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에서 미남 배우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아마도 6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는 동안의 한국영화를 몇 편이라도 봤던 관객들이라면 주저없이 신성일이라는 배우를 꼽을 겁니다. 지금은 강신성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요.
신성일은 60~70년대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부동의 주연배우였습니다. 특히 여성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미남배우의 대명사였습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남 배우 알랑 들롱과 견주어 한국의 알랑 들롱이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신성일의 외모는 단연 돋보였습니다.
동시대에 함께 활약했던 주연 배우들이 대체로 중년신사의 풍모를 자랑했던 것과는 달리 신성일은 시원스런 외모에 강렬한 눈빛의 반항아적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스타로 군림했지요. 지금과 같은 ‘나쁜 남자’의 마력이 어쩌면 그때부터 어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여성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출연한다는 소식이라도 알려지게 되면 그 영화의 촬영현장에는 언제나 비상이 걸렸습니다. 촬영현장에는 ‘구경꾼’들이 기웃거리게 마련입니다만 특히 신성일의 촬영현장에 몰려드는 ‘구경꾼’들의 열기는 이만저만 뜨거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를 통제하느라 촬영현장의 제작부장들은 골치를 썩어야 했습니다.
영화 '겨울여자'(1978년, 김호선 감독) 에서의 강신성일, 장미희 스틸 컷.
신성일(申星一)이라는 이름은 故 신상옥 감독에 의해 지어진 예명입니다. ‘뉴 스타 넘버 원’(New Star No.1)이란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서울 충무로에 있던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배우수업을 하던 강신영(신성일의 본명)은 신상옥 감독의 눈에 띄어 배우로 발탁됐습니다. 신필름 소속의 배우가 되어 첫 영화 ‘로맨스 빠빠’(1960년, 신상옥 감독)에 출연하게 됐을 때, ‘첫 번째 가는 별’이 되라는 뜻으로 신감독이 붙여준 겁니다.
신성일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한 ‘로맨스 빠빠’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인 김승호 김진규 최은희 등에 이어 조연으로 얼굴을 알렸습니다. 단 한 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을 뿐인데, 그는 금세 충무로 관계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신필름 소속의 배우인 데다가 워낙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탓입니다.
주연급 배우로도 단박에 올랐습니다.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영화들인 ‘백사부인’(1960년, 신상옥 감독)을 비롯해 ‘이 생명 다하도록’(1960년, 신상옥 감독) ‘상록수’(1961년, 신상옥 감독) 등 데뷔와 동시에 5~6편의 영화에 잇달아 주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신성일의 등장은 60년대 한국 영화계의 지형을 바꾸어 놓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상옥 감독에 의해 픽업돼 신필름 소속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지만 다른 영화사들도 앞다퉈 그를 캐스팅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신성일을 잡기 위한 영화사간의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급기야 신성일은 신필름을 나와 ‘프리랜서’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 ‘맨발의 청춘’(1964년, 김기덕 감독)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분을 뛰어 넘는 비극적인 사랑을 다뤄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기도 했던 영화입니다. 거리의 건달 신두수라는 인물이 신성일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외교관의 딸인 여대생 요안나(엄앵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불꽃을 피우다 마지막에 함께 죽음을 택하면서 젊은 영화팬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맨발의 청춘’의 캐릭터는 곧 신성일의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청바지와 가죽점퍼, 반항적인 눈빛 등은 당시 청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습니다. 가뜩이나 주목받던 신성일은 이 영화로 인해 가히 수퍼스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펼쳤던 상대 배우 엄앵란과 결혼식을 올리면서 사회면 톱뉴스를 장식했습니다.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일컬어지면서요.
1986년 프로야구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시구하는 강신성일.
‘첫 번째 가는 별’이라는 이름처럼 신성일은 60~70년대 한국의 영화계를 풍미했습니다. 동시에 겹치기로 출연하는 영화가 언제나 3~4편씩 되었을 정도입니다. 하나의 영화를 찍다가 곧바로 이동하여 다른 영화를 찍고, 또 이동하는 자동차에서 잠깐 눈 좀 붙이고 또다른 영화를 찍는 식이었습니다.
자신이 찍고 있는 영화의 제목이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심지어는 극장에 내걸린 영화간판을 보고서도 “내가 저 영화를 찍었었나?”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평생 출연했던 영화들의 편수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략 700편에서 800편쯤 되는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그야말로 정신없이 촬영장을 옮겨다녀야했던 무렵에는 연간 무려 50편 내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수치입니다만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그는 그만큼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당시 그의 영화 출연료 또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종편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동료배우 이대근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남자 주연배우들의 출연료가 2~3만원(당시 화폐가치) 정도였던 데 반해서 신성일은 40만원 정도였다는 겁니다. 출연료가 이처럼 높은 데다가 출연 편수까지 많았으니 당시 신성일이 누렸던 부와 명예는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였지요.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1990년, 곽재용 감독)의 촬영현장을 찾은 엄앵란, 강석현, 강신성일 가족.
이처럼 불가능한 수준의 다작 출연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의 한국영화 제작이 그 만큼 졸속으로 이루어졌다는 반증에 다름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후시 녹음으로 촬영됐는데, 특히 신성일의 경우에는 워낙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서 반드시 후시 녹음을 했습니다.
나중에 동시녹음 시스템으로 촬영이 바뀌어 갈 때도 그의 목소리는 성우의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때문에 신성일의 목소리를 전담하는 성우들도 덩달아 줏가가 올랐습니다. 60년대에 유행하던 라디오드라마에서 인기를 끌던 이창환이라는 성우가 신성일의 목소리를 전담했는데, 얼마나 많은 영화에서 더빙을 했는지 그 성우 역시 자신의 더빙 작품 수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 성우가 7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후에는 이강식이라는 성우가 70~80년대의 신성일 영화에 목소리 연기를 맡았습니다. 70년대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던 ‘겨울여자’(1978년, 김호선 감독)와 ‘장남’(1985년, 이두용 감독) 등의 영화가 그것이었습니다.
800여 편 가까이 찍은 영화 중 자신의 목소리로 촬영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길소뜸’(1986년, 임권택 감독)과 ‘달빛 사냥꾼’(1987년, 신승수 감독), ‘코리안 커넥션’(1990년, 고영남 감독), ‘증발’(1994년, 신상옥 감독) 등 7~8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년, 정지영 감독)의 강신성일 스틸 컷.
2002년 프로야구 대구개막전에서 시구하는 강신성일 의원.
신성일이 한국 영화계의 지형을 바꿔놓을 만큼 엄청난 파급력을 과시한 건 사실입니다만 영화비평적 측면에서는 자주 연기력 논란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신성일은 순전히 빼어난 하드웨어로 영화인생을 살아온 것”이라고까지 평가한 비평가도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실로 오랜만에 영화 ‘야관문: 욕망의 꽃’(2013년, 임경수 감독)에 출연해서 영화팬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만 이 작품에서도 “전설적인 배우의 연기에 실망했다”는 감상평이 적지 않았습니다.
신성일이라는 이름이 강신성일로 바뀐 것은 한때 꿈꿨던 정치적인 야망에서 비롯됐습니다. 1981년 영화배우 신성일의 브랜드를 앞세워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낙선했습니다. 선거법 상 본명인 강신영을 쓰는 바람에 유권자들이 신성일인 줄 몰라서 낙선했다고 생각한 그는 그 다음 선거를 위해 본명을 아예 신성일의 느낌을 살린, 강신성일로 바꾼 겁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꿔서 출마한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는 낙선했습니다. 이 무렵 필자와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997년 10월, 제주에서는 제4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가 열렸습니다. 14개국에서 내한한 각국의 영화인들과 관객 5천여명이 참석한 영화제 시상식이 끝난 뒤, 신성일은 성산포에 있는 지인의 식당에 필자를 동행해서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의 지인은 미리 식당 안채에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놓았는데, 그는 안채를 마다하고 바깥 쪽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식당의 그 많은 손님들의 테이블마다 찾아가 일일이 악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자가 농담처럼 “여기는 선생님의 지역구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공을 들이세요?”했더니, 그의 말인 즉 “지금은 그래도 언제 이 분들이 내 지역구 유권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모두들 나를 알고 있잖아”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신성일은 3년 후인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동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는 만족할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지요. 오히려 불미스런 일로 구속수감되는 오욕의 시간도 갖게 됐지요.
2004년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강신성일.
그 이후 그의 삶은 한국 영화계의 레전드로서의 모습보다는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모습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많은 여성과의 불륜사실을 실명까지 낱낱이 공개하는가 하면, 아내 엄앵란과의 별거를 자랑스럽게 밝히는 등 대중의 정서와 동 떨어진 행보를 보였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그 자신이 폐암 투병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그래도 그를 기억하는 왕년의 팬들은 ‘맨발의 청춘’의 멋진 청년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2008년 '부일영화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강신성일.
2009년 MBC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강신성일 엄앵란 부부.
2011년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강신성일.
2012년 JTBC '패티김 쇼'에 출연하여 불루스를 추고 있는 강신성일.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강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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