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동등의 기치 아래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확장하고 여성의 자아를 강조하는 주제로 만들어지는 영화를 흔히 ‘페미니즘 영화’(Feminism film)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피해를 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둔 영화도 있고, 독립적인 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들도 있습니다. 이 컬럼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성폭행을 방어하려다가 성폭행범의 혀를 물어뜯어 과잉방어죄로 기소된 여성의 사건을 영화화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년, 김유진 감독)는 전자에 속하는 영화였습니다. 역시 비슷한 내용을 다루었던 할리우드 영화 ‘피고인’(1988년, 조나단 캐플란 감독)도 같은 범주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후자의 범주로 보면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자아성을 강요당해온 흑인 여성의 저항과 승리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칼라 퍼플’(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나 예쁘지 않은 외모와 수줍은 성격을 지닌 여주인공이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과정을 그린 ’내 책상 위의 천사‘(1990년, 제인 캠피온 감독) 같은 영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려는 ‘그대 안의 블루’(1992년, 이현승 감독)가 바로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대 안의 블루'에서 일과 사랑의 양립을 꿈꾸는 여주인공 유림 역을 맡은 강수연.
전문 디스플레이어 호석(안성기)은 백주대로에서 웨딩드레스 밑단을 싹둑 잘라버리는 유림(강수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사랑을 버린 유림의 용기에 감탄한 호석은 자신의 작업실로 그녀를 데려와 옷을 빌려주기까지 합니다. 일과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고 싶다는 유림은 옛 연인을 찾아 부산으로 갑니다.
이 인연을 계기로 호석과 유림은 디스플레이 일을 함께 하는 동료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삶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로 자주 충돌합니다. 호석은 유림의 숨겨진 재능과 열정을 감지합니다. 그녀가 전문 디스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호석은 “여성이 일을 하려면 사랑을 버려야한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호석과 함께 일을 하는 동안 전문 디스플레이어로 입지를 다진 유림은 사랑을 선택해 떠납니다. 그 무렵 호석 역시 자신의 일에 대한 주위의 질시와 오해에 좌절하여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결혼생활에 안주하여 지내던 유림은 어느날, 호석으로부터 자신의 일하는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과 가정이라는 상반된 가치관으로 혼란스러워하던 유림은 이를 계기로 자신에게 다시한번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호석을 찾아 이탈리아로 간 유림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확인합니다. 둘 사이에 있었던 모든 감정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섹스에 탐닉하는 두 사람.
그리고 유림은 호석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에 눈을 뜬 자신을 발견하고, 로맨틱한 애인이자 현실의 남편도 떠나기로 합니다. 영화는 서울로 돌아온 유림이 남편과 이혼하고 즐겁게 일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일을 위해서는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호석(안성기)의 주장에 둘 다 이루겠다는 꿈을 피력하는 유림(강수연).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페미니즘 영화의 ‘구색’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 기획과 촬영 때부터 마케팅 수단으로서 널리 사용된 ‘페미니즘 영화’라는 카피는 영화 개봉과 함께 진보적인 여성 비평가들과 관객들로부터 ‘어설픈 페미니즘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피해의식이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리만족을 주는데 그쳤을 뿐,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는 주장이었지요.
또 여주인공 유림의 캐릭터가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일을 하는 과정, 또 일의 성공 등이 모두 남자 주인공 호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여주인공은 늘 사랑 타령만 할 뿐, 주체적으로 움직이질 못한다는 거지요. 일과 사랑의 양립을 꿈꾸다가 결국은 결혼생활에 안주했지만 자신의 일하는 과거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이탈리아로 찾아가 ‘느닷없는’ 섹스를 통해 자아를 찾게 된다는 설정 등을 모두 수동적이라고 본 것이었습니다.
당시 몇몇 신문에서도 “그대 안의 블루’의 페미니즘 영화와 관련한 논쟁 기사를 다루었습니다. “이 영화가 여성문제를 일과 사랑이라는 이분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남성이 이해하는 여성문제의 관념성”이라거나 “사랑을 위해 일을 버렸다가 다시 일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양자택일식 문제 제기는 산뜻할 지는 몰라도 대단히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여성계의 비판적인 시각이 보도되어 눈길을 끌었지요.
반면에 여성문제를 영화로 만들어내겠다는 감독의 연출의도에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 영화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되어온 여성상에서 탈피한,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점만으로도 성공”이라며 감독의 손을 들어주었지요. 실제로 ‘그대 안의 블루’는 영화적인 완성도에 있어서 제법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현승 감독의 데뷔작이었는데, 미대(홍익대)를 나온 감독의 영화답게 색감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보아온 그 어느 영화보다도 감각적인 영상미를 과시했습니다. 영화 제목에서 느껴지듯 ‘블루‘는 우울함과 쓸쓸함으로, 영화 전체에서 상당한 비중으로 채색되어 펼쳐졌습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 냉소주의자인 호석(안성기)의 기본 톤이 ’블루’였습니다. 호석의 작업실을 비롯해 호석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에서도 푸른 색감으로 차가운 느낌을 강조했지요. 물론 이후 호석과 유림의 관계가 발전되어감에 따라 노란색 혹은 붉은 색감의 변화로 따뜻한 느낌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이현승 감독은 미대 출신 답게 영화 전체에서 감각적인 영상미를 과시했다. 블루 톤으로 채색된 작업실에서 춤을 추는 유림(강수연)과 호석(안성기).
‘그대 안의 블루’에서는 국민배우 안성기의 재발견이 또한 커다란 수확이었습니다. 80년대 전체와 90년대 초반으로 넘어오면서 한국영화계는 “안성기가 나오는 영화와 안나오는 영화로 구분된다”고 할 정도로 안성기의 독무대였습니다. 이는 관객에게 안성기라는 이미지의 식상함도 가져다주게 되었지요. 어느 영화에 나와도 비슷비슷한 ‘착한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대 안의 블루’에서 안성기는 완전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도시적이고 냉소적인 바람둥이 디스플레이어의 이미지. 이런 캐릭터는 아마도 안성기로서도 처음 해보는 도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강수연과의 베드신 장면이 있었습니만, 실제로 베드신 연기 보다도 근육질 몸매의 노출 장면에서 안성기의 남성미가 물씬 풍겨났습니다. 그냥 벗은 몸이 아니라 런닝셔츠 차림이거나 상의를 입지 않은 멜빵 차림 등에서 안성기의 근육질 몸매는 단단하고 섹시했습니다. 게다가 ‘일을 위해서는 사랑을 버리라’는 호석의 캐릭터는 다분히 선동적이었지요.
‘그대 안의 블루’는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90년대 초반 ‘춘천가는 기차’로 혜성처럼 떠오른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의 영화음악은 어떤 의미에서 영화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소라와 듀엣으로 부른 주제가 ‘그대 안의 블루’는 지금까지도 모든 연인들의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지요. 당시 김현철은 이현승 감독으로부터 ‘그대 안의 블루’ 뿐 아니라 두 편 더 영화음악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고, 둘 사이에 계약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실제로 김현철은 ‘그대 안의 블루’의 영화음악 작업이후,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년)와 ‘시월애’(2000년) 등 이현승 감독의 영화에서 계속 영화음악을 맡았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그대 안의 블루'는 국민배우 안성기를 재발견할 수 있었던 영화다.
도회적이고 냉소적인 바람둥이 디스플레이어 호석(안성기)은 유림(강수연)에게 끊임없이 일을 위해서 사랑을 버릴 것을 주문한다.
호석(안성기)의 작업실에서 유림(강수연)과 춤 추는 장면을 촬영하기에 앞서 동선을 설명하는 맨 발의 이현승 감독(왼쪽)
'그대 안의 블루'는 화면의 색감을 강조하기 위해 유난히 세트 촬영이 많았다. 세트 촬영 중인 강수연과 이현승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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