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배우극장] 박신양 `연기는 구도의 길`

기사입력 [2018-04-0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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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여름, 극장가에는 제목도 내용도 낯선 유리’(양윤호 감독)라는 영화가 개봉됐습니다. 출연배우들의 면면도 모두 생경했습니다.

뱃사공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창녀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남자의 아들이며, 또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니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빼앗아간 남자들에 대한 질투와 증오를 삼키며 성장한 후에는 죽음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구도의 길에 나섭니다.

 

1975년에 출간된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주인공 유리로 출연했던 배우가 박신양이었습니다. 관객들도 처음 보는 배우였지만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습니다.

그런데 삶의 번민을 다루는, 다분히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이 영화 속에서 유리 역의 박신양은 눈에 띄는 연기력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다른 수도승의 눈알을 뽑거나 돌로 찍어 죽이는 장면들은 섬뜩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촬영해놓은 장면 중에는 극장에서 공개된 것보다도 훨씬 더 잔혹한 살인, 강간 등의 장면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 모든 장면들을 박신양은 거침없이 연기해냈습니다. 영화의 흥행결과는 저조한 편이었지만 관객들과 영화 관계자들에게 박신양이라는 배우는 걸출한 신인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유리에서의 열연은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의 신인배우상도 안겨줬습니다.

 

박신양은 이렇게 대중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그의 이력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이며, ‘유리의 양윤호 감독과 배우 최준용, 엔터테인먼트기업인 싸이더스HQ의 정훈탁 대표 등이 동기였습니다.

이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동국대 졸업 후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는 점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한 연기론의 발원지가 러시아라는 점 때문이었답니다. 쉐프킨 연극대학교와 슈킨 연극대학교에서 3년여 동안 연기를 공부하고 돌아와 처음 출연한 영화가 유리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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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편지'(1997년, 이정국 감독)에서 조환유 역으로 출연했던 박신양. 

 

유리이후 박신양의 존재감은 금세 드러났습니다. 1997년 영화팬들의 눈물콧물을 쏙 뺀 최루성 멜로영화 편지’(이정국 감독)에서였습미다. 사랑하는 아내(최진실)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할 아내에게 생전에 써둔 편지로 둘의 사랑을 회고하는 가슴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에 그야말로 온 장안의 여성팬들은 체면을 무릅쓰고 엉엉 울어야 했습니다. ‘편지에서의 박신양은 유리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다른 배우 같았습니다.

그리고 편지에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약속’(1998, 김유진 감독)으로 또다시 영화팬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본격 신파를 표방했던 편지와는 또다른 멜로영화였는데, 조직폭력배 보스 공상두라는 인물로 나와 거친 암흑가의 혈투 가운데서 자신을 치료해준 여의사(전도연)와 이루기 힘든 사랑을 펼쳐냈습니다. 조직의 명운이 걸렸지만 사랑하는 여인에게만큼은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암흑가 사내의 러브 느와르가 관객의 가슴을 저미게 했지요. 특히 경찰에 자수하기에 앞서 성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치르는 장면은 오래도록 관객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 결혼식 장면을 찍은 전북 전주의 전동성당이 약속개봉 이후, 전주의 으뜸가는 명소로 자리잡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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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박신양(스포츠코리아 DB)

 

편지약속의 성공으로 박신양은 한국 멜로영화의 히어로 반열에 오르게 됐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 멜로영화의 독점적 주인공은 한석규였습니다. ‘닥터 봉‘(1995, 이광훈 감독)을 비롯해 은행나무 침대‘(1996, 강제규 감독), ’초록 물고기‘(1997, 이창동 감독), ’접속‘(1997, 장윤현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 감독) 등 히트 멜로영화에는 항상 한석규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신양이 나타나 한석규의 새로운 라이벌로, 아니 그것보다는 한석규의 뒤를 이을 멜로영화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겁니다.

 

하지만 박신양은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약속이후의 멜로영화에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동국대 연극영화과 동기인 양윤호 감독의 연출로 역시 동기인 정훈탁 대표의 매니지먼트사 여배우 전지현과 함께 찍었던 화이트 발렌타인은 흥행에 참패, 한국 멜로영화의 새로운 주역이라는 찬사가 무색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박신양이 걸어온 연기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저절로 알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는 사실 장르에 얽매이는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장르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메쏘드 연기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멜로영화의 주인공이라는 한계를 씌웠던 게 오히려 우스운 일이었지요.

사찰로 숨어든 조폭들과 이들을 쫓아내려는 승려들의 좌충우돌 충돌기를 유쾌하게 그려낸 코미디 영화 달마야 놀자’(2001, 박철관 감독)에서의 코믹 연기, 또 한국은행의 금고를 터는 사기꾼들의 사기극을 치밀하게 구성해낸 범죄의 재구성’(2004, 최동훈 감독)에서 천연덕스럽게 펼쳐낸 12역의 사기꾼 연기 등은 박신양이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물론 그의 필모그라피 중에는 SBS TV드라마 파리의 연인’(2004)에서처럼 달달하고 멋진’ ‘상남자의 멜로 연기를 한껏 펼쳐낸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해 TV드라마 시청율 1위에 올랐을 정도로 안방극장에 파리의 연인선풍을 일으킨 데는 박신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내 안에 너 있다라든가 애기야 가자와 같은 느끼한 대사들이 박신양의 입을 통해 들려질 때 여성팬들은 사족을 못쓰며 좋아라 했습니다. 박신양의 이런 대사들은 나중에 다른 TV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에서 여러차례 패러리됐을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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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 25회 청룡영화제에서 '파리의 연인'의 상대역인 김정은과 다정하게 팔장을 끼고 입장하는 박신양

 

성공적인 TV드라마로 평가된 쩐의 전쟁’(2007, SBS)이나 바람의 화원’(2008, SBS) 역시 전적으로 박신양의 존재감에 기댔습니다. 특히 쩐의 전쟁은 방영 내내 높은 시청율을 올리며 예정된 16회 분량을 잘 끝냈으나, 이후 방송사와 제작사(이김프로덕션)에서 4회 연장을 강행하면서 박신양은 제작사와 출연료 소송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2년여에 걸친 법정 소송 결과는 박신양의 승소였습니다만 이 과정을 겪으며 마음고생을 적잖게 했던 터라 한동안은 아예 연기활동을 쉬었습니다.

 

3년여의 공백 끝에 SBS TV드라마 싸인’(2011)에서 법의학자로 나와 건재를 과시하기 전까지 그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2008년에 방영된 SBS TV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 역을 연기하기 위해 서예와 그림, 대금 등을 공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캔버스 앞에 앉게 됐던 거지요. 그렇게 3년여 동안 상처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릴 요량으로 집중했던 박신양의 그림 솜씨가 최근에는 화단에서도 제법 인정을 받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3~4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작업실을 마련해놓고, 거의 매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 20179월에는 한-중 작가 교류전 <평화의 섬 제주, 아트의 섬이 되다>에 초대작가로 유화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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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눈부신 날(2007년, 박광수 감독)'의 스틸 컷.

 

김홍도라는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그림을 배웠던 것처럼 박신양은 무슨 캐릭터를 맡든지 그 캐릭터에 대해 반드시 입체적으로 준비를 해놓곤 합니다. 법의학자로 출연했던 싸인의 출연에 앞서 그는 사체부검의 참관을 무려 100번 이상 했습니다. 그리고 그저 참관만 한 게 아니라 연출자인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에게 부검과 관련한 리포트(?)A4용지로 150장씩 써서 보냈을 정도였습니다.

 

또 영화 범죄의 재구성을 촬영을 앞두고는 최동훈 감독과 3개월간 여관방에서 하루 10시간씩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연기를 준비하는 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지난 2017KBS TV 드라마 동네 변호사 조들호에 출연하면서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신양은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밝혔습니다. 그의 연기관이 잘 드러났지요.

 

그렇게 박신양은 연기를 마치 구도의 길처럼 여기는 배우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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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된 '눈 부신 날에'의 아역배우 서신애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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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눈부신 날'(2007년, 박광수 감독)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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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SBS TV 드라마 '쩐의 전쟁'의 대천 해수욕장 촬영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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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SBS 연기대상을 수상한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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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44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TV부문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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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SBS 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 역으로 출연한 박신양의 망가진 모습(사진_와이앤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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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SBS 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 역으로 출연한 박신양과 신윤복 역의 문근영 스틸 컷(사진_와이앤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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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유현목 감독 발인식에서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영결식장으로 이동하는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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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영화 '비상' 엔딩곡을 열창하는 박신양(사진_레몬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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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희망로드 대장정'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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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박신양 1st ACTOR`S CONERTO`에 출연한 주인공 박신양의 화려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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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tvN '스타특강 쇼'에 출연한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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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수건달`(2013년, 감독 조진규)의 VIP시사회에 참석하며 팬들과 악수를 나누는 박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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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박신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