인 ‘세상 밖으로’의 영화화 소식이 알려졌을 때부터 영화계 안팎의 시선을 모았습니다.
'세상 밖으로'의 극장용 포스터 촬영을 위해 얼룩줄 무늬옷으로 차려입고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는 이경영(왼쪽) 문성근(오른쪽).
그 다음으로는 한국영화에서는 오랜만에 등장한 ‘로드 무비’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삼포가는 길’(1975년, 이만희 감독)이나 ‘고래사냥’(1984년, 배창호 감독) 같은 영화가 있었지요. 그러니까 10년만에 로드 무비가 나온 셈이었습니다. 로드 무비는 공간을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형식인지라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부담’을 갖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템포가 쳐지거나 이야기의 전개가 느슨하면 보는 이들에게 지루함을 주기 때문이지요. 두 탈옥수와 한 명의 여성인질이 펼쳐가는 ‘세상 밖으로’는 시종일관 숨돌릴 틈 없는 상황을 만들면서, 세 인물의 톡툭 튀는 캐릭터 묘사와 유머 넘친 대사 등으로 관객들에게 ‘영화적 재미’를 안겨주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에는 깨알 까메오의 등장도 한 몫 했습니다. 첫 장면에서 교도소장으로 등장하는 명계남을 시작으로 도로 휴게소 여주인으로 나오는 양희경, 그런가하면 길거리에서 마주친 양아치 패거리들로는 권해효 박광정이 우정출연했습니다. 여균동 감독 자신도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의 탈옥뉴스를 전하는 TV속의 앵커로 잠깐 ‘연기’를 펼쳐보였습니다.
로드 무비 형식이어서 촬영 또한 길거리에서의 오픈 촬영이 많았다. 자동차 정비 문제로 길가에 서 있는 차량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촬영을 진행 중이다.
미필적 살인죄로 복역중인 암흑가 출신 양마동(문성근)은 조용한 평화주의자입니다. 여성 취향의 호모 좀도둑 지찬식(이경영)은 의외로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교도소에서 수감생활하던 이들은 어느날 교도소 이감을 명령받고 호송버스에 오릅니다.그런데 호송도중 버스가 사고로 전복되자, 얼떨결에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버스 밖으로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거친 세계에서 살아왔어도 바보스러울만치 착한 심성을 지닌 마동과 찬식은 다른 죄수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갑니다. 목적지도 없이 길을 걸어가던 중 자동차 정비를 위해 서있던 차량을 만나는데, 두 사람은 차량에 타고 있던 혜영(심혜진)을 따라 함께 떠나게 됩니다. 이 여정 속에서 혜영 역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신의 몸을 팔아 살아야 했던 밑바닥 인생이었음을 고백하고, 세 사람은 더욱 연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곧 TV뉴스를 통해 차량탈취하고 인질을 납치한 탈주범으로 보도됩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세 사람의 ‘세상 밖으로’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휴게소 자판기의 고장을 나몰라라 하는 여주인의 횡포에 자판기를 때려부숴 500원짜리 동전 한 개를 가져갔을 뿐인데, 뉴스에는 탈주범들의 폭력사건으로 보도됩니다. 은행 강도를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엉겁결에 올라탄 차가 현금수송차여서, 이들은 은행강도 탈주범으로까지 몰립니다. 숨가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경찰과의 쫓고 쫓기는 여정이 계속됩니다. 이렇게 함께 며칠간 지내면서 마동과 혜영은 서로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결국 세 사람은 북쪽 휴전선 근처의 마을까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주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입니다. 여관방에서 함께 잠을 자고난 뒤, 마동과 찬식은 혜영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섭니다. 휴전선 철책 앞에서 더 이상 올라갈 데 없음을 알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희미하게 웃습니다. 곧이어 군경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두 사람 옆으로는 휴전선 철책만이 보일 뿐입니다.
두 탈옥수(이경영, 문성근)과 함께 일탈의 여정에 나선 혜영(심혜진, 가운데).
‘세상 밖으로’는 여균동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로드 무비 형식의 시나리오는 이야기도 기발하고, 캐릭터들 또한 독특했습니다. 여 감독의 데뷔작이었습니다만 이경영, 문성근, 심혜진이라는 당시의 걸출한 배우들이 기꺼이 출연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나리오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시나리오가 매력적이었던 겁니다. 여기에다 여 감독의 연출 또한 초보감독 같지 않게 능숙했습니다. 아니, 능숙했다기보다는 정형화되지 않은 연출방식이었다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특히 영화 속에서 밀레의 그림(이삭 줍는 여인들)을 세 주인공에게 이입시켜 패러디한 장면이라거나 미군 유조차량을 탈취하는 의도적 연출, 또 영화 내내 세 주인공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얘기를 하면서 노골적으로 패러디를 드러내는 등 블랙코미디의 장르적 특성을 잘 살려냈습니다.
당시 인기를 구가하던 록가수 김종서가 영화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점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김종서는 4개월여를 영화음악 작업에 매달렸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습니다. 영화의 주제가, 펑키 록스타일의 ‘세상 밖으로’를 직접 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영화와 관계없이 지금까지도 노래방에서 애창되고 있을 정도로 히트했지요.
관객들도 당연히 ‘세상 밖으로’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서울에서만 30만명 가까운 관객들이 봤으니, 90년대 흥행지표로 보면 대박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균동 감독이 그해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는데요, 재미있는 사실은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신인연기상도 수상했다는 점입니다. 오죽하면 '세상 밖으로'를 함께 작업한 문성근이 여 감독을 “배우보다 더 배우 같은 감독”이라고 했겠습니까.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촬영현장을 찾은 취재진에게 포즈를 취해보이는 이경영과 심혜진.
촬영현장에서 화이팅을 외치는 문성근, 여균동감독, 이경영(왼쪽에서부터).
불우한 환경 속에서 몸을 팔아 먹고 살아야 했던 혜영 역의 심혜진.
'세상 밖으로'의 영화음악 감독을 맡았던 록가수 김종서. 주제가 '세상 밖으로'를 펑키 록 스타일로 직접 불렀다.
촬영현장에서 촬영을 준비 중인 이경영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다.
김종서가 영화주제가 '세상 밖으로'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세상 밖으로'의 제작발표회. 왼족에서부터 여균동 감독, 이경영, 심혜진,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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