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가슴달린 남자`

기사입력 [2018-04-2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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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나 TV드라마들은 대개 그 소재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MBC TV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꼽을 수 있지요. 공유와 호흡을 맞춘 주인공 윤은혜가 생활력 강한 소녀가장 역할을 맡아 화장기 하나 없는 모습의 남장여자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가하면 영화 미인도’(2008, 전윤수 감독)에서 김규리는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역을 맡아 그림을 위해 여인의 모습을 버린 남장화가로 등장, 김홍도(김영호)와 강무(김남길) 등 영화 속의 숱한 남심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미인도를 둘러싼 엇갈린 사랑과 치명적인 에로티시즘을 그려낸 김규리의 남장 열연은 25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커다란 화제를 낳았지요.

이밖에도 여배우 이나영의 코믹 남장연기를 볼 거리로 내세웠던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2010, 이광재 감독)를 비롯해 SBS TV드라마 미남이시네요’(2009)에서 수녀가 되려다가 남성밴드에 들어가기 위해 남장여자로 고군분투한 박신혜 등 여러 여배우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남장여자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으로는 영화 가슴 달린 남자‘(1993, 신승수 감독)의 여주인공 박선영을 그 으뜸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 개봉을 앞두고 가진 시사회에서 어느 비평가는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완벽한 남장이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박선영은 가슴 달린 남자에서 남장 연기를 실감나게 해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남장여자 캐릭터들과도 뚜렷하게 차별될 만큼 독보적이었지요.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열연한 보이시 캐릭터로 그녀는 단박에 화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습니다. ‘가슴 달린 남자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습니다만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더라가 된 겁니다. 오죽하면 영화 속의 그녀(남장여자)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여성관객들이 다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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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개봉 당시의 '가슴달린 남자' 메인 포스터.

  

영화는 거창하게페미니즘을 표방했습니다. 포스터의 메인 카피도 단군 이래 최초의 여성 반란이라고 쓰면서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영화의 내용도 다분히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성차별에 대한 풍자를 담았습니다. 차별받는 여성이 남성으로 변장하고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는 설정이었으니까요.

 

사회초년병인 혜선(박선영)은 타이핑에서부터 커피 타기, 복사와 팩스 등의 잔심부름만 하는 회사의 업무에 한계를 느끼고 남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머리를 자르고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혜석이라는 이름의 남자 행세를 하며 대기업에도 당당히 취업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특급 프로젝트까지 따내자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되고, 모든 여직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회장의 특명으로 참여한 특급 프로젝트에서 한 팀으로 만난 최형준(최민수)과 함께 일하면서 감정의 교란을 겪게 됩니다. 형준에게 점점 더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 혜석(혜선)은 스스로를 다잡아봅니다만 잘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혜석과 마찬가지로 형준 역시 혜석에게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게다가 형준은 이미 약혼녀 미란(임경옥)까지 있는 입장이어서 더욱 당혹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형준을 더욱 당황하게 만드는 건, 바로 약혼녀인 미란마저 혜석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형준은 자신의 정체성에 동성애 소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혜석의 곁을 떠나기로 합니다. 혜석에게도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회사에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혜석은 형준에게 셔츠를 벗어 자신의 가슴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더욱 혼란스러워진 형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혜석은 자신에게 혼자 맡겨진 프로젝트를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수행하여 성공합니다. 그리고 남장여자 혜석이 아닌 본래의 모습(혜선)으로 돌아가 형준 앞에 마주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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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혜선) 대신 남성(혜석)으로 위장하여 대기업에 입사한 후, 팀 동료 형준 역의 최민수와 함께 연수훈련을 받는 박선영. 실제로 촬영 중 박선영은 웬만한 남자 못지 않은 체력으로 스태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페미니즘 영화를 표방했습니다만 사실은 오히려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혜선(혜석)상남자로 알고 덤벼드는 회사의 여직원들을 거의 거리의 여자수준으로 그려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혜선(혜석)에게 추파를 던지는 형준의 약혼녀 미란(임경옥)의 캐릭터 또한 삐뚤어진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말하자면 남장여자 주인공 하나 살리자고 나머지 여성 캐릭터들을 죄다 죽이는꼴이 된 겁니다


그래도 19939월에 개봉된 가슴 달린 남자는 센세이셔널 소재 때문인지 제법 흥행에는 성공했습니다. 당시 서울관객 13만명을 동원했으니까요.

더군다나 가슴 달린 남자의 개봉되던 무렵에는 한국영화의 흥행기록(103만 명)을 새로 써내려가고 있던 서편제의 돌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을 때였습니다. 4월 개봉 이후 여름방학 시즌을 지나 추석시즌까지 롱런’(장기상영)에 돌입한 서편제의 돌풍 영향을 받으면서도 13만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한 건 선전(善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박선영의 이 컸습니다. 남장여자의 열연, 그 심쿵한 매력으로 그녀는 오랜 무명배우의 설움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극장에 간판을 내걸었다 사라진 영화 몇 편에 단역으로 출연한 게 전부였던 그녀로서는 그야말로 인생역전이었지요


특히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최민수와 멜로 케미를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필모그라피는 버전 업됐습니다. 최민수는 당시 결혼이야기’(1992, 김의석 감독)미스터 맘마’(1993, 강우석 감독)의 연이은 흥행성공으로 영화계 캐스팅 ‘0순위의 배우였기 때문입니다. 최민수의 상대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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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달린 남자' 이전까지 무명배우였던 박선영(왼쪽)으로서는 당대 최고의 스타 최민수(오른쪽)와 함께 영화에 출연,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습니다. ‘가슴 달린 남자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사(현진필름)의 김형준 대표와 최민수의 끈끈한 인연입니다. 최민수의 흥행성공작인 미스터 맘마의 시나리오 또한 김 대표의 손에서 씌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미스터 맘마를 함께 작업하면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했던 겁니다. 그래서 많은 영화의 시나리오들을 밀어두고 최민수가 가슴달린 남자에 출연했던 거지요


가슴 달린 남자에서 최민수의 배역 이름이 형준이고, ‘미스터 맘마에서 최민수가 맡았던 배역 이름 또한 형준이었습니다. 둘 다 김형준 대표 자신의 이름을 붙인 거지요. 실제로 두 영화의 형준이란 인물은 미국에서 USC를 졸업하고 귀국, 영화제작과 외화수입 사업을 펼치던 자신의 캐릭터를 다분히 이입시킨 것이었습니다


암튼 박선영은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가슴 달린 남자에서의 열연으로 그해 춘사영화제에서 새얼굴연기상도 수상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연애는 프로, 결혼은 아마추어’(1994, 이두용 감독)사랑하기 좋은 날’(1995, 권칠인 감독) 등의 영화에 연달아 출연하기도 했지요.

다만 이들 영화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박선영도 조금씩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습니다. 한동안 그녀의 소식이 뜸했습니다만 최근 TV의 예능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면서 다시 활동을 재개한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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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달린 남자'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인 김형준 현진필름 대표와의 끈끈한 의리로 출연하게 된 최민수.

  

한 가지 덧붙입니다. 박선영이 여성으로 돌아와 최민수와 다시 만나게 되는 해피엔딩 장면에 나오는, 박광현의 아주 오랫동안이라는 발라드곡도 꽤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승철의 히트곡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작곡한 뮤지션입니다.

 

난 말하려 했지 아주 오랫동안

너의 모습 지울 수 없다고

난 하지만 멀리서 너를 지켜볼 뿐 용기가 없었지

난 기다리고 있어 아주 오랫동안

너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기에

넌 언젠가는 내게 살며시 다가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거라고

아직 늦지 않았어 나를 바라보며 말해줘

나만을 사랑한다고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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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달린 남자'의 촬영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