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많은 죽음이 있습니다만 고(故) 최진실의 죽음만큼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린 죽음도 흔치 않을 겁니다.
2008년 10월 2일 아침, 그녀의 죽음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쉽게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활짝 웃는 모습으로 TV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에 나와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 국민요정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죠. 무엇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매스 미디어의 온갖 억측과 세간의 입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갔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비단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서도 연일 집중적으로 보도됐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인터넷 루머가 한국의 톱스타를 자살로 이끌었다”는 제하의 기사로 대서특필했으며, ‘타임’지도 “스타의 자살에 한국사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특집기사를 실었습니다. AP와 UPI통신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권의 언론들은 이 사건과 연관지어 한류의 후폭풍을 분석하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경찰의 수사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인터넷 루머 유포자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일단락된 후에도 대중의 충격과 상실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장례식과 49재를 치르는 유가족과 연예계 동료들의 슬픔을 바라보는 대중 또한 마치 친자매나 누이를 떠나보내는 듯한 아픔과 연민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녀는 꼭 40년을 살았습니다. 1968년 12월 24일생이었으니까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전자제품 TV광고로 벼락스타가 된 스무살 이후, 수많은 영화와 TV드라마를 통해 국민요정으로 떠오르기까지의 삶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환경적으로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포장마차 장사를 해야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비롯해 자신의 가난한 시절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가난을 통해 오기와 끈기가 생겼다고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녀를 향한 대중의 호감과 지지는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특유의 귀여움과 친근한 이미지를 앞세워 영화 ‘남부군’(1990년, 정지영 감독)을 비롯해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년, 이명세 감독), ‘미스터 맘마’(1993년, 강우석 감독), ‘편지’(1997년, 이정국 감독) 등을 통해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신세대 여주인공의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TV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광고에서처럼 톡톡 튀고, 자기주장이 분명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고도 안정된 연기력으로 그려냈지요. 기존의 TV드라마와는 다른,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의 효시라 불리는 ‘질투’(1992년)를 비롯해 ‘별은 내 가슴에’(1997년) ‘그대 그리고 나’(1997년) 등 드라마의 폭발적인 시청율을 이끈 주역으로 ‘최진실 신드롬’을 낳았습니다.
1997년에 PC통신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한 인물’ 설문조사에서 최진실은 연예인 1위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조사에서 정치인 1위는 김영삼, 경제인 1위는 정주영, 스포츠인 1위는 박찬호였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되어야 할 결혼을 기점으로 오히려 굴곡진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야구선수 고(故) 조성민과 결혼(2000년)해 1남1녀를 두었으나 오래지 않아(2004년) 이혼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연기활동의 중단과 재개를 두어 차례 반복했으며, 자녀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성본변경’을 신청해 대법원의 허가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여성계의 오랜 숙원인 호주제가 막 폐지된 시점이어서 진보적 여성들로부터는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혼은 커다란 상처로 남았지만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의 의욕과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생전의 그녀는 이 때의 일을 두고 “연기자로 재기할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두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용기와 희망이 솟았다”고 고백하곤 했지요. 특히 이 무렵 출연한 TV드라마 ‘장밋빛 인생’(2005년)은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한’ 그녀의 생명력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었습니다. 시청율이 47%에 이르는 국민 드라마로 회자되면서, 그녀의 고난은 끝이 나는가 싶었습니다. 이혼의 상처를 추스르면서 갖게 된 신앙의 고백에는 당시 그녀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아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어요. ‘제가 무슨 큰 죄를 지었나요?’ 그런데 어느날 원망의 기도가 감사의 기도로 바뀌더라구요. 이 고통을 남편을 통해 주시지 않고 만일 아이들을 통해 주셨더라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다시 ‘하나님, 제손을 잡아주실 거죠?’ 하고 매달릴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녀에게 찾아온 안정과 행복은 친구 정선희의 남편 안재환의 자살사건과 함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안재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 줬다는 ‘최진실 사채 괴담’이 떠돌게 된 겁니다. 실체 없는 소문은 익명의 인터넷을 거쳐 증권가 ‘찌라시’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가뜩이나 슬픔에 빠진 친구(정선희)를 마땅히 위로하지 못함에 안타까웠던 그녀에겐 참으로 견디기 힘든 ‘소문의 폭력’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극도의 신경쇠약 상태에 빠졌습니다. 소문유포자가 경찰에 입건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인터넷 악플들로 그녀의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지인들과의 전화통화에서 그녀는 “소문유포자가 잡혔으니 진실이 밝혀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를 악덕사채업자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 너무나 떨리고 무서워. 죽을 거 같아”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유의 귀여움과 친근한 이미지를 앞세워 90년대 영화, 방송, 광고 전 분야를 아우르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던 그녀.
충격적인 그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상실의 의미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녀가 떠난 다음에야 우리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았다”는 어느 팬의 넋두리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의 생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데뷔시절부터 20년 동안 가까이 지내온 주철환 전 MBC PD는 ‘PD저널’에 기고한 조사(弔辭)에서 그녀를 캔디로 비유해 슬픔을 토해냈습니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자 울긴 왜 울어/ 은하계에 테리우스 차고 넘쳐도/ 캔디는 너 하나로 괜찮았는데/ 온 놈이 온 말을 나불거려도/ 세상에 진실은 하나뿐인데/ 너 혼자 힘들었던 사십 년/ 함께 해도 모질었던 이십 년,,,”
그녀를 귀엽고 아름다운 신부로 등장시켜 ‘최진실 신드롬’을 가속화시켰던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이명세 감독은 “바쁘다는 이유로 늘 마음으로만 박수를 보내온 게 후회된다. 다음 부산영화제에서는 꼭 소주 한잔 하자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영정 앞에서 지키게 됐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또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으로 그녀를 연기자로 데뷔시켰던 이병진 전 MBC PD도 “그녀의 밝은 얼굴 뒤에 감춰져 있는 고뇌와 아픔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 미안할 뿐”이라면서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했으며, 스타답지 않고 털털했던 그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애도했습니다. <'나는 영화가 좋다'(이창세, 지식의 숲)에서>
스타답지 않고 털털한, 그리고 솔직하고 당당했던 그녀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8년 11월의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주최측은 그녀에게 '명예 인기스타상'을 헌정했다.
생전 그녀의 꿈은 "김혜자 선생님과 고두심 선생님 같은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90년대 그녀의 인기도는 청룡영화상에서 무려 8회나 인기스타상을 수상한 데서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함께 작업한 박중훈(왼쪽) 이명세 감독(앞쪽).
90년대를 관통하면서 그녀처럼 영화, 방송, 광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시대의 아이콘’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대중의 환호를 받았는가를 입증하는 사례가 바로 청룡영화상에서 시상하는 인기스타상을 무려 8회나 수상(1990년~1998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2008년 11월의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는 ‘명예 인기스타상’이 그녀의 영전에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시상자로 나선 안성기는 “훌륭한 배우이자 후배, 늘 솔직하고 밝은 모습의 그녀를 떠나 보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서 “20여년 함께 했던 그녀와의 기억과 작품들은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추모의 변을 밝혔습니다.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나간 지도 어느덧 9년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매년 10월이 돌아오면, 그녀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양수리 갑산공원에는 추모객의 발길이 심심치 않게 이어집니다. 그녀의 묘역에 꽃 한 송이 두고 가는 그들은 혹시 생전에 그녀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을까요?
“저는요, 김혜자 선생님이나 고두심 선생님처럼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에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장례식에서 누나(최진실)의 영정을 들고 오열하던 동생 최진영. 누나를 떠나 보낸 슬픔과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는 1년5개월여 후, 누나의 뒤를 이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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