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방송 3사는 연말이면 어김없이 연기대상 시상식을 갖습니다. 한 해 동안 방송된 프로그램들에 대한 결산의 의미로 펼쳐지는 시상식이지요. 사실상 자사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시상이므로 자화자찬의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실제로 여러 배우들이 최우수연기상과 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서로 축하를 주고 받습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최고라고 평가받은 작품에서 열연한 배우에게 ‘연기대상’이 주어지며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2012년 SBS TV의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해에는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형사가 진범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담은 ‘추적자 더 체이서’가 단연 최고의 드라마로 평가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주인공 형사 역을 맡았던 손현주에게 연기대상이 주어지리라는 것 역시 예상될 정도였지요.
손현주는 ‘연기대상’ 트로피를 수상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 축하하는 동료들의 꽃다발을 한아름 안아들고 수상소감을 밝혔습니다. “촬영하는 내내 우리 드라마에는 없는 게 너무 많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아이돌이 없고 스타가 없습니다. 그대신 우리 드라마에는 박근형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 수상 소감으로 원로배우 박근형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도 덩달아 쏟아졌습니다.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 열연했던 박근형의 존재감이 새삼스럽게 조명을 받은 겁니다. 유력 대권후보 김상중의 아내이자 자신의 딸인 김성령이 연하의 아이돌과 밀회도중 저지른 교통사고를 수습하려는 재벌회장으로 등장해 펼친 악역 연기가 다시한번 인구에 회자되었지요. 그리고 50년 연기인생 중 처음으로 소속사(에스비 엔터테인먼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아버지(1997년, 장길수 감독)'에 출연한 박근형.
손현주의 연기대상 수상 소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박근형의 연기에 대한 철학은 분명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함께 출연하는 동료 연기자들에 대해서도 연기에 임하는 자세를 철저하게 가져줄 것을 주문합니다. 때문에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은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준비가 덜 되었거나 촬영현장에서 빈둥거리는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그의 질책이 주저없이 날아듭니다.
2005년 SBS TV드라마 ‘백만장자와 결혼하기’의 촬영 당시에 막 연기에 입문한 윤상현은 서툰 연기 때문에 이만저만 혼쭐이 나지 않았습니다. 박근형은 당시 촬영현장에서 “신인들이 연기에 자신 없으면 죽기살기로 열심히 준비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면서 추상같이 호령했습니다.
이 일화는 훗날 당사자인 윤상현이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스스로 ‘고백’함으로 세간에도 알려졌는데요, 정작 박근형은 “윤상현에게만 야단친 게 아니다”라고 얘기했지요.
어쨌든 박근형에게 이처럼 야단 맞은 후에 윤상현의 연기력은 일취월장한 게 사실이었습니다. 윤상현은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이후 MBC TV드라마 ‘내조의 여왕’(2007년)과 SBS TV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2013년) 등에서는 작품의 성공에 단단히 한 몫 했으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박근형의 존재는 후배들에게 매우 ‘엄한 선배‘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요즘에는 스타만 있고 배우는 없다”며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들에 대해 일갈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정상급의 배우들이지만 전도연이나 김남주 등도 과거에 박근형과 함께 작품에 출연하면서 눈물깨나 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박근형의 출연이 결정됐다고 하면 출연을 취소하는 신인배우들도 적잖이 있었던, 웃지 못할 사연들도 풍문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2005년 연정훈과 한가인의 결혼식에 참석한 박근형.
박근형은 최근들어 연기 이외에도 다방면으로 그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의 강렬한 연기로 인해 그는 난생 처음으로 ‘박근형의 추적자’(2013년, TV조선)라는 시사프로그램의 MC를 맡기도 했습니다.
두달여 동안 방송된 ‘박근형의 추적자’에서 그는 처음 도전해본 MC였지만 상당한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직접 사건 현장을 발로 뛰면서 취재하는 열성을 보였고, 또 안타까운 사건을 브리핑할 때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성우로 시작해서 60년 가깝게 펼쳐온 관록의 연기인생에서 우러나온 저력이라고나 할까요. 처음 해본 MC도 무난하게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그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빛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tvN의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2013년~2018년)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2의 전성기’라는 우스개 소리를 들을 만큼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황혼의 배낭여행’이라는 컨셉으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을 위해 그는 동료 배우들인 이순재 신구 백일섭, 그리고 후배인 이서진 등과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풀어냈습니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특성상 연출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박근형은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보여왔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감성적인 면모를 드러내어 눈길을 끌었지요. 특히 갓 항암치료를 마친 아내를 위해서 여행지의 멋진 풍경을 사진찍어 보내주거나 매일 안부전화를 하는 등 로맨티스트로서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램 촬영 중에는 그의 강직한 천성이 가끔씩 발동하기도 했습니다. ‘엄한 선배’의 모습으로 빙의하는 거지요. 오랜 여행에 지친 할배들의 컨디션이 최저치로 떨어졌음에도 일정대로 촬영을 강행하는 제작진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편집과정에서 촬영된 장면이 연출의도와 다르게 방송되는 것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변함없이 ‘돌직구 스타일’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박근형의 캐릭터가 오히려 ‘꽃보다 할배’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면서 ‘재미’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제작진의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바람에 ‘꽃보다 할배’는 무려 ‘시즌4’까지 이어지며 촬영되었습니다. 당연히 박근형이 ‘일등공신’이었지요.
영화 '가문의 영광5-가문의 귀환'(2012년, 정용기 감독) 촬영현장의 박근형.
박근형은 1940년생으로 올해 78세입니다.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KBS 3기 탤런트로 방송국에 들어가면서 연기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올해로 연기경력이 55년째인 셈입니다.
지금도 준수한 풍모를 자랑하지만 청춘시절의 그는 한눈에 봐도 미남이었습니다. 당시엔 연기자의 조건 중 외모가 무척 중요한 시절인지라 그 역시 완전체에 가까운 외모 덕을 많이 봤습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장동건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정작 본인은 “당시엔 이런 외모는 기생 오래비나 건달 같다는 느낌을 주어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고 손사래를 칩니다만 그의 한창 시절에 함께 연기활동을 해왔던 동료들은 “그때부터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입을 모읍니다.
특히 영화 ‘장수상회’(2015년, 강제규 감독)에 함께 출연했던 윤여정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어느 방송프로그램에 나와서 “그 오빠는 젊은 시절부터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배우였다”고 증언하기도 했지요. 윤여정은 MBC TV드라마 ‘장희빈’(1971년)에서 박근형과 함께 출연했던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상황에 대한 그녀의 증언은 ‘팩트’였던 거지요.
박근형은 55년의 연기인생 속에서 수많은 영화와 TV드라마, 또 연극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출연작품을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많은 작품들 속에서, 그의 나이 40대 이후에는 대부분 ‘회장님 류’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겁니다. 아니면 거물 정치인이거나 고위관료 등이 주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습니다. ‘회장님’ 전문배우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지요.
아마도 이런 상황 역시 그의 외모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젊은 시절엔 멜로물의 주인공으로 영화와 TV드라마를 누볐고, 또 중년 이후에는 고위직 캐릭터로 연기인생을 살아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면서는 변신을 곧잘 시도합니다. 영화 ‘장수상회’에서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순정파 할아버지로 관객의 눈시울을 적시는가 하면 코미디영화 ‘가문의 영광’(2012년, 정용기 감독)에서는 호남의 건달가문의 보스로 나와 코믹연기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5편까지 시리즈로 제작되는 내내 그는 작정하고 망가지는 연기를 불사했습니다.
얼마전에는 사극코믹액션영화 ‘조선명탐정-흡혈괴마의 비밀’(2018년, 김석윤 감독)에서도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그의 연기 욕심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2013년 '꽃보다 할배' 촬영을 위해 출국하는 신구(오른쪽)와 함께 출국하는 박근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