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여성감독의 활약상을 더 이상 ‘뉴스거리’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숫적으로는 여전히 남성감독에 비해 소수입니다만 여성감독들의 연출 활동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최근에만도 현역 여성감독 중 최고참급인 임순례 감독이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등의 배우와 함께 ‘리틀 포레스트’(2018년)라는 상큼한 저예산영화를 선보인 것을 비롯해 배우 출신의 방은진 감독이 ‘메쏘드’(2017년 11월)를, 또 이언희 감독이 성동일 권상우 주연의 ‘탐정2’의 촬영을 마치고 올 상반기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감독들은 임순례 감독과 방은진 감독, 이언희 감독 외에도 위안부할머니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밀애’(2002년) ‘발레교습소’(2004년) ‘화차’(2012년) 등을 만든 변영주 감독, ‘집으로’(2002년) ‘오늘’(2012년) 등을 연출한 이정향 감독, ‘파주’(2009년)로 여성영화인상(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옥 감독, ‘고양이를 부탁해’(2001년)로 데뷔해 ‘태풍 태양’(2005년) ‘말하는 건축가’(2011년) ‘고양이를 돌려줘’(2012년) 등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정재은 감독, 미스테리 스릴러 ‘4인용 식탁’으로 데뷔한 이후 ‘해빙’(2017년) 등의 스릴러 영화를 만들며 여성 스릴러 감독의 대표주자로 평가받고 있는 이수연 감독 등이 있습니다.
기존 여성감독들의 영화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여성감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 소녀의 우정과 사랑, 미움과 질투 등 유년 시절의 복잡한 감정과 고민을 섬세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담아낸 ‘우리들’(2016년)의 윤가은 감독은 평단의 폭발적인 호평을 이끌어내면서 화려하게 제도권영화계에 진입했습니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로 청룡영화상을 비롯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부일영화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등의 신인감독상을 휩쓸었습니다. 저예산독립영화의 축제인 들꽃영화제에서는 대상의 영예를 안기까지 했지요.
이처럼 요즘 한국 영화계에서는 여성감독의 활약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만 세월을 20년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도 여성감독은 마치 ‘천연기념물’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영심이’(1990년)가 바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유일한 여성감독으로 활약했던 이미례 감독의 대표작입니다.
'영심이'의 두 주인공 왕경태 역의 전원석(왼쪽)과 영심이 역의 이혜구(오른쪽).
1984년 일본소설을 영화화한 ‘수렁에서 건진 내딸’로 데뷔하던 당시 스물일곱 살의 이미례 감독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신문 문화면의 뉴스로 실렸습니다. 여성감독의 출현이 그만큼 대중의 시선을 끌 만한 일이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이미례 감독이 한국영화사에서 다섯 번째 여성감독인데, 그 앞의 네 번째인 황혜미 감독의 ‘첫경험’(1970년) 개봉 이후 무려 15년만에 여성감독의 영화가 다시 등장한 것이었으니까요.
한국에서 최초의 여성감독은 박남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망인’(1955년)이라는 영화가 박남옥 감독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단 한 편의 영화만 찍고 만 거지요. 당시 박남옥 감독은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메가폰을 잡고 영화를 찍었습니다. 심지어는 30여명의 제작스태프들의 식사를 직접 해먹여가면서 영화촬영을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박남옥 감독 이후 두 번째 여성 감독이 ‘여판사’(1962년) 등을 만든 시나리오작가 출신의 홍은원, 세 번째 감독은 당시 인기배우였던 최은희가 故 신상옥 감독의 지원으로 ‘민며느리’(1965년)를 연출하면서 기록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첫경험’의 황혜미 감독이었습니다. 서울대 문리대불문과 출신의 황혜미 감독은 ‘첫경험’외에 ’슬픈 꽃잎이 질 때‘ ’관계‘ 등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만 ’첫 경험‘만이 극장에서 개봉됐습니다. .
하이틴 배우 이혜구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영심이를 연기해내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다섯 번째 여성감독 이미례의 데뷔작 ‘수렁에서 건진 내딸’은 비록 일본영화를 표절했다는 구설에 휘말리기는 했지만 12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한국의 여성감독들 중 최초의 흥행감독이라는 수식어도 갖게 된 겁니다.
때문에 이미례 감독은 자신보다 앞선 여성감독들의 경우와는 달리 연달아서 영화를 찍고 개봉할 수 있었습니다. ‘고추밭에 양배추’(1985년)를 비롯해 ‘물망초’(1987년) ‘학창보고서’(1987년)까지 3년여 동안 무려 4편의 영화를 연출했습니다. 다만 ‘수렁에서 건진 내딸’ 이후에 연출한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후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그럼, 그렇지. 여자감독이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수 있겠어?”라는 회의적인 시선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요. 이 바람에 이 감독은 한동안 영화연출의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3년여의 와신상담 끝에 만든 영화가 ‘영심이’(1990년)였습니다. 당시 청소년들의 인기를 끌던 스포츠신문에서 연재되던 배금택의 원작만화 ‘영심이’를 영화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만화에서는 여주인공 영심이가 중학교 1학년생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여고 1년생, 호기심 많은 사춘기의 정점을 지나는 영심이로 설정됐습니다. 하이틴 배우 이혜근이 맡아 뛰어난 연기력을 뽐냈고,, 영심이를 좋아하여 따라다니는 왕경태 역에는 가수 전원석이 맡아 주목을 받았습니다.
청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영화 속의 영심이도 인기가수(박남정)에 환호하는 ‘오빠부대‘로 등장하는데, 가수 박남정은 영화 속의 인기가수 박남정으로 특별출연했습니다. 영심이가 박남정의 콘서트장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오빠‘를 연호하는 모습이 영화 속의 TV장면으로 나올 때, 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니, 저거 영심이 아냐?”라며 놀라는 표정을 짓는 영심이의 동생 순심이 역으로 이재은이 나와 깜찍한 연기를 펼쳐보였습니다. 언니 영심이한테 꼬박꼬박 “영심이 영심이”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 역할을 그야말로 똑부러지게 해냈습니다. 훗날의 이재은을 생각하면 ’될 성 부른 떡 잎‘이었던 셈입니다.
영심이의 동생 순심이 역의 아역배우 이재은(왼쪽에서 두번째)에게 연기지도하고 있는 이미례 감독(왼쪽에서 세번째)
왕경태 역의 가수 전원석도 기대 이상의 연기솜씨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순진하고 어수룩한 모습으로 좋아하는 영심이를 졸졸 따라다니던 경태가 영화 후반부에 불량배들에게 곤욕을 치르게 된 영심이를 보호하기 위해 부상을 무릅쓰고 불량배들에게 덤벼드는 장면은 잔잔한 감동마저 불러 일으켰지요.
이 영화에는 유난히 특별출연한 가수들이 많았습니다. 박남정 외에도 노사연이 체육선생님으로 등장했고, 김민종도 영심이의 미팅 파트너로 잠깐 나와 특유의 ‘느끼한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또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박남정의 백댄서들이 총출동하여 현란한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장면은 당시 청소년 관객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결국 ‘영심이’는 신선한 얼굴의 배우들과 특별출연한 가수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아기자기한 스토리라인으로 청소년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흥행에서도 제법 좋은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통과의례와도 같은 청소년기를 사실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그려낸 이미례 감독의 연출력 또한 다시한번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지요.
영화 속에서 영심이와 순심이 자매로 열연한 이혜구와 이재은.
‘영심이’의 영화적 성공은 이후 TV드라마의 리메이크를 낳았고, 영화소설로도 출간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2007년에는 ‘영심이’와 80~90년대 인기 쇼프로그램인 ‘젊음의 행진’을 바탕으로 새롭게 제작한 주크박스 콘서트 뮤지컬 ‘젊음의 행진’이 현재까지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습니다. 서른다섯 살로 성장한 영심이가 ‘젊음의 행진’ 콘서트를 준비하던 중 학창시절 단짝 왕경태를 만나 추억을 소환하는 내용으로 펼쳐지는데, 개그우먼 신보라의 영심이 열연이 단연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이미례 감독은 ‘영심이’ 이후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1991년)를 한 편 더 찍었습니다만 그후에는 영화 연출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그보다는 서울 인사동 등에서 ‘여자만’이라는 남도음식점을 솜씨있게 경영하면서 요식업 사장님으로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가수 노사연(뒷편 지휘봉 들고 있는)이 체육선생님으로 특별출연했다.
촬영을 모두 마치고 출연배우들이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뒷줄 왼쪽이 김민종, 앞줄 가운데 노사연. 노사연의 왼쪽이 이혜구, 오른쪽이 전원석.
'영심이'의 촬영현장. 연출하는 이미례 감독(사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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