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 29일 토요일, 서울 종로3가의 서울극장 매표소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관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습니다. ‘닥터 봉’(이광훈 감독)이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제목에서 풍겨지는 느낌이 웬지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극장의 간판이나 영화포스터 또한 마치 상반신을 벗은 듯한 남녀 주인공(한석규-김혜수)의 우스꽝스런 포옹 포즈가 코미디영화임을 한눈에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을 통한 영화정보가 많지 않은 그 시절에도 관객들은 ‘재미있는 영화’를 눈치로 알아채렸던 겁니다. 거기에다 개봉 주말 다음 월요일은 5월1일 메이데이였고, 또 그 주의 금요일은 5월5일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연휴 낀 주말에 개봉된 여세가 그 다음 주말 연휴로 또다시 이어지는 형국이었으니, ‘닥터 봉’의 흥행은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이어졌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오는 관객들은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만큼 즐겁게 영화를 관람했다는 거죠. ‘닥터 봉’에서 한석규는 홀아비 바람둥이 치과의사로 나옵니다. 김혜수는 그의 병원을 찾은 환자였구요. 첫 대면에서 닥터 봉이 이런 대사를 날립니다. “자, 크게 벌려요” 그리고 이어서 “아프더라도 소리 지르지 말고”라더니 마침표를 찍듯 “처음엔 다 그래”라고 말합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얼핏 성인용 코미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영화는 의외로 건전합니다. 홀아비 치과의사에게 어린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 아들이 여주인공 김혜수를 자기 아빠(한석규)와 이어주는 매개 노릇을 아주 당차면서도 귀엽게 해냅니다. 가벼운 로맨틱코미디에 따뜻한 가족애를 얹어서 그야말로 재미를 톡톡히 봤습니다. 40만명 가까운 관객들이 ‘닥터 봉’을 기분좋게 봤습니다.
‘닥터 봉’이 바로 한석규의 영화데뷔작입니다. 성우 출신으로 연기에 입문한 그는 1991년부터 주로 TV드라마에서 활동했습니다. 성우 시절에 훈련된 정확한 발음으로 안정된 연기를 펼쳐왔던 그는 특히 MBC TV드라마 ‘서울의 달’(1994년)에서 ‘제비족 홍식’ 역할을 감칠 맛 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 잘 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또 성공에만 집착하며 주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비열한 캐릭터의 양아치 건달이었지만 홍식이란 인물은 그를 매력적인 연기자로 자리매김하게 한 디딤돌이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닥터 봉’으로 영화계에 연착륙했고, 이후 그는 TV브라운관 보다는 주로 스크린에서 연기활동을 펼쳤습니다. 흔히 한석규의 영화전성기라고 일컬어지는, 1995년 ‘닥터 봉’에서부터 1999년 ‘쉬리’(강제규 감독)와 ‘텔 미 썸딩’(장윤현 감독)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국영화계의 독보적인 흥행배우로 군림했습니다. 동시대에 함께 연기활동을 펼쳤던 어느 배우들보다 압도적인 흥행파워, 이른바 ‘티켓파워’를 지닌 배우로 인식됐습니다.
영화 '넘버3'(1997년, 송능한 감독)에서 열연하는 한석규.
‘닥터 봉’에 이어 그는 ‘은행나무 침대’(1996년, 강제규 감독)에 출연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를 확고한 흥행배우의 반열에 올려준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환타지 요소를 가미한 이야기와 화려한 영상미는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발전을 피부로 느끼게 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네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천년이라는 시공간을 두고 펼쳐지는 영화에 관객들의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4개월여 동안 상영되어 68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객동원 기록을 남기면서 ‘천년 전생의 궁중악사’로 열연한 한석규에게는 또 하나의 훈장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영화 ‘초록 물고기’(1997년, 이창동 감독)를 만납니다. 이 영화에서 한석규는 우연히 암흑가의 조직으로 흘러들었다가 순수한 열정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막동이란 인물을 그려냈습니다. “한국영화에서 이보다 더 뛰어난 리얼리즘 갱스터영화는 없다”는 극찬을 듣는 데는 이창동 감독의 뛰어난 연출솜씨와 더불어 한석규의 막동이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한석규는 흥행배우’라는 영화계의 등식을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이른 연기’라는 극찬을 받기까지 했으니까요.
특히 ‘초록 물고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펼쳐지는 공중전화박스에서의 전화장면은 가히 명장면으로, 한석규 연기의 정점으로 꼽히는 장면입니다. 조직의 보스(문성근)에게 이용당하고 죽음을 맞게 된 막동이가 형과 마지막으로 전화통화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절절하게 연기해냈습니다. “큰 성! 나 막동이야, 엄마 있어? 아이씨! 엄마 어디 갔어? 나? 나, 잘있어, 흐으으으,,,, 큰 성! 전화 끊지마, 끊지마, 흐으으으,,,,” 울음을 삼키며 큰 형과 어린 시절에 낚시가던 일을 회상하는 이 대목에서 많은 관객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지요.
그 다음 출연작 ‘넘버 3’(1997년, 송능한 감독)에서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영화 안에서도 조직의 ‘넘버3 태주’라는 인물을 확실하게 살려냈고, 그 다음 출연작 ‘접속’(1997년, 장윤현 감독)에서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정중동’(靜中動)의 잔잔한 내면연기로 진한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그 다음 해(1998년)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감독)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진사(정원)로 나와 주차단속원(다림, 심은하)과의 잔잔한 로맨스를 담백하면서도 절제된 연기로 펼쳐보였습니다. 관객들은 물론 영화관계자들까지도 “도대체 한석규가 못하는 연기는 어떤 것일까”라고 궁금해 할 만큼 한석규의 연기는 빼어났습니다.
1998년 한석규 인터뷰(스포츠코리아 사진 DB)
그런데 ‘한석규의 전성기’라 일컫는 이 시절에 출연한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데뷔 감독의 작품이었습니다. ‘닥터 봉’의 이광훈 감독,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감독, ‘초록 물고기’의 이창동 감독, ‘넘버 3’의 송능한 감독, ‘접속’의 장윤현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 등 모두 첫 영화를 찍는 감독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과 자신의 영화전성기를 구가해온 겁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신인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 이유에 대해 “배우의 입장에서는 매 작품마다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데, 신인감독들은 이런 문제를 배우 이상으로 함께 고민해주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인감독의 도전적인 기운이 배우의 매너리즘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앞에서 언급한 ‘한석규의 영화전성기‘의 영화들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연속해서 말입니다. ’한석규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영화 '초록 물고기'(1997년,이창동 감독)의 스틸 컷.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상승세는 주춤했습니다. ‘텔미 썸딩’(1999년, 장윤현 감독) 이후, 3년여 동안 그의 모습은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스스로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겠지만 그 사이에 한국영화계는 한석규의 대체제를 찾아냈던 겁니다.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등은 ‘공동경비구역 JSA'나 ’공공의 적‘ ’파이란‘ 등을 통해 진지한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훤칠한 미남형 배우들인 장동건 차승원도 ’친구‘나 ’광복절 특사‘ 등의 영화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져놓았지요.
그래서 2000년대 이후 한석규의 필모그라피는 차곡차곡 쌓여오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표작‘이 많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중간첩‘(2003년, 김현정 감독)을 비롯해서 ’주홍글씨‘(2004년, 변혁 감독), ’그때 그 사람들‘(2005년, 임상수 감독), ’미스터 주부퀴즈왕‘(2006년, 류선동 감독), ’음란서생‘(2006년, 김대우 감독) ’구타 유발자들‘(2006년, 원신연 감독)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8년, 곽경택 감독) 등등.
하지만 그는 ‘베를린’(2013년, 류승완 감독)에서의 호연으로 다시한번 존재감을 과시했으며, ‘프리즌’(2017년, 나현 감독)에서는 30년 가까운 연기인생 가운데 처음으로 악역을 ‘멋지게’ 해냈습니다. 그의 연기 원칙을 아는 영화관계자들은 이렇듯 ‘한석규의 건재’를 믿습니다. 그는 연기자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당히’ 연기한 적이 없습니다. 배우로 살아가면서 그는 언제나 성실하게 연기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영화 `Mr.주부퀴즈왕`(2005년, 유선동 감독) 촬영 현장.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2006년, 변승욱 감독)의 스틸컷.
2008년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곽경택 감독)의 엔딩장면 촬영을 앞두고 가진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한석규와 차승원.
2008년 김정은의 뮤직쇼에 참가해 열창하는 한석규.
영화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년, 박신우 감독)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한석규.
'닥터 봉'이후 15년만에 다시 만난 한석규, 김혜수의 코믹 연기 대결로 화제를 모은 영화 `이층의 악당`(2010년, 손재곤 감독)의 제작보고회.
2011년 훈민정음 반포 전 7일간 집현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룬 SBS 수목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사극 촬영현장 공개에서 세종대왕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
2011년 ‘뿌리 깊은 나무’(김영현 박상연 극본, 장태유 연출)제작발표회
`2011 SBS 연기대상`에 참석해 `뿌리 깊은 나무`로 대상을 수상한 한석규.
영화 `베를린`(2013년, 류승완 감독) 언론 시사회에 참석한 한석규.
2013년 영화 ‘베를린’ VIP시사회에 참석해 팬들에게 사인하는 한석규.
2016년 SBS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제작발표회.
영화 `프리즌`(2017년, 나현 감독)의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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