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은 영화 ‘서편제’(1993년)를 통해서 남도의 한을 절절한 판소리로 그려냈지요. 그리고 이전까지 한국영화의 흥행 최고 기록(58만명-‘장군의 아들’)을 깨고 1백만명 관객시대를 열면서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덩달아 급증하게 됐습니다.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온다”는 영화의 메인 카피처럼 영화 속에서 판소리는 대중에게 적잖은 울림을 안겨주었습니다.
‘서편제’의 영화적 성공 이후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의 원작자인 이청준 작가의 소설을 영화로 옮겨내는 작업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축제'(1996년)입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장례에 관해서, 그것도 전라도 지방의 장례문화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뤄내면서 ‘장례의식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례를 죽음에 의한 이별로서만이 아니라 망자를 떠나보내는 남은 자들의 화해가 이뤄지는 축제로 바라봤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물론 ‘축제’는 그리 상업적인 소재의 영화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임 감독은 ‘서편제’와 ‘태백산맥’ 등의 영화로 커다란 흥행성공을 일궈냈던 터라 제작사(태흥영화)로서는 당연히 임 감독의 영화제작을 맡았던 거지요.
이청준 작가의 가족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으므로 영화 촬영은 전라남도 장흥의 소등섬과 남포항 일대에서 대부분 촬영되었습니다. 지금도 전남 장흥이나 고흥반도 쪽으로 여행하다 보면 장흥 남포항 언덕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축제’의 주요 무대였던 민박집이 ‘죽제민박’이란 간판을 달고 남아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축제'는 호남지방의 장례문화를 다뤄내면서 '장례문화의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평가를 들었다.
영화 ‘축제’는 전라남도 장흥의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례의식에 카메라의 포커스가 맞춰집니다. 멀리 펼쳐지는 해안선, 개펄에서 일하는 아낙들, 다도해를 부유하는 작은 배 등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담아냅니다
여든 일곱의 할머니 죽음은 호상으로 여겨집니다. 작가인 작은 아들 준섭(안성기)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문학지 기자 장혜림(정경순)도 취재차 따라옵니다.
그런데 상가에 까만 썬글라스를 끼고 독한 표정으로 나타난 용순(오정해)으로 인해서 상가의 분위기는 일순 어수선해집니다. 용순은 큰 아들이 밖에서 낳아서 데리고 왔다는 배다른 조카였습니다. 집안에서 차별대우를 받으며 자라난 용순이는 집에서 돈을 훔쳐 나간 뒤로 한동안 행방불명됐다가 불쑥 나타난 겁니다.
용순이는 할머니의 장례에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다른 형제들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지만 할머니만은 언제나 그녀를 보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친척들은 용순의 등장이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중간중간에 큰 소리로 말다툼이 일어나는 등 분위기도 험악해집니다.
취재차 상가에 온 장혜림은 용순의 존재에 시선이 쏠립니다. 그리고 이준섭 작가의 소설에 다른 가족들은 전부 등장하는데, 왜 용순이와 관련된 얘기는 한 줄도 없는지 궁금해 합니다. 준섭은 자신이 문학상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게 되었을 당시, 술집을 차리겠다면서 돈을 꾸러 왔던 용순이 얘기를 들려줍니다. 어머니 집을 새로 지어줘야 한다고 했더니 “돈 달라고 안할 테니까, 삼촌도 내 얘기는 소설로 써서 팔아먹지 말아요!”하고 떠나버렸는 거였습니다.
상가에서 용순이는 화약고처럼 위태위태합니다. 술만 마시면서 걸핏하면 이 사람 저 사람들과 시비를 붙습니다. 친척들 역시 용순이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장혜림은 문득 준섭의 소설에 나오는 ‘빗새’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 이야기가 어쩌면 용순이를 빗대어 쓴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용순에게도 둥지가 없어서 돌아다녀야만 하는 ‘빗새’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기 살아온 거 변명하는 게 소설이라잖아요”라고 귀띰합니다. 그리고 준섭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쓴 동화를 건네줍니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이유는 자식과 손자들이 할머니 나이를 전부 뺏어먹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할머니는 후손들에게 나이를 나누어주기 때문에 점점 더 어려지고, 결국은 갓난 아기가 되어 저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의 동화였습니다. 동화를 다 읽고난 용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할머니의 장례에 찾아온 배다른 손녀 용순(오정해, 사진 위)과 이준섭 작가(안성기)의 장례를 취재나온 장혜림(정경순, 사진 아래).
마침내 장례식이 다 끝나고 일가 친척들이 모두 모여 사진을 찍습니다. 준섭은 조카에게 용순이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집 바깥에서 쭈볏거리며 배회하고 있던 용순이가 부름을 받고 집안으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관계는 어색합니다. 무뚝뚝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장혜림이 ‘김치’니 ‘치즈’니 소리를 질러봐도 표정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소리칩니다 “무슨 초상났냐?”
이 소리에 다들 웃습니다. 화면도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 하나의 프레임을 여러번 인화해 화면을 정지상태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으로 끝납니다.
‘축제’의 마지막 장면과 함께 신디사이저 풍의 대금 선율이 흘러나올 때, 관객들의 마음에도 넉넉함이 묻어났습니다. 이 영화음악 역시 김수철이 맡았습니다. 임 감독의 부름을 받고 이미 ‘서편제’에서 아름다운 주제음악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렸던 ‘작은 거인’의 솜씨가 다시한번 빛을 발한 것이었습니다. 김수철은 ‘서편제’와 ‘태백산맥‘에 이어 ’축제‘에 이르기까지 줄곧 국악을 현대음악에 접목해온 그의 음악세계관을 유감없이 펼쳐보였습니다.
‘축제’에서는 ‘서편제’와 ‘태백산맥’과는 달리 조금 밝은 분위기의 음악으로 관객을 이끌었습니다. 묵직하면서 느리고 어두운 음색 대신 굿거리 풍의 가락을 연상케 하는 신디사이저의 왈츠풍 선율로 한바탕 축제를 펼쳐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만듦새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던 ‘축제’는 흥행의 측면에서는 매우 저조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1996년 6월에 개봉될 때부터 '한 여름의 영화'로는 장례라는 소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참패했습니다. 그래서‘측제’보다 3개월 먼저 개봉된 ‘학생부군신위’(1996년, 박철수 감독)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는 위로 섞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축제'의 영화음악 을 맡은 김수철은 굿거리 풍의 가락을 연상케 하는 신디사이저의 왈츠풍 대금 선율로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는 벼슬을 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명정에 쓰이는 말입니다. 영화 학생부군신위‘는 자전거를 타고가다 사고사로 숨진 노인의 가족들과 친척, 지인들이 장례식장에 모여들어 서로간의 감정과 애환을 펼쳐내는 5일간의 장례를 다분히 역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교차라는 주제를 화해와 용서, 가족애 등의 이야기로 풀어가는데, 장례식의 진풍경을 ’핸드 헬드(Hand Held- 카메라를 들고 찍는 방식)로 활기차게 담아냈습니다. 마치 남의 장례식을 바라보듯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 시점으로 찍은 ‘축제’의 방식과는 사뭇 대비되는 방식이었습니다.
특히 노인의 장남 역할을 故 박철수 감독이 직접 맡아서 연기를 펼쳐 화제를 낳았는데요, 이는 박 감독이 부친상을 겪었던 기억을 토대로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선지 호남지방의 장례문화를 담아낸 ‘축제’와는 다르게 ‘학생부군신위’는 영남지방의 장례문화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대부분의 촬영 역시 경상남도 합천에서 진행됐지요. 동네주민들 10여 명이 조문객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박 감독이 ‘학생부군신위’를 보름만에 촬영을 끝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방은진 주진모 송옥숙 권성덕 등 베테랑 연기자들이 출연했으므로 일사천리로 촬영이 진행된 것이지만 그래도 10회의 촬영횟수로 이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건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학생부군신위’ 역시 ‘축제’보다 3개월 앞서 개봉했지만 흥행성적은 저조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화제요소들이 영화 마케팅때 사용됐습니다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학생부군신위’는 보름만의 촬영으로 완성된 영화여서 제작비 측면에서 보면 ‘축제’에 비해 손실이 한참 적었다는 게 위로였습니다.
그래도 ‘축제’와 ‘학생부군신위’는 둘 다 흥행면에서는 저조했지만 작품적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아 국내외의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기록을 세워 체면치레를 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축제'에서 화약고 같은 캐릭터의 용순을 연기한 오정해.
'축제'의 원작자인 이청준 작가(왼쪽)와 영화음악을 맡았던 김수철(가운데), 그리고 임권택 감독(오른쪽).
촬영에 앞서 안성기(뒷모습) 안병경(오른쪽) 등 배우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는 임권택 감독.
'축제'의 촬영현장. 임권택 감독(가운데)과 박승배 촬영감독(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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