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5일, 곽지균 감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온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영화계는 곽지균 감독의 사망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곽 감독의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에 영화관계자들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2010년 당시에는 감독으로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겨울 나그네’(1986년) 등 한국 멜로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들으며 한때를 풍미했던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겨울 나그네’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작업을 함께 했던 고(故) 최인호 작가(2013년 작고)는 당시 침샘암 투병 중이었는데, 곽 감독의 비보를 전해듣고 굉장히 마음 아파했습니다. 80년대의 한국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이장호 배창호 곽지균 이명세 감독 등과 함께 영화작업을 해오면서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으로 아꼈던 감독이 곽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곽 감독의 풍부한 감수성이 좋은 영화의 토대를 만들어줄 것이라며 늘 주변의 영화관계자들에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겨울 나그네’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게 된 것 역시 최 작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풍부한 감성의 영화적인 재능에다가 ‘ 깊고 푸른 밤’(1985년,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으로 미국 로케이션을 훌륭하게 수행해낸 현장 지휘력을 확인하고, 제작사인 동아수출공사에 ‘겨울 나그네’의 감독으로 강력 추천했던 겁니다. 당시 영화계에서의 최 작가의 영향력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였던 터라 곽 감독의 데뷔는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그리고 실제로 완성된 영화 역시 최 작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여실히 증명해보였지요.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던 ‘겨울 나그네’의 성공으로 곽 감독은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그후 ‘두 여자의 집‘(1987년)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년) ’상처‘(1989년) ’젊은 날의 초상‘(1991년)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했습니다.
물론 ‘젊은 날의 초상’ 이후에도 곽 감독은 ‘이혼하지 않은 여자’(1992년) ‘장미의 나날’(1994년) ‘깊은 슬픔’(1997년) ‘청춘’(2000년) ‘사랑하니까 괜찮아’(2006년) 등의 작품을 만들어왔습니다만 ‘젊은 날의 초상’을 기점으로 완만한 하향세에 접어들었습니다.그리고 곽 감독의 비보가 전해지던 2010년 무렵엔 연출의뢰나 시나리오 각색 등 영화 관련 일이 별로 없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충남 대전의 그의 아파트 책상에 놓여있던 노트북에 남겨진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라는 제목의 유서에도 “일이 없어 괴롭고 힘들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필자가 제작자로 나서서 곽 감독과 티격태격하며 만든 ‘사랑하니까 괜찮아’(2006년)가 결국 그의 유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유일하게 흥청거리는 장면이 등장하는 시골 객주 집의 풍경, 술집 작부 윤양(배종옥, 맨 위 사진)과 역시 열연을 펼치는 작부 역의 방은희(맨 아래 사진의 오른쪽).
곽 감독의 비보를 전해듣고 달려내려간 대전의 빈소에는 그의 조감독이었던 장현수 감독과 필자 등 서너 명의 지인들이 첫날밤을 지켰습니다만 이튿날 아침부터 빈소에는 곽 감독과 함께 영화를 해온 영화인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습니다. ‘겨울나그네’를 함께 했던 안성기를 비롯해 ‘장미의 나날’ ‘깊은 슬픔’의 여주인공이었던 강수연. ‘이혼하지 않은 여자’의 여주인공 고두심, ‘장미의 나날’을 함께 했던 이보희 등 배우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조문했습니다.
당시 암투병 중이던 고 최 작가는 빈소에 오지 못했지만 필자에게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습니다. “얼마나 현실의 삶이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으면서도, 나 역시 암에 걸리고나서야 그것이 내게 봄볕인 줄 알았듯이 곽 감독도 역설적으로 고통스런 현실과 맞부딪쳐 희망을 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곽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겨울 나그네’가 성공적인 데뷔작이었다면 ‘젊은 날의 초상’은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1년 대종상영화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촬영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지요. 관객 동원에 있어서도 44만명의 기록을 남겼으니, 곽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 합니다.
‘젊은 날의 초상’은 이문열 작가의 원작을 토대로 한 영화입니다. 이문열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떠돌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하구’, 대학시절을 조명한 ‘우리 기쁜 젊은 날’, 대학을 중퇴하고 방황하는 젊음을 그린 ‘그해 겨울’ 등 세 편의 중편 소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서 영화로 옮겨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러닝타임이 무려 138분에 이릅니다. 곽감독이 촬영을 모두 끝낸 뒤, 처음으로 편집해서 영화사에 가져온 필름은 160분이나 되었습니다. 제작사(태흥영화)와 촬영스태프들의 회의를 거쳐서 그나마 단축시킨 거지요. 그만큼 ‘젊은 날의 초상’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 영훈(정보석)의 방황이 잠시 멈춘 시골 객주 집에서의 에피소드들. 주로 객주 손님들의 해프닝을 찍었다.
주인공 영훈(정보석)은 첫사랑인 정님누나(이혜숙)가 자신의 담임선생님과 불륜관계인 것을 알고 크게 실망하여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상반된 이념 갈등으로 혼란을 겪습니다. 순수하게 글 쓰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영훈은 정치적 독재와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친구들로부터 행동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그러다 친구 인철(조재현)의 자살을 목격하면서 고뇌에 빠집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잣집 여자 친구 혜연(옥소리)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환경에 절망하고 이별을 고합니다.
사라진 우정과 혜연을 뒤로 한 채 방랑의 길을 떠나는 영훈, 어느 시골 객주집에서 방우 생활을 하면서 작부 윤양(배종옥)의 순정을 통해 인간애를 느낍니다. 윤양을 괴롭히는 객주집 손님들과의 한바탕 싸움 후, 영훈은 윤양과 비운의 지식인 칼갈이(전인택)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정처없는 방랑의 길을 함께 가던 세 사람은 각기 그 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던 칼갈이도, 절망에 빠져있던 영훈도, 또 윤양도 모두 웃는 얼굴로 헤어집니다.
객주집에서 작부들을 괴롭히는 손님들. 단역임에도 열연을 펼치는 중견배우 안병경(사진 속의 흰 와이셔츠)의 활약이 눈부셨다.
80년대 격동의 세월을 배경으로 젊은 날의 방황과 고민을 담아낸 이 영화는 주인공 영훈의 시선을 따라 펼쳐집니다. 그래선지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영훈의 고뇌 만큼이나 우울합니다. 영훈을 비롯한 주요 캐릭터들도 대부분 어둡습니다. 밝은 표정이나 유쾌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술집 작부 윤양(배종옥)과 또다른 작부로 등장하는 방은희 정도가 억지로라도 웃음을 짓게 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내내 국악음악가 김영동의 한 넘치는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폭설 덮힌 산야의 풍광이나 그 속을 걸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고행의 길에 나선 구도자’를 연상케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들이 이 영화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곽 감독의 메시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에 대해서 날 선 비평을 쏟아놓았던 평론가들은 “방황의 길에 오른 영훈의 고민에는 몸짓만 있을 뿐, 깊이가 없다”거나 “폭설로 뒤덮인 산야를 정처없이 걷다가 느닷없이 방황을 끝내는 전환에도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의 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 순간, 이 영화 전체를 감도는 우울한 분위기와 주인공 영훈의 방황, 그리고 그 방황을 느닷없이 끝내는 라스트씬에 이르기까지 마치 이 모든 것들이 곽 감독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주요한 배역으로 등장했던 배우들은 이 영화를 통해 한결같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영훈 역의 정보석을 비롯해 인철 역의 조재현도 이 영화 이후, ‘바쁜 연기자’의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특히 술집 작부 윤양을 맡았던 배종옥은 단연 눈부신 연기를 펼쳤습니다.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기에 충분한 열연이었죠. 훗날 배종옥 자신도 ‘젊은 날의 초상’에서의 연기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배종옥과 함께 작부 연기를 펼쳤던 방은희도 ‘명품 조연’ 연기자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술집 작부들을 괴롭히는 손님 안병경(흰 와이셔츠)을 제압하는 영훈 역의 정보석(왼쪽).
객주집에서 벌이는 술판 촬영에 앞서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곽지균 감독(오른쪽에서 세번째, 흰 점퍼 차림).
'젊은 날의 초상'의 촬영감독 정일성(가운데)이 촬영부에게 이동 카메라 위치를 지시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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