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김영상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증권가를 중심으로 군사정권의 주체였던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의 비자금 보유설이 시중에 나돌았습니다. 그런데 떠돌던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확산되는 듯 하다가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채 그만 흐지부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여쯤 지난 1995년 10월, 당시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우일양행(주) 명의로 예치된 128억원의 예금계좌 조회표를 흔들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중 각계로부터 받은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에 검찰은 즉각 진상조사에 나섰고, 수사 착수 이틀만에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의 이현우 전 경호실장으로부터 “이 자금은 노 대통령 재임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돈이며, 전 청와대 경호실 이태진 경리과장이 관리해왔다”는 진술을 받아내면서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실체가 확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검찰의 수사가 활기를 띠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며칠 지나지 않아 대국민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원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원이 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비자금의 유입 경위와 사용처 등이 일부 밝혀지기는 했습니다만 국민의 관심사였던 1992년 대통령선거자금 지원 관련 부분 등에 대해서는 진술 거부로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노태우 전 대통령은 포괄적 뇌물죄로 구속기소되어 최종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습니다. 또한 그 다음해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이 최종 선고되었습니다.
씁쓸한 사실은 전, 노 두 전 대통령이 비록 군부의 힘으로 정권을 잡았더라도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인데, 재판과정에서 기업들에게서 받은 돈으로 부동산을 구입한 경위를 따지자 “돈을 불려 나라를 위해 좋은 일에 쓰려고 했다”(노태우)고 진술하거나, “내가 돈을 받지 않으니 기업들이 도리어 불안감을 느껴 투자를 하지 못했다. 기업인들은 내게 정치자금을 냄으로써 정치안정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꼈을 것“(전두환)이라고 주장해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는 것입니다.
1995년 12월 16일 개봉된 코미디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김상진 감독)는 바로 이같은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던 시절과 맞물려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전직 최고 권력자의 비자금 1,000억원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백수건달의 휴면계좌로 비자금 일부가 흘러들어가면서 펼쳐지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예비군 훈련 대타로 나가 받은 일당 5만원을 은행에서 인출하려다 무려 100억 5만원이 입급돼있는 것을 알게 된 달수(박중훈)과 은지(정선경)은 3억원을 인출해 백화점에서 돈을 물쓰듯 한다.
예비군 훈련을 대신 나가주고 수고비를 챙기는 백수 천달수(박중훈)는 어느날 예비군 훈련 대타를 다녀오다가 외상 술값 갚으라는 카페 여종업원 은지(정선경)에 붙잡혀 친구가 보내준 일당 5만원을 찾으러 함께 은행에 갑니다. 그런데 현금인출기에 통장을 넣었는데, 통장에는 무려 100억 5만원이 잔고로 찍혀 나오는 겁니다. 은행 컴퓨터 고장이려니 여기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구로 옮겨가서 3억원을 인출해 보는데, 정말로 3억원이 인출되는 겁니다.
달수는 현찰 3억원과 97억5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들고 은지와 함께 호텔과 백화점을 드나들며 그야말로 돈을 물쓰듯 합니다. 호텔방에서 침대에 돈다발을 쫙 펼쳐놓고서는 그야말로 ‘돈갖고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꿈이 아닌가 싶어 꼬집어보지만 사실임에 안도하는 두 사람.
마치 로또를 맞은 것과도 같은 이런 상황은 전직 최고 권력자의 가명계좌로 입금되어 있는 비자금 1,000억원의 처리 방안을 놓고 고민하던 로펌이 은행의 도움을 받아 1년 이상 거래가 없는 휴면계좌에 100억원씩 분산 예치했다가 다시 인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겁니다. 일당 5만원을 인출하려던 달수의 기막힌 타이밍으로 100억원이라는 거액이 그의 통장으로 입금됐으니, 마른 하늘에서 돈벼락을 맞은 셈입니다.
달수(박중훈)와 은지(정선경)가 백화점에서 흥청망청 쇼핑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코미디 영화의 미덕인 웃음은 초반에서부터 시동을 걸었지만 중반에 접어드는 이때부터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의 상황으로 달려갑니다. 은행에서 돈을 인출할 때, 백수처럼 보이는 건달이 현찰 3억을 달라고 하니 은행창구에서는 당연히 의심을 합니다. 직업을 묻는 질문에 달수는 당황한 나머지 ‘특수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얼버무렸는데, 인출된 돈을 추적하는 권력집단에서는 이 말을 오해합니다. 전문가라는 왕년의 킬러(명계남)와 뱁새(김승우)를 고용해서 ‘특수한 일’을 하는 일당(달수와 은지)을 쫓기 시작하면서 웃음 해프닝은 더욱 가지를 뻗어나갑니다.
백화점에서 돈을 물쓰듯 쇼핑하는 달수(박중훈)와 은지(정선경).
‘돈을 갖고 튀어라’는 김상진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강우석 감독의 조감독으로 미스터 맘마’(1992년) ‘투캅스’(1993년) ‘마누라 죽이기’(1994년)를 작업하면서 강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 겁니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 대한 관객의 호응으로 흥행에 성공(20만 명 관객 동원)하고, 코미디 영화의 미덕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들으면서 김 감독에게는 ‘청출어람’이란 표현까지 주어졌습니다. 실제로 김 감독은 한양대 재학시절부터 찰리 채플린이나 우디 알렌의 영화에 푹 빠져 코미디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강우석 감독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도 “코미디 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돈을 갖고 튀어라’도 원래는 1969년에 나온 우디 알렌의 동명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Take The Money And Run)를 차용한 영화입니다. 우디 알렌의 영화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은행털이 행각을 펼치는데, 김 감독은 “만약 당신에게 100억이 생긴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우연히 흘러들어온 거액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극 형태의 코미디로 풀어냈지요. 그리고 그저 웃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의 요소요소에서 당시 정치 사회적인 이슈를 비틀어 풍자하는 센스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김 감독의 이같은 코미디 연출 솜씨는 ‘돈을 갖고 튀어라’ 이후의 영화들인 ‘깡패수업’(1996년)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 ‘신라의 달밤’(2001년) ‘광복절 특사’(2002년) ‘귀신이 산다’(2004년) 등에서 잘 보여졌지요.
은지 역의 정선경은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코믹 연기의 공력을 십분 발휘, 영화흥행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는 배우들의 개성 넘친 연기도 한 몫 했습니다. 박중훈이야 이미 ‘투캅스’며 ‘마누라 죽이기’ 등으로 공인된 코믹연기의 달인이었지만, 여주인공 은지 역의 정선경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년, 장선우 감독)에서 파격적인 노출연기로 주목을 받은 이후 이렇다할 작품을 만나지 못하다가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코믹 연기’의 공력을 과시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왕년의 킬러로 등장한 장하사 역의 명계남과 뱁새 역의 김승우가 펼쳐내는 어리버리한 캐릭터 연기 또한 ‘감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문득 2018년 무술년 벽두에 1천만 명 관객 동원 영화로 화제를 낳고 있는 ‘신과 함께- 죄와 벌’(김용화 감독)의 제작자인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도 생각납니다. 원 대표가 영화계에 입문해 처음 쓴 시나리오가 ‘돈을 갖고 튀어라’였기 때문입니다. 원 대표는 그후 ‘미녀는 괴로워’(2006년,김용화 감독)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 추창민 감독) 등을 제작하며 프로듀서로서 승승장구해왔지요.
그런가하면 2000년대 386세대 영화인들을 이끌면서 한국영화계에서 ‘싸이더스’ 시대를 열었던 차승재 대표 또한 ‘돈을 갖고 튀어라’가 프로듀서로서의 첫 제작 영화였습니다. 차 대표도 ‘돈을 갖고 튀어라’ 이후에 ‘깡패수업’(1996년, 김상진 감독) ‘비트’(1997년, 김성수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허진호 감독) ‘처녀들의 저녁식사’(1999년, 임상수 감독) ‘살인의 추억’(2002년, 봉준호 감독) ‘내 머릿 속의 지우개’(2004년, 이재한 감독)‘말죽거리 잔혹사’(2004년, 유하 감독) ‘비열한 거리’(2006년, 유하 감독) ‘타짜’(2006년, 최동훈 감독 ) 등 ‘싸이더스표’ 웰메이드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글쎄요, ‘돈을 갖고 튀어라’로 영화일과 처음 인연을 가졌던 영화인들의 ‘승승장구‘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박중훈은 '투캅스'와 '마누라 죽이기' 등에 이어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도 특유의 코믹 연기를 한껏 펼쳐보였다.
'돈을 갖고 튀어라'의 흥행성공을 이끈 주요 배우들. 왼쪽부터 김승우, 정선경, 박중훈, 그리고 명계남(아래 사진).
달수(박중훈)와 은지(정선경)의 백화점 쇼핑 장면을 촬영중인 김상진 감독(왼족) 등 제작 스태프들.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