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가을이 깊어가기 시작한 11월, 가을 바람이 그 어느 해보다 스산하게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IMF 사태가 터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국가경제의 파탄에 직면한 사회의 곳곳에서는 불길한 징조가 감지되기 시작했고,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 또한 팍팍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최루성 멜로영화 ‘편지’(1997년, 이정국 감독)가 개봉됐습니다. ‘울고 싶은 데 뺨 맞는 격‘이랄까요? 박신양과 고(故) 최진실’의 가슴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담아낸 ‘편지‘는 영화팬들의 눈물콧물을 쏙 빼놓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찍어내다가, 극장 밖을 나와서 영화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면서 또 울고,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세상살이로 죽을 맛을 한탄하며 또 눈물을 흘렸던 시절입니다. ’편지‘는 그해 개봉된 한국영화 중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습니다. 82만명, 지금으로 따지면 1천만 명 관객 동원에 버금가는 기록이었습니다.
기획 중간에 엎어졌던 시나리오를 다시 발전시켜 만든 영화 '편지'는 82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1997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런 대박을 터뜨린 영화 ‘편지’가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편지’의 제작사가 기록에는 ‘아트시네마’라는 회사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은 90년대 한국영화의 기획제작 트렌드를 주도한 신씨네(대표 신철)가 제작사였습니다.
신씨네 신철 대표는 ‘한국영화의 프런티어‘로 불리는 프로듀서입니다. 한국영화 제작을 ’지방장사‘(지방의 배급업자들이 그 지역의 영화배급권을 갖기 위해 영화 제작에 앞서 미리 제작사에게 보내는 선급금)에 의존하던 시절에 대기업과 금융계의 자본을 최초로 영화계에 끌어들였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A4용지 한 장의 시놉시스와 주연배우만 있으면 영화가 뚝딱 만들어지던 환경에서, 여러 달에 걸쳐 아이템을 취재하고 시장조사를 해서 영화를 만드는 ‘기획영화’도 그가 처음 시도했습니다.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컬럼의 첫 번째 영화였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강우석 감독)가 바로 그 첫 영화였구요. 개봉관 기준 5만 명 관객 동원이면 흥행성공으로 평가하던 시절에, 무려 16만 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였으니 ‘기획영화’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셈입니다. 영화 하나 만드는 데 뭘 조사하고 기획하느냐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됐지요.
그렇게해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년, 김유진 감독)를 비롯해 ‘베를린 리포트’(1991년, 박광수 감독), ‘결혼 이야기’(1992년, 김의석 감독), ‘미스터 맘마’(1992년, 강우석 감독) 등의 영화를 기획했고, 또 대부분 흥행에 성공시켰습니다. 그리고 기획을 넘어 직접 제작까지 시작했습니다. ‘101번째 프로포즈’(1993년, 오석근 감독)가 신씨네의 첫 제작영화였습니다. 무난한 출발이었습니다. 1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흥행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영화의 프런티어’답게 미국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한국영화에도 컴퓨터그래픽 효과를 입혀보겠다고 나선 게 화근(?)이었습니다. 결정과 실행력이 빠른 그는 곧바로 비싼 컴퓨터 장비들을 들여와 ‘신씨네 컴퓨터 그래픽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CG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계를 제대로 만지는 전문가도 없을 때여서 그 결과물은 사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수준의 CG로 영화 ‘구미호’(1994년, 박헌수 감독)를 제작했습니다. 개봉에 앞선 시사회의 반응에서도 예견된 일이었지만 ‘구미호’는 엄청난 손실을 낳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런 시행착오와 실험작업을 거쳐서 2년 후에는 제법 그럴 듯한 CG효과로 ‘은행나무침대’(1996년, 강제규 감독)를 선보일 수는 있었지요. 하지만 ‘구미호’의 제작 실패로 신씨네는 영화제작사의 존립자체가 매우 어려워진 상태였습니다. ‘은행나무 침대’의 흥행성공으로 어느 정도 만회하기는 했지만, 이미 3년여 동안 대기업으로부터 기획개발비 명목으로 받아 사용한 선급금 채무를 미처 변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업의 채무변제 독촉으로 신씨네는 기획했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던 아이템과 시나리오들을 점검해보던 중 ‘편지’의 시나리오를 다시한번 발전시켜보기로 했던 겁니다. 만일 신씨네가 대기업으로부터 채무변제 독촉을 받지 않았더라면, 신씨네가 ‘은행나무 침대’의 흥행성공으로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더라면 ‘편지’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겠지요.
‘편지’의 시나리오를 다시 검토해보니 신파이기는 하지만 잘 만들면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멜로영화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당시 신철 대표의 생각이었습니다.
'편지'의 여주인공 정인 역의 최진실은 그야말로 적역이었다. 관객들은 남자 주인공 환유(박신양)를 그리워하는 정인을 보면서 동병상련의 눈물을 흘렸다.
영화는 여주인공 정인(최진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는 경강역에서 ‘꽃을 사랑하는 분들께 화분을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는 화분들 중에 하나를 고른 정인이 서둘러 기차에 오르다가 한 남자와 부딪쳐 그만 지갑을 떨어뜨립니다. 부딪쳤던 남자 환유(박신양)는 택시를 타고 기차를 쫓는 추격전 끝에 지갑을 돌려주고 첫 인사를 나눕니다.
무엇이든 양자 택일의 순간에는 동전을 던져 결정한다는 환유는 정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함께 결혼하고, 뒷면이 나오면 자기는 예정대로 유학을 떠나겠다구요. 나중에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이 동전은 오래전부터 정인을 지켜봐온 환유가 준비해놓은 동전입니다. 양쪽 다 앞면만 있는 동전이지요. 당연히 동전은 앞면이 나왔고, 마치 동화처럼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환유가 오래전부터 정인을 마음에 두고 화분을 준비해왔으며, 사랑해왔음이 밝혀집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외국에 나가 계셔서 늘 혼자였던 정인과 환유는 둘 만의 행복한 시간에 젖어듭니다. 화병의 꽃에 물을 주고, 시계 태엽을 감고, 똑같은 두 개의 잔에 커피를 마시며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넘쳐납니다.
이때쯤 등장하는 생일편지. 생일선물로 뭐 받고 싶어?라는 질문에 연애편지라고 대답하는 정인에게 환유가 써줍니다.
정인에게.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행복이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환유가 뇌종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야하는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때부터 관객의 눈물샘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홀로 세상에 두게 될 정인을 위해 소소한 것들을 하나하나 준비해두는 환유의 투병생활은 그 자체로 최루폭탄입니다.
환유가 세상을 떠나고난 뒤,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던 정인에게 이 영화의 주제와도 같은 ‘환유의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생전에 써놓은 편지를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부치는 거지요. 뻔한 신파인데, 정인이 편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관객들을 눈물을 훔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 이것은 편지를 쓸 힘조차 없어진 환유가 비디오를 찍어놓은 겁니다. “내가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나 없이도 씩씩한 정인이를 보고 싶어서야. 그렇다구 너무 빨리 잊어버리지는 말구,,,, 나 쳐다봐, 정인아. 우리 마음 속에 우리 기억이 남아있는 동안까지는 우리 이별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자. 그리구 나중에, 나중에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다음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이정인 사랑해”
'편지'의 기획 도중 엎어졌던 이유가 캐스팅의 어려움 때문이었으나, 다시 발전시켜 만든 영화에서 박신양-최진실 카드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눈물콧물 범벅되어 비디오 편지에 등장하는 환유를 보면서 울지 않는 관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극장 안은 그야말로 훌쩍이다못해 흐느끼는 관객들의 울음소리까지 넘쳐났습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습니다. 이 바람에 IMF사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생일편지로 소개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시집-삼남에 내리는 눈)은 일약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20년도 훨씬 더 된 옛 영화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박신양- 최진실’의 캐스팅은 최고의 조합이었습니다. 아이러니는 이 영화를 기획했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던 이유가 ‘캐스팅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임자가 따로 있다”는 영화계의 속설이 실감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편지’는 마침내 신씨네의 재정도 탄탄한 구조로 바꿔놓았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뇌종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환유의 절절한 심경을 열연한 박신양.
'편지'에서 정인(최진실)과 환유(박신양)의 신혼집은 마치 동화처럼 예쁜 세트로 꾸몄다.
'편지'에서 환유(박신양)가 떠나고난 뒤, 홀로 남은 정인(최진실)의 집 안 촬영에 한창인 이정국 감독.(왼쪽의 안경쓰고 모자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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