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중년 여배우들의 해외배낭 여행기를 담아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tvN)가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미 이보다 앞서 방송됐던 ‘꽃보다 할배’의 신선한 기획 성공의 영향도 있었지만 배낭여행에 나선 윤여정, 故김자옥, 김희애, 이미연 등 네 중년 여배우의 좌충우돌 해프닝이 ‘꽃보다 할배’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안겨줬습니다. 특별한 콘티 없이 민낯으로 카메라에 찍히는 그녀들의 자잘한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그야말로 참신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던 겁니다. 이중에서도 특히 네 여배우들의 막내였던 이미연이 시청자들의 연민을 자극하며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도그럴 것이 ‘꽃보다 누나’에 등장하기 이전까지 한동안 이미연은 스크린이든 TV브라운관이든 별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정확하게 짚어보면 영화에서는 ‘어깨너머의 연인’(2007년, 이언희 감독)과 ‘회사원’(2012년, 임상윤 감독) 이후 출연작이 없었습니다. TV드라마 또한 SBS TV드라마 ‘사랑에 미치다’(2007년)와 KBS TV드라마 ‘거상 김만덕’(2010년) 이후에는 출연작이 없었습니다. 이미연 스스로 ‘슬럼프’라고 얘기했을 만큼 그녀는 6~7년 동안 이상하리만치 ‘조용히’ 지냈던 겁니다.

영화'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의 교실 촬영현장 모습.

이미연이 누굽니까? 1971년생, 올해 마흔일곱의 그녀는 1987년 세화여고 1학년때 미스롯데에 선발되어 광고모델을 시작했을 때부터 많은 청소년들의 ‘책받침 우상’으로 떠받들어져 왔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하이틴 영화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강우석 감독)을 비롯해서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년, 김성홍 감독),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1991년, 조금환 감독), ‘가을여행’(1992년, 곽재용 감독) 등에서는 부동의 여주인공으로 활약했지요.

또 성인 연기자로 성장한 후에도 많은 영화와 TV드라마를 통해서 그녀는 때로는 청순가련의 여인으로, 때로는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천의 얼굴’을 유감없이 펼쳐보였습니다.

그리고 스물네살이었던 1995년에는 동료배우 김승우와 깜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스물네살 여자 연예인의 결혼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미연이야 톱스타급이었지만 김승우는 군에서 막 전역한 신인배우였던 터라 그들의 결혼식은 말많은 연예가의 화제거리로 한동안 회자됐습니다.

이미연은 늘 이렇게 씩씩했습니다. 자신의 소신과 신념이 분명했습니다. 옳다고 판단되는 일에는 주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설사 훗날 그 판단과 결정이 섣부른 것이었다고 판명되더라도 후회하는 법 또한 없었습니다. 배우로서 그녀의 필모그라피에는 이같은 그녀의 판단과 결정으로 출연한 작품들이 빼곡합니다.

이미연은 결혼 후에도 ‘넘버3’(1997년, 송능한 감독) ‘여고괴담’(1998년, 박기형 감독) ‘내 마음의 풍금’(1999년, 이영재 감독) 등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변함없는 연기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김승우는 이미연과의 결혼 후에는 신인의 딱지를 떼고 ‘고스트 맘마’(1996년, 한지승 감독)를 비롯해 ‘깊은 슬픔’(1997년, 곽지균 감독) ‘남자의 향기’(1998년, 장현수 감독) ‘신장개업’(1999년, 김성홍 감독) 등에서 당당한 주연배우의 자리로 올라섰습니다. 몇몇 영화 관계자들은 김승우에게 “이미연과의 결혼이 가져다준 축복”이라며 축하했습니다. 두 사람 역시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연예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요.  

1990년대 이미연 인터뷰(스포츠코리아 사진DB)

하지만 이미연은 김승우와의 결혼 5년만에 파경을 맞았습니다. 물론 이미연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씩 부부싸움을 하거나 성격 차이로 충돌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만 이미연은 해소되지 않은 갈등을 안은 채 결혼관계를 지속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차라리 동료처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결정한 겁니다.

당시 이미연 김승우 부부와 가깝게 지내던 필자는 여러차례 두 사람에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며 결혼생활의 지속을 조언했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김승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연은 단호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이혼 후에 이미연은 부부시절보다 더 가깝게 김승우와 친구처럼 지냈다는 점입니다. 간혹 그녀는 쫑파티 등 관계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과음이라도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승우 좀 불러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연락을 받은 김승우 역시 금세 달려왔지요. 그리고는 “야,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냐?”고 타박하면서 그녀를 등에 업고 집에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2000년 청룡영화상에서 '물고기 자리'에서의 열연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미연.

이미연은 김승우와의 이혼 후, 연기 활동에서 훨씬 자유로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감정과 심리 표현에 있어서 탁월한 배우였지만 영화 ‘물고기 자리’(2000년, 김형태 감독)와 ‘인디언 썸머’(2001년, 노효정 감독)에서는 그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슬픈 눈빛’ 연기가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언제라도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듯한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누구라도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 집착하는 여인(물고기 자리)의 간절한 눈빛이나, 변호인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그저 애잔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가는 사형수(인디언 썸머)의 눈빛은 그야말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물고기 자리’에서의 열연은 그녀에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주었고, ‘인디언 썸머’는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영화에 출연하던 무렵에 촬영을 시작했던 KBS TV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에서의 열연은 그녀의 배우인생에서 최고의 명연기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19세기 말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조선에서 허약한 국권과 왕권을 지키기위해 정면으로 맞서다 참혹한 죽음을 맞은 명성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이 드라마에서 이미연은 “명성황후의 빙의”라는 극찬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특히 이 드라마의 백미로 꼽히는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며 장렬한 죽음을 맞는 이미연의 비장한 모습은 당시 가뜩이나 외환위기로 어렵던 시대에 식민사관에 대한 거센 비판과 함께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식의 변화 등과 맞물려 ‘명성황후’ 신드롬을 거세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른 주제곡 ‘나 가거든’의 OST음반이 30만 장 넘게 팔렸을 정도입니다. TV드라마의 OST음반으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이후 명성황후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들이 만들어졌고, 심지어는 영화(불꽃처럼 나비처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2002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인기스타상을 수상하고 기뻐하는 모습.

그런데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이미연의 연기활동은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흔히 여배우들은 30대 중후반을 넘어서면 배역 선택의 폭이 줄어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미연의 경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영화나 TV드라마의 출연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몇몇 관계자들은 김승우의 재혼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하고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놓기도 했습니다만 ‘여걸 이미연’의 캐릭터로 볼 때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공교롭게도 ‘김승우 김남주 결혼’과 또 ‘자녀들의 출산’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왔던 터라 혹시나 싶을 수는 있겠지요. 바로 이런 무렵에 이미연의 ‘꽃보다 누나’ 출연 소식이 들려왔고, 또 그 프로그램 안에서 이미연의 ‘존재’가 다시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연예가에서 ‘여자 최민수’로 불렸을 만큼 누구에게나 거침 없고 당당한 그녀가 ‘꽃보다 누나’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여린 여인’의 모습을 드러냈던 겁니다. 여행 내내 씩씩했던 그녀가 우연히 마주친 팬으로부터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연민의 시선을 갖게 됐지요.

그래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던 ‘연출 여행’을 통해서 그녀 자신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다시 자유로워진 듯 합니다. 안방극장의 대표적인 인기 드라마였던 ‘응답하라 1988’(tvN)에서 여주인공 성덕선의 현재 모습으로 인터뷰식 연기를 펼치며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아마 예전 같으면 특별출연 형식의 연기는 거절했을 테지만 ‘내려놓은’ 자유로움이 이런 출연도 가능하게 한 겁니다. 그리고는 또 연하의 남성과 티격태격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낸 영화 ‘좋아해줘’(2016년, 박현진 감독)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밝은 캐릭터로 팬들을 만났습니다.

머지않아 50대에 접어들 여배우 이미연의 광폭 행보도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되는가 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2005년 프로야구 두산-LG의 개막전에서 멋진 폼으로 시구하는 이미연. 

영화 '어깨너머의 연인'(2005년,이언희 감독)의 제작발표회. 

2008년 ‘제2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CHIFFS 2008)’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는 이미연.

2008년 '16회 춘사영화대상' 시상식에서 영화 ‘어깨 너머의 연인’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미연. 

2008년 제29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이미연. 

2012년 영화 '회사원’ (2012년, 임상윤 감독)의 시사회에 참석한 이미연.  

영화 `좋아해줘`(2016년,박현진 감독)의 시사회에 참석한 이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