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경,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는 평화시장의 재단사로 일하는 스물 두 살의 청년이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을 감행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전태일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온 몸에 화염이 휩싸였음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큰 길가로 달려나갔습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동료 노동자들이 황급히 그 청년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 병원으로 후송했습니다만 그는 이튿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는 어머니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루어달라는 다짐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청년 전태일은 이렇게 청계천 평화시장 등에 운집해 있는 400여 피복 제조상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근로기준법에 맞게 개선하라고 주장하면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가슴에 안은 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목숨을 던졌던 겁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은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주의를 표방하며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적인 노동착취가 관행적으로 사회 곳곳에서 자행될 수밖에 없었지요. 수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의 저임금 정책을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현장에서의 항변이나 저항을 철저하게 통제했습니다. 이 여파는 결국 평화시장 같은 소규모 피복공장에까지도 미쳤고, 마침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을 불사한 고발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로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청년 전태일의 삶을 영화로 담아냈다.
태어나자마자 가난이라는 현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전태일은 가난 때문에 12살 때부터 국민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 등을 해야 했습니다. 뒤늦게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지만 이 또한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계속 다니질 못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에 서울 평화시장의 ‘시다’(보조재단사)로 취직했습니다. 밤낮 없이 일하면서 1년여 만에 재봉사가 되었으나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에 폐병을 앓다가 해고되는 동료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에 그는 근로기준법을 주장하는 ‘바보회’라는 노동자들의 모임을 결성하는데, 업주들에 의해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히면서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물론 ‘바보회’도 와해되고 맙니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내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바보회’를 재정비하고,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종조건과 실태를 설문조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장 앞으로 진정서를 내고,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썼습니다.
“저의 직장은 서울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서 종업원은 3만여 명 됩니다. 그 3만여 명 중에서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 7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면서 15시간씩 일합니다.
저희의 요구는 하루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도 정확하게 해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을 50% 이상 인상해 주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니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이 진정서와 편지는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키는 듯 했으나 요구조건들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태일이 선택한 길이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습니다. 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물리적인 방해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안은 채 스스로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였던 겁니다.
화염 방지복에 특수효과 젤을 발라 실제로 몸에 불을 붙이고 분신 장면을 연기한 홍경연.
영화 속의 분신 장면은 모두 여섯 차례나 시도됐다. 홍경인은 대역을 쓰지 않고 모두 자신이 직접 찍었다.
청년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학생 운동권을 비롯해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 사회단체 등에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이 알려진 지 사흘 뒤, 서울대 법대생들 100여명은 전태일의 시신을 인수하여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장례식날 오후에는 상대생들까지 합세하여 500여명이 정부정책을 비판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며칠 뒤에는 서울대 교정에서 이화여대생들까지 합세한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고, 이어서 연세대와 고려대에서도 항의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정부는 서울대 등에 무기한 휴교령을 발동하기에 이르렀지요. 전태일의 죽음은 이처럼 노동문제에 무관심했던 당시 사회 전체에 경종을 울렸던 겁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 박광수 감독)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다간 전태일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조영래, 돌베개)이 원작입니다. 영화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전태일의 생애를 다루면서도 영웅적 투쟁이나 정치적 선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당시의 열악했던 노동환경을, 전태일이 겪었던 절망으로 고발하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시국사범으로 수배중인 지식인 김영수(문성근)가 전태일의 일기와 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펼쳐졌는데, 김영수의 현재 이야기와 플래시백으로 보여지는 전태일의 과거 이야기를 컬러와 흑백필름으로 구분하여 다큐멘터리 같은 생동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미 ‘칠수와 만수’ ‘그섬에 가고 싶다’ 등의 영화를 통해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선구자로 우뚝 선 박광수 감독의 연출솜씨가 또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과 함께 감독상까지 수상하면서 ‘명불허전’을 실감케 했지요. 또 리얼리즘 영화의 한계로 인식되어온 대중적 접점까지도 넓히면서 24만명의 관객동원을 기록했습니다. 1995년도 한국영화 흥행랭킹 5위에 올랐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가장 큰 공로자로는 전태일 역의 홍경인을 꼽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년, 박종원 감독)에서 빼어난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다소 왜소한 체구로 인해 배역에 한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는 시쳇말로 ‘완전 깔맞춤’ 배우로 등극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17세~ 22세까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치 1970년의 전태일이 환생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명연기를 펼쳤습니다. 당시 어느 비평가는 “전태일의 빙의를 가져온 놀라운 재능”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홍경인의 열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영화 속의 마지막 부분에 관객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 전태일의 분신 장면은 ‘홍경인의 연기인생 최고의 연기’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홍경인은 분신 장면의 촬영에서 스턴트배우(대역)를 쓰지 않았습니다. 호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를 초빙해 화염방지복과 특수효과 젤을 발라서 찍는 장면이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홍경인의 몸에 불을 붙이고 촬영했습니다. 아무리 화염방지복이라고 해도 불을 붙이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6초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매우 위험한 촬영이었습니다.
호주에서 초빙된 특수효과 전문가를 통해 분신장면 촬영을 준비중인 홍경인.
당시 홍경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분신 장면 촬영에 대해 “카메라가 돌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찍을 수 있어요. 더군다나 몸에 직접 불을 붙이고 찍는 게 제가 최초라고 해서 책임감도 느껴졌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무리 신인배우 시절이라고 해도 사실은 매우 위험한 촬영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근로기준법 책을 태우는 장면, 몸에 불이 붙은 채 구호를 외치는 장면 등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분신 장면을 대담하게 찍은 겁니다. 지금이야 그런 장면들은 모두 CG로 처리하는 걸 생각하면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보상도 받았습니다. 춘사영화예술대상에서 생애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니까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yskorea.com)
홍경인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의 열연으로 춘사영화예술대상에서 생애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제작사(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오른쪽)가 분신장면 촬영 중인 현장을 찾아와 홍경인을 격려하고 있다.
모두 여섯 차례의 분신 장면을 촬영하면서 홍경인과 함께 모니터로 확인중인 박광수 감독.(가운데 모자와 안경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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