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영화계에 훈훈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톱배우 이혜숙이 훈남의 영화제작사(화진영화사) 대표(한기은)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뉴스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여배우들에게는 대개 재벌가와의 혼인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던 때라 자신이 출연한 영화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1991년, 이석기 감독)의 제작사 대표와 결혼한다는 이혜숙의 깜짝 뉴스는 오히려 대중에게 신선하게 전해졌습니다.
두 사람의 비밀스런 열애는 이미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의 제작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제법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 소식 들려오기 1년 전쯤,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의 미국 로케이션 촬영에 참여했던 현장 스태프들은 일찌감치 눈치를 챈 것이죠.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촬영 현장에서 두 사람은 마치 허니문 투어를 즐기는 듯 늘 행복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태프들은 단박에 낌새를 차렸습니다만 짐짓 모른 체 했습니다. 혹시나 두 사람이 불편해 할까봐 그랬던 거죠. 촬영현장은 늘 화기애애했습니다. 여주인공과 제작사 대표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데, 어찌 촬영현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이혜숙과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손창민은 두 사람의 들러리 역할을 자임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신선한 결혼 뉴스를 몰고온 이혜숙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매스컴의 조명도 이뤄졌습니다. 여고 1학년 때, 미스 해태에 선발되어 연예계로 데뷔한 일이며, 이듬해 MBC TV 10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에 입문하여 MBC TV대하드라마 ‘여인열전- 장희빈’(1981년)에 인현왕후역으로 큰 인기를 얻은 사실, 그리고 TV와 영화를 오가면서 숱한 작품들 속에서 가녀린 여인상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혜숙의 필모그라피가 다시한번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혜숙의 필모그라피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0년, 장길수 감독)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이혜숙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준 캐릭터들은 다소곳한 순정파 여인네였거나 왕후 등의 사대부 여인, 아니면 청초하면서도 섹시한 매력의 현대적인 여성상들이 대분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서는 6.25 전쟁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도 결코 절망하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강인한 모성상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습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미군병사에게 겁탈당한 뒤, 마을 사람들로부터 화냥년 취급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끝끝내 삶의 의지를 곧추세우는 ‘언례’가 그녀의 캐릭터였습니다. 그녀의 열연은 그야말로 눈부셨습니다. 마을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당당히 항변하는 언례의 모습은 여성팬들의 심금을 울리며 뜨거운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이혜숙은 명실상부한 ‘연기 내공’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가녀린 몸매로 승부하는 ‘마스코트형 여배우’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국내 개봉에서 관객들의 호응(전국 20만명의 관객 동원)을 얻은 것은 물론 그 이듬해 열린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는 이혜숙에게 여우주연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촬영 막바지 무렵, 이혜숙을 캐스팅하기 위해 세트장으로 찾아온 한기은 대표가 한 눈에 그녀에게 반했다는 점입니다. 원래 여동생 친구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나 이날 이후부터 캐스팅을 빌미로 한 만남이 잦아졌고, 결국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던 겁니다.
이 무렵이 이혜숙에게도 영화인생 가운데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창 사랑에 빠진 여배우가 마침내 ‘연기의 내공’에도 절정을 향해 치달았던 셈입니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 이미 이혜숙은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이었던 ‘젊은 날의 초상’(1991년, 곽지균 감독)의 막바지 촬영에 한창이었습니다. 그리고 ‘은마는 오지 않는다’ 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한기은 대표와 함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의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떠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한국 영화계는 이혜숙을 잠시도 쉬게 두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의 미국 촬영을 끝내고 귀국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김의 전쟁’(1992년, 김영빈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인을 비하한 일본 야쿠자 두 명을 살해하고, 한인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88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인 재일교포 김희로의 실제 사건을 영화로 옮겨낸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혜숙은 김희로가 사랑하는 밤무대 여가수 후사꼬라는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김의 전쟁’으로 데뷔하는 김영빈 감독이 이혜숙의 한양대 연극영화과 선배이기도 했지만, 이혜숙으로서는 한국영화 ‘김의 전쟁’을 찍기 1년 전에 똑같은 인물을 소재로 한 일본 후지 TV드라마 “실록범죄사 시리즈 - 김의 전쟁‘에 출연했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김의 전쟁‘의 후사꼬라는 인물은 이혜숙에게는 숙명적인 캐릭터와도 같았습니다.
한국영화 ‘김의 전쟁’에서는 김희로 역을 맡은 유인촌과 공연했습니다만 일본TV드라마 ‘김의 전쟁’에서는 일본의 만능영화인 기타노 다케시가 김희로 역을 맡아 그와 연기 앙상블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한기은 대표는 연인 이혜숙을 응원하기 위해 일본 촬영현장을 찾기도 했지요.
결혼 이후 이혜숙은 잠시 연기생활을 중단했습니다. 얼핏 대중에게는 그녀가 결혼과 함께 은퇴한 것처럼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도그럴 것이 결혼 후 1년반쯤 지난 1993년 11월에는 첫딸(서원)의 출산 소식이 들려왔으니까요. 실제로 그녀가 살림재미와 육아에 흠뻑 빠져있다는 소문도 솔솔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혜숙이 KBS 2TV 아침드라마 ‘창밖에 부는 바람’(1994년)에 출연한다는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연기 복귀에는 남편인 한기은 대표의 적극적인 권유가 뒷받침됐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졌습니다. 남편의 적극적인 응원 덕에 시댁 식구들까지 모두 그녀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혜숙의 연기인생 2라운드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이때부터는 영화보다 주로 안방극장을 무대로 뛰어다녔습니다.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습니다. 연기활동을 재개한 후 그녀의 얼굴은 거의 매일 공중파 3사 TV 브라운관을 통해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결혼과 출산 등으로 2년여 동안 연기활동을 중단했을 때, “연기하고 싶어 얼마나 갑갑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연기활동을 재개한 1994년 이후 지금까지 그녀는 거의 매년 3~4편 이상의 TV드라마에 출연해 왔습니다. 2003년에는 MBC TV드라마 ‘위풍당당 그녀’를 비롯해 무려 6편의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도대체 그 조그만 체구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쉴 새 없이 솟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연기에 대한 그녀의 욕심이 남다른 것일 테지요.
하지만 중년에 접어든 그녀의 연기욕심은 ‘배역에 대한 연기 욕심이 아니라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욕심’으로 진화했습니다. 악독한 시어머니 역할이나 출생비밀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여인까지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다양한 역할을 해보면서 연기의 맛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털어놓기도 했지요. 젊은 시절에는 도저히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역할들도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다름 아닙니다. 연기 철학을 체득했다고나 할까요.
필자가 기억하는 이혜숙의 스크린 연기 한 토막. ‘김의 전쟁’(1992년) 이후 거의 영화출연을 하지 않았던 그녀는 ‘국가대표’(2009년, 김용화 감독)에서 미국입양아 출신의 스키선수 밥(하정우)의 친모로 나와 ‘짧지만 강렬한 신파연기’의 진수를 보여줬습니다. “어머니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계실 텐데, 한 말씀 해주시죠”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던 하정우, 문득 공항에 환영나온 인파 가운데 친모를 발견하곤 “나 왜 버렸냐고, 그 말 하려고 그렇게 엄마 찾아 헤매다녔어요”라고 울먹입니다. 이 말을 듣던 친모 이혜숙이 회한 가득한 얼굴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머금다가 쓸쓸히 돌아섭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돌아선 그녀의 어깨너머로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진, 연기 내공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영화로 그해 춘사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울 수상했습니다.(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