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영화 ‘깜보’(이황림 감독)로 데뷔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40여 편의 영화 속에서 ‘천의 얼굴’로 살아온 박중훈은 ‘유쾌 상쾌 통쾌‘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는 배우입니다. 그의 출연 영화를 두고 ’박중훈표 코미디‘라고 명명할 만큼 코미디 영화에서의 그의 가치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한때는 한국 코미디 영화의 대명사로 일컬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당연히 그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가 잘 나가던(?) 90년대 중후반에는 기획 제작되는 한국영화의 70% 정도가 그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며 출연을 요청했을 정도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기가 그의 자기복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를 원하는 영화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복제되고 소비되었으니까요. 결국은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아, 대중으로 하여금 ‘박중훈표 코미디’에 식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영화배우로 살아오는 동안 영화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늘 노련하게 그 시기를 극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의 배우인생은 화려했고, 다이내믹했습니다.
그는 ‘첫번째’ 혹은 ‘1호’의 기록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물론 거저 주어진 게 아니고 그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왔습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무려 4세대에 걸쳐 그는 끊임없이 ‘히트작’에 출연해 왔습니다. ‘신성일’로 상징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배우들도 이런 기록을 갖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1980년대 후반, 청춘영화의 바람을 타고 그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년, 이규형 감독)와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1988년, 석래명 감독)의 성공을 통해 청춘스타로 우뚝 섰습니다. 당시 이들 영화에 대한 흥행지표는 훗날의 ‘엽기적인 그녀’나 ‘친구’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투캅스’(1993년, 강우석 감독) 시리즈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 이명세 감독)의 형사 캐릭터로 돌풍을 일으켰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년, 이명세 감독)나 ‘마누라 죽이기’(1994년, 강우석 감독)와 같은 코미디영화로 ‘박중훈표 코미디’의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흥행은 늘 성공했고,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박중훈표 코미디’에 대한 관객의 식상으로 잠지 침체기를 겪기도 했습니다만 이내 ‘황산벌’(2003년, 이준익 감독)의 계백장군으로, ‘라디오스타’(2006년, 이준익 감독)의 한물 간 록가수 최곤으로 나타나 관객의 사랑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해운대’(2009년, 윤제균 감독)를 통해서는 1150만명의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박중훈의 시대는 갔다”던 영화계의 시선도 ‘오판’으로 판명났습니다. 다시 그의 집 문 앞에는 기획단계의 영화 시나리오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대, 1966년생인 그의 나이가 40대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얼핏 더 이상 주인공 역할은 맡기 어려워보이던 그 때, 그는 또한번 보란 듯이 ‘내 깡패 같은 애인’(2010년, 김광식 감독)으로 건재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2013년, 박중훈은 연예계 이면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톱스타'로 감독 데뷔의 꿈을 이루었다.
박중훈의 필모그라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해외진출입니다. 요즘에야 한국의 배우들도 심심치 않게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고 있습니다만 1990년대엔 정말이지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절, 박중훈은 ‘아메리칸 드래곤’(198년, 랠프 헤매커 감독)으로 할리우드 진출 1호 배우로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미국 오라이온 스튜디오가 제작한 이 영화에서 그는 미국배우 마이클 빈과 주연을 맡았지요. 이 영화에서 그근 영어대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실력도 뽐냈습니다.
그의 영어 구사력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이런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은 미국 뉴욕대에서 ‘연극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덕분이지요. 훗날 선댄스영화제에 출품된 ‘인정사정 볼 거 없다’를 보고 광팬이 되어버린 조나단 드미 감독의 영화 ‘찰리의 진실’(2002년)에 네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한국인(이일상) 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이 단단히 한 몫 했습니다.
그가 ‘나의 성공 나의 신부’의 성공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중 돌연 일체의 연기활동을 중단하고 미국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영화계와 대중 모두 놀랐습니다. 이것도 한국의 영화배우로는 최초의 일입니다. 한국 영화사에서 어느 누구도 인기 절정의 순간에 모든 걸 접고 유학을 떠난 경우는 없었습니다.
박중훈은 영리한 배우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청춘스타로 떠오른 그로서는 높은 출연료와 팬들의 사인공세에 시달리는 ‘인기’를 포기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쉽지 않은 길을 택했습니다. “큰 새를 잡으려면 손에 쥔 참새 정도는 놓아야 한다”는 게 당시 그의 ‘유학결심의 변(辯)’이었습니다.
오기도 있었습니다. 배우가 되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던, 과거의 학창시절을 만회하고 싶었던 겁니다. 여기에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살아온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형국이 됐지요.
1993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그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순수한 학업에 대한 갈구는 아니었죠. 맘먹고 공부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일종의 ‘기획 유학’이었죠. 2년동안 배우면 뭘 얼마나 배웠겠어요. 다만 공부해 보기로 마음 먹었으니, 한번 제대로 해보자, 기왕이면 남들이 다 어렵다는 뉴욕대(NYU)에 가서 학위를 따 보자, 뭐 그런 오기였습니다.”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집회에 나섰을 때의 박중훈.
그의 열정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기획 유학’이 성공한 거지요. 2년 동안 뭘 배웠겠냐면서 그는 ‘연극학’ 석사를 취득했고, 무엇보다도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만났습니다.
실제로 귀국 후 한동안 그의 행보는 순탄했습니다. ‘투캅스’는 마치 그의 귀국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획부터 촬영, 개봉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결과 또한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그 후엔 ‘게임의 법칙’(1994년, 장현수 감독)을 찍었고,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얼마되지 않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지워버리고 싶다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역풍을 맞았습니다. 신문방송에 오르내리는 구설수 뿐 아니라 CF모델로 나섰던 광고주들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도 줄지어 들어왔습니다.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고통을, 그는 아내와 함께 온전히 짊어져야 했습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댄 ‘하룻밤 강아지’와도 같은 자신의 모습을 자성하는 ‘긴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 때의 시간이 아마도 그를 성숙한 배우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을 겁니다. 평생 그의 꿈이었던 감독 데뷔를 이루던 2013년, 연예계 이면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톱스타’(2013년)에서 그는 후배 배우들과의 영화작업을 통해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영화감독으로서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쾌 상쾌 통쾌’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후배 배우들과 기꺼이 공유하는 ‘어른스러움’ 혹은 ‘선배’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던 겁니다.
이제 그의 인생항로는 앞으로도 계속 ‘어른’의 방향으로 나아갈 겁니다. 아프리카 남수단에 평화유지군으로 파병 중인 큰 아들 등 세 자녀의 아버지로써, 후배들과 ‘좋은 영화’ 만들어 해외영화제에 가보고 싶은 감독으로써 그는 소박한 꿈을 계속 펼쳐갈 게 틀림없습니다. 박중훈은 영리한 배우니까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축구광인 박중훈은 연예인 축구대회의 단골 출전 선수다.
용산고교 동기생인 허재(오른쪽)의 선수 시절, 경기장을 찾은 박중훈이 승리축하 꽃다발을 전하는 모습.
영화 '우묵배비의 사랑'(1990년) 촬영현장에서의 박중훈.
1980년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와 '아스팔트 동기호테' 등의 영화를 통해 청춘스타로 떠오른 박중훈.
'박중훈표 코미디' 선풍을 일으키며 한국 코미디 영화를 주도했다.
'투캅스 2'에 출연하던 박중훈.
박중훈은 미국 뉴욕대(NYU) 유학 중 아내(윤순, 재일교포3세)를 만나 결혼한 게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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