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은 한국사회에 많은 일들이 일어난 해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무래도 88 서울올림픽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에서 치러지는 올림픽은 세계 각국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제법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올림픽 성공의 이면에는 소외된 이들의 아픔과 희생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화를 한다는 이유로, 또 성화가 지나가는 자리라는 이유로 달동네들을 강제로 철거했던 사건이 있었지요. ‘상계동 판자촌 철거’가 그것이었습니다. 전국이 세계인의 축제라며 들썩일 때, 하늘을 지붕삼아 악을 쓰던 상계동 173번지 판자촌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한여름 8월에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재학중인 이상은이라는 여대생이 ‘MBC 강변가요제’에서 경쾌한 리듬의 ‘담다디’를 불러 대상을 수상하면서 ‘담다디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담 담다디다담 담다디담,,,, 그대는 나를 떠나려나요/ 내 마음이렇게 아프게 하고/ 그대는 나를 떠나려나요/ 내 마음 이렇게 슬프게 하고/ 그대는 나를 사랑할 수 없나요/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그대가 나를 떠나도/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그대가 나를 떠나도/ 난 정말 그댈 그리워할 수 없나요/ 당신께 이렇게 애원합니다/ 난 정말 그댈 사랑할 수 없나요/ 날 사랑한다고 속삭여줘요,,,
1989년 영화 '굿모닝 대통령'을 촬영할 당시 허준호(사진 위 왼쪽, 아래 오른쪽)와 연기호흡을 맞췄던 이상은(사진 위 오른쪽, 아래 왼쪽).
훤칠한 키에 깡마른 체격, 껄렁대는 걸음걸이와 짧게 커트한 헤어스타일로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이상은의 모습에서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강변가요제에 출전해서, 더군다나 고작 대학 1년생인 그녀는 너무나 능청스럽게 무대를 휘저었습니다. 탬버린을 신나게 흔들며 춤추는 우스꽝스러운 동작까지 꺽다리 여대생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유행’이 되었습니다.
‘담다디’는 중독성있는 노랫말과 흥겨운 리듬, 그리고 독특한 춤동작으로 금세 장안의 화제곡으로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이상은의 귀여운 말투와 중성적 매력까지 더해져 거의 모든 국민이 ‘담다디’를 따라 부르거나 흥얼거렸습니다. 88 서울 올림픽도 ‘담다디 선풍’을 가속화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담다디’의 흥겨운 리듬이 올림픽 축제의 열기를 한층 고조시켰기 때문이지요. 한여름에 시작된 ‘담다디 선풍’은 올림픽을 관통하더니 차가운 바람과 눈 내리는 겨울은 물론 그 다음해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이상은은 ‘담다디’ 단 한 곡으로 단박에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1년 넘게 흥겹게 ‘담다디’를 불러댔습니다. 마치 신명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어깨와 다리 춤사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예쁘게만 보이던 여가수의 편견을 보기좋게 깨부순 파격 또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연예산업 관계자들도 이러한 ‘괴짜 매력’의 이상은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가능성이 가수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간파한 것이지요. 실제로 그녀는 만능엔터테이너였습니다.
유쾌하고 발랄한 이미지에다 시원시원하고 솔직한 입담으로 그녀는 TV 쇼프로그램(젊음의 행진)의 MC와 라디오프로그램의 DJ로서도 한껏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또 여러 기업들이 앞다퉈 그녀를 자사 제품의 CF모델로 기용하고 싶어했습니다. 여기에다 그녀의 소속사 또한 온갖 TV의 프로그램의 출연 요청을 굳이 사양하지 않으면서 한동안 TV와 라디오에서는 채널과 다이얼을 틀었다하면 이상은을 맞닥뜨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굿모닝 대통령'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허준호 이상은 김세준.
그녀의 영화 출연도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녀의 데뷔곡이자 히트곡인 ‘담다디’와 동명의 영화(1989년, 김응천 감독)와 ‘굿모닝 대통령’(1989년, 이규형 감독)이 그것이었습니다.
두 편의 영화는 연이어 촬영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영화 출연을 위해 거의 6개월 이상을 촬영현장에서 지냈던 셈입니다. 영화 ‘담다디’는 노랫말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굿모닝 대통령’은 당시 해외여행 자유화와 맞물려 젊은이들의 꿈과 로망으로 떠오른 해외 배낭여행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 컬럼에서 다루는 ‘굿모닝 대통령’은 특히 이상은의 만능 엔터테이너 면모를 적극 활용한 영화였습니다. 물론 ‘담다디 선풍’을 영화의 흥행에 연결시키려는 ‘목적’은 두 영화 모두 같았지만요.
그래서였을까요. 이상은은 ‘담다디’보다 ‘굿모닝 대통령’에 훨씬 더 애착을 갖고 촬영했습니다. 연극영화학도인 이상은으로서도 자신의 연기를 제대로 평가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굿모닝 대통령’에서 그 야심을 펼쳐보이고자 했던 겁니다. 더군다나 ‘굿모닝 대통령’은 해외로케이션 촬영이었으니까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던 거지요.
‘굿모닝 대통령’은 이규형 감독 자신의 스포츠신문 연재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인데요, 실제로 일본의 동경을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로마와 베니스, 스페인, 태국의 방콕과 밀림지대 등에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1989년 당시 20대 청춘이었던 허준호(사진 위), 그리고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이상은(사진 중간, 아래)의 표정이 싱그럽다.
여자대통령의 꿈을 가진 오혜란(이상은)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등록금을 가지고 유럽 배낭여행길에 오르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김뿌리(김세준)라는 한국청년을 만나 함께 여행하게 됩니다. 그들이 정한 행선지는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니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버스킹에 나서기도 합니다. 전혀 낯선 곳에서의 연주를 통해 외국인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은 물론 여행경비를 벌기도 합니다.
다음 여행지는 방콕. 김뿌리는 태국 밀림지대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장유민(허준호)에게 연락, 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김뿌리와 장유민은 과거 일본 여행길에서 만났던 사이. 세 사람은 함께 태국 밀림여행에 나섭니다.
그러나 여행도중 해적들의 습격을 받게 되는데, 장유민의 기지로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오혜란과 김뿌리는 장유민으로부터 해적들의 잔악함에 대해 듣게 되는데, 특히 장유민의 약혼녀가 해적에 의해 살해됐다는 말에 자신들의 낭만적인 여행에 민망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한편 세 사람은 베트남 보트피플을 무인도에 가둬놓고 잔혹행위를 하고 있는 해적들의 정보를 듣고 경찰에 수사의뢰를 하는데, 경찰의 미지근한 태도에 직접 해적들과의 싸움에 나서는데,,,,,
'굿모닝 대통령'의 촬영현장. 영화 속의 모습은 이탈리아였지만, 국내에서의 보충촬영 현장이다.
대략의 영화 내용에서 보듯 세계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촬영하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또한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억지스런 이야기의 전개로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해적들과의 전투 도중 장유민(허준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오혜란(이상은)과 김뿌리(김세준)가 폭풍 눈물을 쏟게 됩니다.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이 장면에서 느닷없이 장유민의 시신에 태극기를 덮고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신파적 눈물 대신 실소를 금치 못했지요.
만일 태국에서 해적들을 만나 벌이는 이같은 억지 에피소드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요즘 유행하는 리얼 여행프로그램 ‘꽃보다 누나’ 또는 ‘꽃보다 할배’ 류의 여행영화로 평가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영화의 짜임새가 해외로케이션 촬영이라는 신선한 기획의도를 못따라간 셈이지요.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상은은 특유의 매력을 그런대로 펼쳐냈습니다. 특히 로마와 베니스의 광장에서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해 버스킹하는 장면은 실제로 그녀가 즉석에서 펼치는 공연을 촬영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상은의 공연을 지켜보는 외국인들의 시선 또한 ‘날 것’ 그대로 담겼지요. 물론 더러는 동양인들의 버스킹에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요.
이규형 감독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6년)에서 상큼한 대사와 전개로 새로운 청춘영화의 가능성을 던져주기도 했습니다만 ‘굿모닝 대통령’ 이후에도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1990년)와 ‘공룡선생’(1992년) 등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입지는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오석준 장필순 박정운 세 가수가 부른 OST앨범의 ‘내일이 찾아오면’만이 오래도록 대중의 환호를 받아오고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굿모닝 대통령'의 이규형 감독(왼쪽)과 이상은.
허준호(왼쪽)는 이규형 감독의 데뷔작 '청 블루스케치'에서 호흡을 맞춘 인연으로 '굿모닝 대통령'에서도 함께 작업하게 됐다.
김세준(왼쪽), 이규형 감독(가운데) 허준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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