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칸에서 ‘굿 뉴스’가 날아들었습니다. 영화 ‘올드 보이’(2003년, 박찬욱 감독)가 칸느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었지요. 국제 영화제에서의 수상을 두고 1, 2등을 따지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만 심사위원대상은 2등에 해당하는 상이어서 당시 한국 영화계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흔히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이라 하면 영화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평가로 인식되어온 게 사실인데, ‘올드 보이’의 경우에는 이미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터라 일반 대중의 박수와 환호도 상당했습니다.
‘15년간의 감금과 5일간의 추적’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지닌 ‘올드 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탁월한 연출솜씨가 일품이었습다만 이를 ‘아트영화의 상업적 성공‘으로 이끈 일등공신은 단연 최민식이었습니다. 2002년에도 칸느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취화선‘(임권태 감독)을 통해 얼굴을 알린 적이 적이 있었지만 ’올드 보이‘에서의 열연은, 심사위원대상 수상과 더불어 최민식에게 말그대로 ’세계적인 배우로써의 존재감‘을 한껏 떨칠 수 있는 기회를 안겨 주었습니다.
존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15년간 사설 감방에 갇혀 살아야 했던 오대수라는 인물을 소름돋는 연기로 펼쳐낸 최민식은 당시 칸느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엄지를 치켜 세우며 “최고의 연기,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실제로 최민식은 그해 ‘올드 보이’로 국내외에서 열리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독식했습니다.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연기하는 배두들과의 하모니, 호흡을 중요하게 여기는 최민식. 그와 함깨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그의 리더십과 배려심에 종종 감동을 받는다.
최민식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노라면, 누구라도 쉽게 그의 아우라에 빠져들게 됩니다. 카리스마와는 좀 다른 느낌인데요, 이를테면 그는 영화 속에서 자기 혼자만 돋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등장하는 배우들과의 하모니, 호흡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최민식이 출연하는 영화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은 이구동성으로 “최민식 선배의 연기 에너지를 받았다”거나 ”최민식 선배의 배려 덕분에 편안한 상태에서 씩씩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는 식의 촬영 후일담을 내놓습니다. 얼마전 개봉된 영화 ’침묵‘(2017년, 정지우 감독)의 시사회에서도 최민식의 약혼녀로 등장하는 이하늬를 비롯해 딸로 등장하는 이수정, 변호사역을 맡았던 박신혜 등이 모두 비슷한 소회를 밝히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지요.
2014년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루시'의 한국 개봉에 맞춰 뤽 베송 감독이 내한했을 때, 함께 무대 인사에 나선 최민식.
영화 '루시'의 한국 개봉에 맞춰 뤽 베송 감독이 내한했을 때, 무대 인사에 나선 최민식이 수많은 팬들에 둘러 쌓인 모습.
최민식은 어느 인터뷰에서 배우라는 직업을 무당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배우는 무당이고, 배역은 귀신”이라는 겁니다.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듯 그 캐릭터를 불러내는 게 연기라는 설명이지요. 매우 일리있는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인물로 변해야 하는데,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 인물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따라서 그 인물과 흡사한 캐릭터를 표현하려면 배우 스스로가 그 인물로 빙의된 듯한 자기최면에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설까요? 최민식의 필모그래피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그 영화 속의 인물과 동화되었던, 최민식의 표현으로 얘기하면 그 캐릭터를 불러내 연기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근래의 출연작을 떠오르는대로 꼽아보면 ‘특별시민’(2017년,박인제 감독)의 변종구 시장, ‘대호’(2015년, 박훈정 감독)의 호랑이 사냥꾼 천만덕, ‘명량’(2014년,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장군, ‘신세계“(2013년, 박훈정 감독)의 형사 강과장,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2012년, 윤종빈 감독)에서 비리 세관원 최익현 역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마치 최민식이 원래부터 영화 속의 그 인물이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속아 넘어갔습니다.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듯 작품 속의 캐릭터를 불러내는 게 연기라면서 배우를 무당에 비유하는 최민식.
최민식은 동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입니다. 20대에는 많은 연극 무대에 섰지요. 그러다가 1989년에 영화 ‘구로 아리랑’(박종원 감독)에 출연하면서 영화와 TV드라마에서의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이름 석자를 온 국민에게 각인시킨 건 KBS TV드라마 ‘야망의 세월’(1990년)에서의 암흑가 건달 ‘꾸숑’ 역이었습니다. ‘꾸숑’이란 돼지라는 뜻의 불어인데, 당시 ’야망의 세월‘의 시청율 고공행진과 맞물려 ’꾸숑‘의 인기도 덩달아 치솟았습니다. 당시 그가 어느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었는지의 가늠은 CF출연료로 증명이 됐습니다. 연극 한 편 출연하면 3~4개월에 50만원 남짓 받았는데, ’꾸숑‘ 이후 최민식은 800만원의 CF 출연료를 받았습니다.
TV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대중적 인지도를 많이 끌어올린 최민식은 이후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년, 박종원 감독)과 MBC TV드라마 ‘서울의 달’의 출연으로 활동보폭을 넓혀갔습니다.
‘넘버 3’(1997년, 송능한 감독)를 시작으로 ‘조용한 가족’(1998년, 김지운 감독), ‘쉬리’(1999년, 강제규 감독), ‘해피엔드’(1999년, 정지우 감독), ‘파이란’(2001년, 송해성 감독) ‘취화선’(2002년, 임권택 감독), 그리고 ‘올드 보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출연작이 많아진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 영화에서 최민식은 모든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올드 보이’에 앞서 찍었던 ‘파이란’ 역시 그의 연기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3류 양아치 강재라는 역을 맡아 최민식은 홍콩배우 장백지와 멜로연기를 펼쳐냈습니다. 두 사람간에 직접적인 알콩달콩 멜로 장면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화의 후반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위장결혼한 아내(파이란)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편지를 방파제에 앉아 읽던 강재가 오열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명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영화 '파이란'의 메인 포스터 사진.
최민식에게는 잠깐의 시련도 있었습니다. 배우들의 고액 출연료 파문이라든가 대부업체 CF출연 문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 등으로 5년여간 활동을 쉬게 되었지요. 이중에서도 2006년 7월, ‘올드 보이’의 칸느 영화제 수상으로 정부로부터 받았던 옥관문화훈장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 중에 반납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문화주권을 스스로 짓밟는 나라의 훈장은 가치가 없어서 반납한다”고 했지요. 뿐만 아니라 “스크린쿼터가 없으면 ‘올드 보이’도 없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2005년, 박찬욱 감독) 이후, ‘악마를 보았다’(2010년, 김지운 감독)를 다시 찍을 때까지 자의반 타의 반 ‘휴지기’를 가져야 했습니다.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최민식.
하지만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온 최민식은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뤽 베송 감독의 출연 요청으로 할리우드영화 ‘루시’에 출연하기도 했지요. ‘루시‘의 한국 개봉때는 내한한 뤽 베송 감독과 여주인공 스칼렛 요한슨과 함께 무대에 올라 카메라 플래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최민식의 전성시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2001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영화 '파이란'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최민식.
배우의 고액 출연료 파문,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과 옥관문화훈장 반납, 대부업체 CF 출연 등의 소동도 겪었지만,
최민식은 여전히 이 시대 최고의 배우로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영화 '넘버 3'의 촬영현장. 동국대 연극영화과 1년 후배인 한석규와 함께 취해보인 익살스런 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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