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는 새해벽두부터 나라 안팎의 크고작은 뉴스들이 연이어 터져나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보철강이라는 굵직한 기업의 부도사태가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온갖 불법 편법으로 금융권의 대출을 받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빚어진 일이었는데, 그 이면에 정관계를 향한 로비와 비리들이 만연해 있었음이 밝혀졌던 겁니다.
특히 이러한 ‘한보 사태’의 몸통으로 지목된 인물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로 밝혀지면서 더욱 충격을 안겨주었지요. 그리고 ‘한보 사태’를 시작으로 기아 쌍방울 해태그룹 등 10여개 이상의 대기업들이 줄지어 부도를 냈습니다. 대출금을 회수못한 금융기관까지도 심각한 부실을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1997년 말에 ‘IMF 사태’를 낳게 한 주요 원인이 됐지요.
사실 ‘한보 사태’에 앞서 터진 사건은 신창원이라는 무기수의 교도소 탈옥사건(1월 20일)이었습니다. 미국영화에서나 봤음직한 교도소 탈출이 한국에서도 실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신출귀몰한 그의 도피행각은 마치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신창원 탈옥사건도 ‘한보 사태’에 금세 묻혀 버렸습니다. 그 정도로 ‘한보 사태’와 대기업의 ‘연쇄부도 사태’는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는 대형사건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신창원 탈옥사건과 ‘한보 사태’로 시끌벅적할 때, 영화계에서도 깜짝 놀랄 ‘뉴스’가 하나 전해졌습니다. 혜성처럼 떠오른 ‘걸출한 신예’ 이정재가 코미디영화에 출연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미 1996년 말부터 촬영을 시작했다는 그 코미디영화는 ‘박대박’(양영철 감독)이었습니다.
1994년 영화 ‘젊은 남자’(배창호 감독)로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이정재가, ‘귀가시계‘로 일컬어졌던 국민드라마 ’모래시계‘(1995년, SBS TV)의 헌신적인 보디가드 백재희 역으로 여성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내 중의 사내‘인 그가 차기작으로 코미디영화를 선택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 다분히 과장된 액션을 특징으로 하는 코미디)에 가까운 영화였기에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급부상하는 배우 이정재를 캐스팅하기 위해 숱한 시나리오를 건넸던 영화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받아든 시나리오가 수십여 편일 텐데, 어찌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영화 '젊은 남자'와 국민드라마 '모래시계'로 상남자의 매력을 한껏 풍기던 이정재는 코미디영화 '박대박'을 차기작으로 선택했다. 상대 여배우는 이혜영.
여기에는 ‘박대박’을 기획한 제작사(시네락 픽쳐스)의 권영락 대표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권 대표에 대한 이정재의 ‘의리 지키기’ 때문이었습니다.
권 대표는 이정재의 영화데뷔작인 ‘젊은 남자’의 제작프로듀서였습니다. 그는 몇몇 TV드라마와 CF 등의 모델로 주목을 받다가 처음 영화배우로 나서게 된 이정재를 그야말로 친동생처럼 돌봐주었습니다. 물론 이정재를 발탁했던 디자이너 하용수 등 매니지먼트팀에서도 잘 챙겨주었지만 카메라 앞에 홀로 나서야 하는 영화제작 현장에서만큼은 권 대표의 보살핌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첫 영화 현장은 모든 신인배우들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권 대표는 비단 영화현장에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정재의 매니지먼트팀과 동선을 같이 하면서 영화 외적인 행사나 광고촬영 현장, 심지어는 일상사에서까지 꼼꼼하게 이정재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겼습니다.
이정재 역시 권 대표를 친형처럼 의지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보살핌을 받으며 찍은 영화데뷔작 ‘젊은 남자’를 통해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영화평론가협회상 등 국내의 주요 영화상 시상식에서 신인남우상을 휩쓸다시피했으니 이정재로서는 권 대표에 대한 고마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거지요.
넘어지고 엎어지는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운 '박대박'에서 걸핏하면 얻어터지며 코피를 흘렸던 이정재.
이정재는 ‘젊은 남자’의 작업이 모두 끝나고 ‘모래시계’ 드라마로 연속해서 인기폭풍을 이어가는 중에도 틈틈이 권 대표와 안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권 대표에 대한 고마움이 컸다고 해도 ‘모래시계’의 촬영 등으로 타이트한 스케줄 속에서 그렇게 인간적인 교류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결국 이같은 인연과 의리로 이정재는 숱한 시나리오 중에서 권 대표가 기획 제작하는 ‘박대박’이라는 코미디영화를 선택하게 됐던 겁니다. 물론 ‘박대박’의 시나리오가 박계옥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도 약간은 영향을 미쳤지요. 박 작가 역시 ‘돈을 갖고 튀어라’(1995년, 김상진 감독)와 ‘깡패수업’(1996년, 김상진 감독) 등의 시나리오로 각광받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권 대표 입장에서는 이정재의 ‘의리‘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권 대표는 이정재에게 “이번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영화를 만들겠다”며 굳게 약속했습니다.
박수석(이정재)의 아버지 박기풍 판사로 열연한 주현. 룸살롱에서의 에피소드를 촬영하는 장면.
‘박대박’은 박씨 성을 가진 부자(父子) 판사와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판사인 아버지 박기풍 역에는 주현이 캐스팅됐고, 이정재는 이혼전문 변호사인 아들 박수석 역을 맡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대박’은 권 대표의 약속이나 이정재의 기대에는 다소 미치지 못한 코미디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흥행성적도 아주 신통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판사직으로 바빠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졸업식에 한번도 안 온 아버지가 미워서 돈 잘 버는 변호사를 택한 아들의 좌충우돌 해프닝이 주요 내용입니다.
승률 99%를 자랑하는 이혼전문 변호사인 박수석(이정재)이 간통사건 피해자의 협박 때문에 얼떨결에 살인사건을 수임하면서 아버지 박기풍 판사(주현), 그리고 박수석의 라이벌이자 연모의 대상인 김미정 검사(이혜영)와 파란만장한 법정싸움을 펼쳐냅니다.
터프가이의 면모와 섹시가이의 매력을 포기하면서 '연기변신'에 나섰던 이정재.
법정코미디의 재미를 펼쳐보이겠다는 의욕이 영화 전편에서 넘쳐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티격태격 구도가 주된 흐름인데,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웃음을 주던 영화 초반 이후에는 다소 억지스런 에피소드로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법정 공방전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가려는 연출의도 역시 지나치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작위적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반복되는 갈등 구조가 오히려 긴박감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물론 코미디영화에서 긴박감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박대박’에서 펼쳐내는 이야기가 다분히 추리적인 형식을 띠고 있어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살인사건 재판도 갑자기 너무나 당연스럽게 해결돼 어리둥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럴바에는 차라리 더 코미디에 집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코미디영화였습니다. 다만 박수석 역의 이정재가 걸핏하면 얻어맞고 다니며 코피 흘리는 등의 모습으로 연기변신을 시도한 점에 대해서는 웬지 공감이 잘 안됐습니다.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이정재를 보려는 관객들은, 적어도 ‘젊은 남자’나 ‘모래시계’를 기억하는 여성관객들에게는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여성듀엣가수 코코 출신의 배우 이혜영은 전작 '꼬리치는 남자'에서와는 달리 자신의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열연, 호평을 받았다.
‘박대박’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김미정 검사로 출연한 이혜영이었습니다. 여성듀엣가수 코코 출신의 이혜영은 배우변신을 시도한 영화 ‘꼬리치는 남자’(1995년, 허동우 감독)에서의 실패(?)를 한방에 씻어내는 열연으로 박수를 받았습니다. 일부러 섹시하게 보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이정재와의 ‘멜로 케미‘를 잘 만들어냈던 겁니다.
‘박대박’에는 많은 카메오 배우들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강간범으로 출연한 권용운은 ‘투캅스’에서 엄청나게 깨지던 모습의 패러디 장면으로 큰 웃음을 주었지요. 명계남 김학철 정원중 등 조연급 배우들의 열연도 인상적이었고, 가수 임희숙이 즉결재판소 판사로 등장한 것도 쏠쏠한 재미를 주었습니다.
‘박대박’이 개봉하던 1997년 4월에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대법원 최종선고가 있었습니다.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에게는 징역 17년이 확정됐지요. ‘박대박’의 흥행실패에는 어쩌면 이런 ‘웃픈’ 현실이 더 크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박수석 역의 이정재.
박기풍 판사 역의 주현.
서울대 법대 출신의 양영철 감독.
코미디에 가까운 '박대박' 촬영현장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