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지는 도심 한복판, 웬 중년 사내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피범벅된 얼굴을 감싸쥐면서 길가에 나동그라집니다. 눈알이 도려내진 채로 그렇게 쓰러진 그 사내 앞으로 칼을 손에 쥔 가죽점퍼의 젊은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섭니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수군거리며 이 상황을 지켜봅니다. 가죽점퍼의 사내는 쓰러진 사내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오토바이에 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영화 ‘본 투 킬’(1996년, 장현수 감독)의 첫 장면입니다. 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영화시장을 휩쓸었던 홍콩 느와르영화를 연상케 하는, 섬찟한 핏빛으로 시작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정우성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정우성의 캐릭터는 힘든 삶을 비관한 어머니가 철길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하려던 찰나,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나온 ‘길’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거리의 사내로 살아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암흑가의 킬러로 자리잡은 그는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콜라를 마십니다. 늘 야마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킬러의 임무를 완수한 뒤에 현금으로 받은 수고비는 그대로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고독한 킬러’일 뿐입니다.
90년대 청춘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정우성이 '본 투 킬'의 킬러 길 역을 맡았다.
영화 ‘본 투 킬’에는 정우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청순 백치미를 뽐냈던 심은하가 출연했습니다. 이 시절에 정우성과 심은하의 캐스팅 조합이면 영화내용과 상관없이 투자사들이 앞다퉈 제작비를 내놓을 때였습니다. 모델 출신의 정우성은 데뷔 시절부터 주목을 받은 여세를 몰아 SBS TV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1995년)로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급부상하고 있었고, 심은하 역시 MBC TV드라마 ‘마지막 승부’(1994년)를 통해 MBC연기대상에서 여자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둘 다 영화와 방송가로부터 집요하게 ‘콜’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우성과 심은하는 아마도 최소 20여편 이상의 시나리오 중에서 ‘본 투 킬’을 선택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 유행처럼 번지던 코미디 영화들에 대한 식상함과 안방극장(SBS TV)에서 선풍을 일으킨 ‘모래시계’로 인한 액션장르에 대한 기대감까지 합쳐져 ‘본 투 킬’의 영화화와 정우성 심은하의 캐스팅이 가능했던 겁니다.
여기에다 장현수 감독이 전작 ‘걸어서 하늘까지’(1992년)와 ‘게임의 법칙’(1994년)을 통해서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솜씨있게 영화로 만들어온 기대주였다는 점도 단단히 한 몫했습니다. 故 곽지균 감독의 조감독으로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년)과 ‘젊은 날의 초상’(1990년)을 작업해오면서 영화관계자들로부터 일찌감치 ‘될 성 부른 떡잎’으로 여겨져왔는데, 그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 사람, 정두홍 무술감독의 가세도 빼놓을 수 없는 ‘본 투 킬’의 기대요인이었습니다. 장현수 감독의 전작들에서 호흡을 맞춰 멋진 액션연기와 장면들을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본 투 킬’은 영화 기획단계, 이른바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흥행은 따놓은 당상’처럼 기대를 모았습니다. 촬영이 시작되면서는 ‘본 투 킬’의 촬영현장을 통제하는 게 제작스태프들의 ‘큰 임무’였을 만큼 일반 대중의 호기심도 상당했습니다. 촬영현장에는 늘 정우성과 심은하의 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요즘처럼 SNS가 활성화되던 때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촬영스케줄들을 알아내 찾아오는지 제작진들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래서 정우성과 심은하의 매니저들 또한 만약의 돌발상황에 대비하느라고 늘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인 정우성과 심은하의 캐스팅으로 '본 투 킬'은 촬영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본 투 킬'의 촬영현장에는 늘 정우성과 심은하의 팬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 없이 하루하루 킬러의 삶을 살던 길(정우성)은 어느날, 건너편 아파트에 시선을 주게 됩니다. 새벽 3~4시쯤에 귀가하는 수하(심은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길의 또다른 일과가 됩니다.
수하는 룸살롱 호스티스로 일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는 낯선 여자일 뿐인데, 길은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킬러의 임무를 끝내고 귀가하던 중, 술에 취해 쓰러진 수하를 집에 바래다주게 됩니다. 난생 처음 여인의 향기를 느끼면서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힌 길, 수하 역시 길의 감정과는 다르지만 장난스럽게 길에게 다가갑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려는 찰나,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수하는 길의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돈을 갖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수하는 초라해진 모습으로 다시 길에게 돌아옵니다. 길은 묵묵히 수하를 안아줍니다. 비로소 수하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수하를 사랑하는 길도 킬러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길의 갈등을 눈치 챈 염사장(김학철)은 마지막으로 길을 킬러로 키워준 두목(조경환)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길이 킬러였음을 알게 된 수하는 길에게 염사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함께 도망칠 것을 제안합니다. 길도 수하의 뜻에 따르기로 하는데, 곧바로 염사장의 조직원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결국 길은 수하를 살리기 위해 염사장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어린 시절, 자신을 거둬준 두목을 찾아가 그의 앞에 선 길은 주저합니다.
이때 염사장의 조직원들이 들이닥치면서 처절한 혈투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워낙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길과 두목은 궁지에 몰리고, 마침내 두목은 염사장의 조직원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홀로 남은 길 또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수하와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염사장의 칼에 숨을 거둡니다.
다분히 느와르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본 투 킬'에서의 킬러 길 역으로 열연한 정우성.
영화 촬영 이전부터 적지 않은 기대를 모았던 ‘본 투 킬’이었는데, 정작 극장에 간판을 내건 이후의 흥행성적은 기대에 훨씬 못미쳤습니다. 오히려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이 뉴스로 다뤄질 정도였습니다. 정우성 심은하의 조합도 무색해지고 말았지요. 당시 이 영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점도 낮은 편이었습니다.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들에 대한 표현 수위를 혹평의 이유로 들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본 투 킬’은 첫 장면에서부터 눈알을 도려내는 등의 잔혹한 장면들로 가득했습니다. ‘한국형 느와르‘를 표방하며 ’비장미‘로 포장했지만 관객들은 핏빛 가득한 영화를 호감갖고 봐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아마 ’본 투 킬‘의 이야기가 조금만 더 그럴 듯했으면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킬러와 호스티스와의 사랑이라는 진부한 소재, 그리고 어린 시절 동반자살을 시도하던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도망쳐나온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던 길이 수하를 만나자마자 해소된다는 설정 등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으니까요.
당시 ‘본 투 킬’은 제작비도 적잖이 들었습니다. 순제작비만도 20억원, 마케팅 개봉 비용까지 포함하면 30억원 정도 들었는데, 13만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습니다. 당시 ‘본 투 킬’의 제작사 관계자는 영화개봉 전에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LA다저스의 박찬호 선수가 시카코 커브스를 상대로 4이닝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대중의 관심이 급격하게 미국 메이저리그로 옮겨간 것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고 둘러대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박찬호 선수의 메이저리그 첫 승은 큰 뉴스이긴 했지요. 그러나 억지 변명이라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본 투 킬’의 개봉 후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정우성은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의 파트너들 중 누구와 다시 연기호흡을 맞춰보고 싶으냐는 질문에 “내게는 레전드와도 같은 심은하씨와 다시 연기해보고 싶다”는 소회를 밝혀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본 투 킬'의 킬러 길 역을 맡아 늘 말보로 담배를 피워무는 설정으로 눈길을 끌었던 정우성.
장현수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심은하.
'본 투 킬'의 촬영에 앞서 분장 중인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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