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한국 문학사에 있어 시대를 앞서간 천재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의 소설 ‘날개’의 프롤로그 부분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한 뉘앙스로 가득한 ‘날개’의 이 첫 부분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지요.
서울 경복궁 근처의 서촌, 정확한 지명으로는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 10번지에는 ‘이상의 집’이라는 간판의 자그마한 카페 같은 공간이 있습니다. 이상을 기억하는 누구한테나 열려 있는 이곳에는 이상이 생전에 발표했던 작품들에 대한 소개글과 관련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넓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어도 되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셔도 됩니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이상과 관련한 영상도 상영되고 있습니다.
2013년 3월에는 사진작가 김용호의 개인전이 “제비다방에 샴팡 구락부를 허(許)하라”라는 주제로 열리기도 했습니다. 김용호 작가가 이상의 소설 ‘날개’를 주제로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면서 1930년대 ‘제비다방’의 분위기를 재현,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축제 이벤트를 펼쳤던 겁니다. 옛날 유성기에서나 들었을 법한 아코디언 반주에 미묘하게 떨리는 음색의 노래, 화사한 저고리와 양장으로 멋낸 숙녀들과 보타이에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모여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1930년대 제비다방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금홍아 금홍아'의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 왼쪽에서부터 구본웅 역의 김수철, 이상 역의 김갑수, 금홍 역의 이지은.
이상의 제비다방. 이상이 직접 수리했다는 제비다방은, 그러나 사실상의 주인은 기생 금홍이었습니다. 24살의 나이에 폐결핵에 걸린 이상이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기생이 금홍이었는데, 서울로 돌아와 종로에 제비다방을 차려주고 실질적으로 운영했던 사람이 금홍이었던 겁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도 이 시절에 금홍과 이상야릇한 관계로 동거하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지요. 이상은 아무런 의욕도 없이 다방 뒷편의 골방에 틀어박혀 금홍의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햇살을 비춰 화장지를 태우거나 하지요.
이상(김갑수)은 결핵 요양차 떠난 황해도 백천 온천에서 금홍(이지은)을 만난다.
다방의 뒷방에서 둥구는 백수 남자가 자신의 매춘영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느낀 금홍은 아스피린을 주는 척 하면서 수면제를 줍니다. 이상은 그걸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먹습니다. 처음 금홍을 만났을 때의 열정이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느낀 이상으로서는 그저 “날자꾸나”라는 글을 쓰면서 꿈을 꾸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금홍아 금홍아'의 주요 인물인 이상, 구본웅, 금홍 역을 연기한 김갑수 김수철 이지은 등 세 배우는 무엇보다도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약간의 오류라도 범하지 않기 위해 '고증 등 사전 학습'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 ‘금홍아 금홍아’(1995년, 김유진 감독)은 바로 이같은 배경의 이상과 금홍, 그리고 이상의 친구였던 야수파 곱추화가 구본웅의 삼각 로맨스를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구본웅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1932년 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 최초의 야수파 화가 구본웅(김수철)은 첫 귀국전시회를 갖습니다. 이 전시회를 통해서 많은 지식인, 문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중 천재시인 이상(김갑수)과 만나게 됩니다. 추남의 곱추인 구본웅과 달리 이상은 미술 문학 등 다방면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이며 많은 여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또 자유분방한 관계를 갖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붙어다니면서 온갖 기행을 즐기던 중, 폐결핵을 앓는 이상의 요양을 위해 함께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갑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천박하고도 음란한 열일곱살의 기생 금홍(이지은)을 만나게 됩니다. 구본웅은 금홍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이상에 의해 선수를 빼앗깁니다. 구본웅은 이상의 집착 때문에 금홍을 그저 예술적 에로스로 승화시켜 자신의 가슴에 담아둘 뿐입니다.
이상은 금홍을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와 다방을 차려주고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금홍은 새로운 경성생활에 방종하면서 뭍 남성들과의 간통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다방 뒤편 골방에서 금홍의 간통을 묵인하며 백수생활을 이어가던 이상은 신문에 ‘오감도’라는 난해한 시를 연재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비난에 문학적인 위기까지 맞게 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금홍마저 이상 곁을 떠나고 맙니다.
이때 구본웅은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변동림(윤정빈)을 이상에게 소개하고, 이상은 무엇엔가 홀린 듯 서둘러 그녀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이 결혼 역시 금세 실패하고 이상은 이상적인 도피처로 생각한 일본으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본웅은 늘 그리워했던 금홍과 해후하게 됩니다만 그녀는 이미 늙은 창녀로 거의 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금홍은 끈질기게 본웅을 유혹하여 관계를 갖고 맙니다. 금홍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 데 대한 자책하던 본웅은 어느 바닷가에서 이상과의 우정을 회상합니다.
구본웅(김수철, 왼쪽)과 이상(김갑수, 오른쪽)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 온갖 기행을 함께 한다.
‘금홍아 금홍아’는 이상과 구본웅, 금홍 등 세 인물의 캐릭터를 세밀하게 구축하는 데 꽤나 심혈을 기울인 영화였습니다. 워낙 각각의 인물들이 널리 알려진 터라 약간이라도 사실적 오류를 빚으면 안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전에도 이상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이 적지 않게 나왔지만 이를 영상화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래서 김유진 감독은 물론 세 배우들, 김갑수 김수철 이지은 등 역시 이상에 관한 ‘사전학습’에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지요.
특히 어렸을 때 유모가 바닥에 떨어뜨려 곱추가 된 구본웅 역을 맡았던 김수철은 당시 인터뷰에서 “너무 어려운 역할이어서 구본웅에 대한 자료를 가능한 한 많이 찾아보고 공부했다”면서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 같은 ‘화자’의 역할까지 더해서 어깨가 무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뭐니뭐니해도 금홍 역의 이지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가장 많이 쏟아졌습니다. 이지은은 KBS 2TV드라마 ‘느낌’에서 신선한 매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신예였는데, ‘금홍아 금홍아’에서는 신인답지 않은 과감한 노출연기 등 당찬 연기력으로 김갑수 김수철 등 선배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미 영화포스터에 “이땅, 충격적 性스캔들!!‘이라는 헤드카피를 내걸어 ’19금‘을 과시했습니다만 그보다도 영화 속에서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상을 향해 “한 군데도 쓸모없는 병신”이라고 표독스럽게 일갈하는 등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평가됐습니다.
원래 금홍 역에는 전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 여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대대적인 신인배우 공모(오디션)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제작사(태흥영화)와 김유진 감독은 구름같이 몰려든 신인급 여배우들 중에서 적임자를 찾지 못했고, 그후 거의 1년 가까이 금홍 역의 여배우들을 물색하던 끝에 이지은을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또한 기대 이상이었지요. 이지은은 ‘금홍아 금홍아’에서의 열연으로 그해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습니다.
구본웅 역의 김수철은 "구본웅에 대한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공부했다"면서 촬영 당시 연기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흥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각색에 참여한 송능한(‘넘버3’의 감독)과 육상효(‘아이언 팜’의 감독), 그리고 김홍준(‘장밋빛 인생’의 감독) 등이 우정출연해서, 그럴듯한 연기를 펼쳐보였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잠깐 소개되는 ‘이런 詩’의 한 부분에서는 금홍을 향한 이상의 절절한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금홍 역의 여배우를 물색하기 위해 거의 1년여를 보낸 끝에 만나게 된 이지은. 신인답지 않은 과감한 노출 등 당찬 연기력으로 김유진 감독 등 제작스태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상 역의 김갑수(왼쪽)와 구본웅 역의 김수철(오른쪽). 두 사람은 영화 '태백산맥'에서도 배우와 영화음악감독의 관계로 만났다.
'태백산맥'에서 출중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김갑수는 '금홍아 금홍아'에서도 이상 역을 꿰찰 수 있었다.
'금홍아 금홍아'의 여주인공 금홍 역의 여배우를 선발하기 위해 열린 오디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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