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총잡이`

기사입력 [2018-01-1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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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 영화계에는 박중훈표 코미디라는 용어가 탄생했을 만큼 박중훈을 주연으로 내세운 코미디 영화들의 흥행 성공률이 놓았습니다. ’우묵배미의 사랑‘(1990, 장선우 감독)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 이명세 감독)로 한껏 줏가를 올려놓고 홀연히 미국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계속해서 투캅스‘(1993, 강우석 감독)마누라 죽이기‘(1994, 강우석 감독)로 유학 공백에 따른 혹시나하는 기우를 단번에 잠재웠지요.

 

그리고 게임의 법칙‘(1994, 장현수 감독)으로 다시한번 존재감을 드러냈고, 이어서 총잡이‘(1995, 김의석 감독)에도 출연하면서 박중훈표 코미디의 위세가 계속됐습니다. 더군다나 총잡이의 경우에는 대박을 터뜨린 영화 투캅스의 주인공 박중훈과 신세대 부부의 솔직한 성담론을 담아내 역시 흥행성공한 결혼 이야기의 김의석 감독이 만났다는 점에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습니다. 박중훈과 김의석 감독의 화학적 결합이 어떤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었지요.

 

실제로 총잡이1995년 여름방학 시즌에 개봉되어 적지 않은 관객동원(11만 명)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대박은 아니지만 흥행에는 그럭저럭 성공한 편이었습니다. 다만 박중훈 VS 김의석 감독의 케미를 감안하면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이기는 했습니다. 박중훈도 총잡이의 결과를 두고 연속해서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는 바람에 선택의 폭을 넓히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내 개인기를 한번 더 써먹은 박중훈표 코미디로 인식됐다는 게 아쉬웠다는 속내를 비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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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표 코미디'의 위세를 이어간 영화라는 평가를 들었던 '총잡이'의 남녀 주인공 박중훈(오른쪽)과 이화란.

  

그런데 그 당시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총잡이가 개봉되던 그해(1995) 여름철, 우리 사회는 엄청난 사건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그것입니다.

 

총잡이가 개봉되기 정확하게 꼭 한 달 전인 1995629. 서울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어 500여명의 사망자와 실종자, 1,000여명 가까운 부상자를 낳았던 겁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부끄러운 사건 중의 하나로 기록된 이날 사고로 온 국민들은 매일매일 TV 앞에 앉아 사고 수습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무너져내린 건물더미에서 사망자들을 수습하는 가운데,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그야말로 온 국민들은 온통 그 생존자의 구조를 위해 가슴을 졸이며 TV를 지켜보곤 했지요.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1일 동안 가족을 생각하며버텨냈다는 생존자로부터 13일 동안 시원한 콜라를 떠올리며 견뎠다는 생존자, 그런가하면 무려 17일간을 무너진 건물잔해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 방울로 갈증을 달래며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생환자까지 비극적인 사고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승리또한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할 드라마들이었습니다.

어디 생환자들의 뉴스만 그랬나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주검으로 돌아온 희생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알려질 때마다 국민들은 TV 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마치 내 일인 양 함께 가슴 아파했지요.

 

또 어떻게 해서 그 노른자위 땅에 지어진 일류 백화점이 붕괴 참사로 이어지게 됐는지 감식 결과를 접할 때마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들도 분노로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매장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 내력벽을 없애버렸다는 사실과 4층 건물로 설계되어있던 것을 5층으로 확장공사를 시행했다는 사실 등은 아예 할 말을 잊게 했습니다. 또 비리와 불법으로 무리하게 부실 공사를 했다쳐도 붕괴사고 당일 오전에 이미 5층의 식당가에서 천정에서 물이 쏟아지면서 내려앉았다거나 4층과 5층에서 뚝 뚝,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감지됐음에도 백화점 전체 영업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특히 오후에는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건축회사와 삼풍백화점의 경영진들이 대책회의를 가졌으나 2층부터 5층까지만 통행을 막았을 뿐, 1층과 지하 매장은 그대로 영업을 강행하는 바람에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졌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며칠 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관련해서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들어가던 삼풍백화점 회장이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건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것이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것이라고 발언하면서 온 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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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캅스'의 박중훈(왼쪽) VS '결혼 이야기'의 김의석 감독(오른쪽)의 케미로 '총잡이'는 촬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총잡이의 개봉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셈입니다. 이는 비단 총잡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이어지는 공황상태는 추석 대목시즌도 무색하게 했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인 워터월드’(케빈 레이놀즈 감독)크림슨 타이드’(토니 스코트 감독), ‘나쁜 녀석들’(마이클 베이 감독), ‘언더씨즈2’(제프 머피 감독), 그리고 성룡의 썬더볼트’(진가상 감독) 등이 모두 기대에 못미치는 흥행성적표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실 총잡이박중훈표 코미디입니다만 메시지가 제법 쎈 영화였습니다. 우연히 손에 넣은 권총 한 자루 때문에 영웅심을 갖게 된 소심한 주인공의 자아찾기가 영화의 내용입니다. 특히 공권력이 제 기능을 못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과 피해의식으로 강박증까지 가진 인물이 주인공의 캐릭터였습니다. 아내와의 잠자리도 원활하지 못하니 가정이나 직장에서나 늘 무기력한 모습으로 묘사됐지요.

 

박중훈이 연기했던 대서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총 한 자루를 갖게 되면서 그는 이유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집니다. 직장 동료를 위협하는 깡패를 만났을 때나 아내(이화란)를 성폭행하려는 아내의 직장상사(안석환)와 마주했을 때, 심지어는 백화점에서 아내를 인질로 잡은 외국인테러리스트를 상대할 때도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수퍼파워를 발휘합니다.

 

대서는 더 이상 예전의 대서가 아닙니다. 남성다움의 대명사라도 된 듯 합니다. 성적인 자신감도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걸 느낍니다만 대서 스스로 더 이상 총으로 갖는 용기를 가져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습득한 총을 신고하러 경찰서로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그만 역시 다른 총으로 무장한 탈주범(최종원)의 인질이 되고 맙니다. 밧줄에 묶여 탈주범의 인질이 된 대서는 은행강도 행각을 강요당하면서 공범으로 몰리기도 하고, 출동한 무장경찰들에게 포위당한 대치 국면을 맞기도 합니다. 대서에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던 총이 이제는 거꾸로 대서의 인생을 꼬이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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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잡이'의 남녀 주인공 박중훈(오른쪽)과 이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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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잡이'의 주인공 박중훈(오른쪽)과 외국인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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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잡이'의 촬영현장(사진 위)와 촬영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여주인공 이화란(사진 아래, 오른쪽).

 

이른바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입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웃음으로 풍자하는 코미디 영화인 거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전반적인 위기의 각성에서 출발한 영화라는 게 김의석 감독의 연출변이기도 했습니다. 대낮 경찰서에서 탈주범이 인질극을 벌인다는 등의 소동을 통해서 그런 걸 그리려고 했다는 거지요. 실제로 박중훈은 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해 소심한 현대사회의 남성상을 리얼하게 표현해냈습니다. 특히 아내(이화란)와의 침실 장면은 박중훈이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까지 들었습니다. 아내 앞에서 작아질대로 작아진 남편의 모습은, 마치 실제상황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으니까요.

 

아내 역을 연기했던 이화란은 영화 집시애마’(1990, 이석기 감독)로 스크린에 처음 등장한 패션모델 출신이었습니다. 5년만에 두 번 째 영화출연이었는데, 특유의 이국적인 마스크와 몸매로 분위기를 잘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총잡이이후에는 그녀를 다시 스크린에서 만날 수 없었습니다. 90년대 후반, 미국 뉴욕으로 패션공부 유학을 떠났다가 1999년 결혼한 이후에는 일체의 연기활동을 그만 두었으니까요.

 

총잡이가 소심한 남자의 일탈을 그린 영화였다면 그로부터 7년 뒤에는 젊은 여성 4(이요원, 김규리, 이영진, 조은지)이 우연히 손에 넣은 총 두 자루를 들고 일탈을 꾀하는 영화 아프리카’(2002, 신승수 감독)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총이 별 의미없이 폭력의 수단으로만 사용돼 안타까움을 주었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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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잡이'의 김의석 감독(사진)은 데뷔작 '결혼 이야기'에 이어 '그 여자 그 남자' 등까지 연속해서 코미디 영화로 성가를 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