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영화’(1997년, 장선우 감독)는 가출, 본드, 도둑질 등 비행을 일삼는 10대 불량 청소년들과 서울역 등의 행려 노숙자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담아낸 영화입니다. 실제 상황을 찍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연출된 가짜 다큐멘터리, 이름하여 ‘페이크 시네마’(Fake Cinema)입니다.
장선우 감독은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인 배우들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장 감독이 말하는 ‘배우들’이란 직업 배우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우 지망생도 아닙니다. 장 감독은 이들을 모두 길거리에서 캐스팅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가출을 했거나 본드흡입 등을 경험한 길거리의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장 감독은 이들에게 자신들이 겪었던, 혹은 지금 겪고 있는 상황들을 즉흥적으로 ‘재현’해보이도록 주문했습니다. 따라서 10대 청소년들의 방황을 영화에 담으려고 했던 애초의 시나리오는 쓸모가 없었습니다. 촬영할 때마다 이들의 체험을 토대로 한 에피소드 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이름도 본명 보다는 만수, 하마, 깜상, 지라시, 알리, 할렐루야 등의 별명 그대로 사용됐습니다.
장 감독이 ‘나쁜 영화’를 만들게 된 건 그의 조감독이 찍던 단편영화 때문이었습니다. 조감독은 10대들의 이야기를 단편영화로 찍고 있었는데, 출연하던 청소년 한 명이 본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결국 단편영화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아이의 죽음 앞에서 우는 아이들에게 조감독은 ‘너희들 이야기를 꼭 장편영화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 감독은 '나쁜 영화'의 영화화 당시 “내가 걸려든 셈”이라고 웃으면서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나쁜 영화'는 10대 비행 청소년들과 서울역 등의 행려 노숙자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찍은 '페이크 시네마'다.
장 감독은 사실 ‘나쁜 영화’를 찍기 이전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꽤 화려한 ‘감독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우화적으로 그린 영화 ‘성공시대’(1986년)를 비롯해서 변두리 서민들의 삶과 사랑을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담아낸 ‘우묵배미의 사랑’(1990년), 고전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과감하게 탈피하여 포스트모더니즘 방식으로 새로운 실험영화의 장을 열었던 ‘경마장 가는 길’(1991년), 그런가하면 고은의 원작을 영화화한 ‘화엄경’(1993년)으로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예술공헌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1년쯤 후에는 노골적으로 포르노그라피를 표방하며 ‘성적 묘사’의 한계 논란까지 낳았던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년)을 찍더니, 또 2년쯤 후에는 이같은 실험적 영화작업과는 동떨어진 ‘유린당한 1980년대 광주’를 형상화한 ‘꽃잎’(1996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영화적 성취를 계속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나쁜 영화’는 장 감독의 실험적인 영화작업 방식으로의 회귀를 알리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극영화도 아닌, 둘 다를 희망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게 당시 장 감독의 ‘연출변(辯)’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나쁜 영화’는 모든 영화적 형식과 관습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영화로 대중 앞에 선보였습니다.
사실 비행 청소년의 이야기는 ‘나쁜 영화’ 이전에도 언론 보도나 TV 등의 시사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여러차례 접해왔습니다.본드 흡입, 술집 접대부로 일하는 여고생, 서울역이나 지하도 등지에서 노숙하는 행려들의 모습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쁜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들의 모습은 사뭇 충격적이었습니다. 술과 담배, 섹스, 폭력과 도둑질 등이 난무하는 가운데 본드를 흡입하고 환각에 빠지는 장면들은 마치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졌습니다. 또 호스트바와 단란주점에서 손님으로 들어온 중년의 남녀들이 10대 남녀 접대부들을 상대로 펼치는 추태는 눈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습니다.심지어 청소년선도위원이라는 자들이 비행을 조장하는 모습에서는 ‘갈 데까지 갔다’는 느낌에 절망감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욕설과 비속어들은 ‘나쁜 영화’를 입증하는 낙관인 양 영화 내내 귓전을 때렸습니다. 돈 구걸을 뜻하는 ‘앵벌이’를 비롯해 술취한 사람을 폭행하여 돈을 빼앗는 ‘아리랑 퍽’, 빠른 속도로 타는 오토바이를 뜻하는 ‘뿅카’, 생일맞은 친구를 축하한다며 집단 구타하는 ‘생일빵’ 등등.
실제로 비행을 일삼는 길거리의 10대 청소년들이 배우로 영화에 참여했다.
영화의 초중반은 10대 비행 청소년들, 후반부는 이들의 이야기에 행려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짧은 에피소드와 상징적인 장면들을 늘어놓는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정해진 시나리오가 없으니 모든 상황들은 즉흥적으로 카메라에 담깁니다. 20여 개의 소제목들은 ‘나쁜 영화’의 지향점을 한 눈에 드러냅니다. ‘왜 싸우는데’ ‘아리랑 퍽’ ‘호스트 바’ ‘몰라요’ ‘춤이 씹혔다, 난 죽을란다’ ‘내 천만원의 영혼을 위로하며’ ‘넌 오늘 개쪽인 줄 알아라’ 등등. 이들 소제목들을 따라서 폭주족의 질주, 단란주점과 호스트 바의 접대부 생활, 음란 비디오를 보며 본드 흡입, 사무실 금고털이, 아리랑치기, 워크맨 훔쳤다가 붙잡혀 주인에게 오럴섹스 해주기, 여자친구 윤간 등 마치 악행이란 악행은 모두 다 보여주고 말겠다는 듯 '독하게' 담아냅니다.
반면 행려 노숙자들의 일상은 동정과 연민을 자아냅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남루한 차림새, 이들은 행인에게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들 중 한 행려자가 다른 행려자의 맨발에 양말을 신겨주는 장면이나 이삿짐을 나르고 번 돈으로 한 턱 내는 장면 등은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나쁜 영화'에서는 본드 흡입, 술과 섹스, 폭력과 도둑질 등 '날 것' 그대로의 장면들이 교묘하게 연출되어 다큐멘터리처럼 촬영되었다.
‘나쁜 영화’는 영화 촬영 시작부터 완성되어 극장에서 개봉될 때까지 적잖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영화제작사(미라신코리아)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등급 심의요청을 했다가 당시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등급 외 판정’을 받았습니다. ‘등급 외 판정’이란 일반 극장에서 상영이 가능한 18세 관람가 등급 판정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인영화 전용관이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영화 개봉 자체'를 못한다는 겁니다.이에 제작사에서는 재심의를 요청했고, 수 차례의 협의와 재심 끝에 문제가 되는 몇 장면을 단축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10분 정도 단축된 장면은 윤간, 노골적인 성기 노출, 단란주점 손님들의 변태적인 행위, 지나친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장면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10여분의 장면 단축이 ‘나쁜 영화’의 충격 강도를 덜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들 비행 청소년보다 더욱 나쁜 것은 우리 사회의 이중성, 어른들의 이중적인 작태임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가출 학생을 꾸짖으면서 술집에 가서는 어린 여학생을 찾는 어른들의 일그러진 모습이나 청소년 선도위원의 탈을 쓰고 오히려 이들을 농락하는 모습, 도둑질하다 붙잡힌 여학생에게 성행위를 강요하는 추악한 모습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린 겁니다. ‘나쁜 영화’는 실험적인 방식의 영화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듯 사회고발영화인 셈이지요.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는 한국 최고의 배우인 송강호가 당시 행려 노숙자 역할로 잠깐 출연했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역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교인들 옆을 어슬렁거리며 지나갑니다. 눈썰미가 있는 관객들은 당시에도 눈치챘습니다.
화제를 낳았던 영화음악 얘기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인디밴드 중 절대적 지지층을 제법 갖고 있는 삐삐밴드의 달파란(강기영)이 영화음악을 처음 맡았는데, 만만찮은 음악감독 역량을 과시했습니다. ‘나쁜 영화’의 제목도 원래 ‘삐삐밴드’의 2집 앨범 수록곡 중 하나인 ‘나쁜 영화’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달파란은 이후 '거짓말'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놈 이상한 놈' '황해' '고지전' '도둑들' '암살' '곡성' 등 20여 편의 영화음악감독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달콤한 인생’(2005년, 김지운 감독)의 영화음악으로는 스페인의 시체스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나쁜 영화’는 여러 가지로 의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을 통해 ‘폭로를 통한 진실찾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었고, 또 우리 사회의 청소년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14만명의 관객 동원을 기록, 흥행도 성공했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나쁜 영화'에 등장하는 길거리 청소년 배우들은 장선우 감독과 아무때나 맞담배를 피웠다.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10대 청소년들의 방황하는 모습들이 영화 전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쁜 영화'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드러낸 청소년 배우들. 이들은 본명 아닌 별명으로 크레딧에 올랐다.
'나쁜 영화'에서 이들 비행 청소년들보다 훨씬 더 나쁜 어른들의 이중적인 작태도 낱낱이 고발한다.
'나쁜 영화'를 연출한 장선우 감독(오른쪽)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화형식으로 '폭력을 통한 진실 찾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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