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닥터 봉`

기사입력 [2018-09-1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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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에는 신인감독의 돌풍이 거세게 불어닥쳤습니다

타겟 관객층을 설정한, 이른바 관객 맞춤형영화가 대세를 이루던 때였습니다

당시 영화제작자들은 관객 맞춤형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존의 유명감독 보다는 자유분방한 신인감독들과의 작업을 선호했습니다. 1994년에는 70여편의 한국영화 가운데 무려 18편의 영화가 신인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세상 밖으로의 여균동 감독을 비롯해 장미빛 인생의 김홍준 감독, ‘손톱의 김성홍 감독, ‘구미호의 박헌수 감독 등이 이때 데뷔하여 한국영화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을 해나갔습니다 1995년에도 이같은 신인감독들의 돌풍은 계속됐습니다.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감독을 비롯해 개같은 날의 오후의 이민용 감독, ‘사랑하기 좋은 날의 권칠인 감독, ‘헤어드레서의 최진수 감독, ‘나를 미치게 하는 것들의 구임서 감독, ‘엘리베이터의 민병천 감독,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의 구성주 감독 등이 모두 이 해에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영화 닥터 봉’(1995) 역시 신인 이광훈 감독의 데뷔작이었습니다. 이 당시 등장한 신인감독들은 대부분 탄탄한 실력을 갖췄습니다. 또 그중에는 해외 유학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관객 맞춤형영화라는 컨셉과 신인감독과의 호흡 역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닥터 봉을 통해 데뷔하는 이광훈 감독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돌아와 TV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닥터 봉을 기획한 제작사(황기성사단)에서는 이런 배경의 이 감독을 일찌감치 연출자로 점찍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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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봉'에서 처음으로 커플연기를 펼친 한석규와 김혜수.

  

기획영화가 트렌드로 자리잡아가던 1990년대 한국영화계에는 이전의 멜로영화들과는 가 다른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졌습니다. 1990년대를 전후해 할리우드 여배우 멕 라이언 주연의 영화들, 이를테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라든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등의 영향을 받아 국내 팬들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덩달아 높아졌던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제작사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 감독이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잘 만들어내리라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한국에서는 결혼 이야기’(1992, 김의석 감독) 등의 성공을 통해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가능성도 활짝 열렸던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결혼 이야기의 성공에 따라 앞다퉈 로맨틱 코미디 영화 제작에 나서는 바람에 붐을 이루다시피하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 중 마누라 죽이기’(1994, 강우석 감독)그 여자 그 남자’(1993, 김의석 감독)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관객의 호응을 얻진 못했습니다. ‘가슴달린 남자’(1993, 신승수 감독)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1993, 김호선 감독),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 김동빈 감독) 등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했던 거지요.

말하자면 닥터 봉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붐의 끝물에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흥행시장을 고려하면 닥터 봉의 기획과 제작은 다소 무모해보이는 프로젝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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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에게는 영화 '닥터 봉'이 데뷔작이었지만, 김혜수는 이미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정상급 여배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사는 이 프로젝트를 초지일관 밀어부쳤습니다. 이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강우석 감독)을 기획하여 성공시킨, 한국영화계에 기획영화시대를 연 제작사의 황기성 사장만이 할 수 있는 뚝심에 다름 아니었었습니다. ‘입시지옥에 빠져 헤매는 전국의 고등학생들을 설문조사한 후, 청소년들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만들어 보란 듯이 성공한 자신감이 닥터 봉에도 그대로 이어진 겁니다.


황기성 사장은 한국영화산업의 주체세력을 제작자에서 기획프로듀서로 이동시킨 주인공입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60년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기획실 직원으로 입사한 뒤, 1970년대 한국영화의 산실로 불리던 화천공사의 기획전무, 태창영화사 기획상무 등을 거치며 기획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해온 인물입니다. 그리고 1985황기성 사단을 설립하고 자신의 기획 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획을 거쳐 세상에 나온 영화들만 해도 겨울여자’(1978, 김호선 감독)를 비롯해 영자의 전성시대’(1979, 김호선 감독), 만다라‘(1980, 임권택 감독), ’고래사냥‘(1984,배창호 감독), ’성공시대‘(1987, 장선우 감독), ’접시꽃 당신‘(1988, 박철수 감독)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합니다


때문에 비록 닥터 봉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 붐의 막차를 탄 듯 했어도 웬지 황 사장의 손을 거치면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은 예감을 갖게 했지요. 그리고 실제로 닥터 봉은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닥터 봉이 상영된 1995년도 한국영화 흥행 1위의 관객동원기록(40만명)을 세웠으니까요


이광훈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과도 같은 뻔한 이야기를 깔끔한 구성과 경쾌한 전개로 관객들로부터 엄지척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결혼 이야기이후 가장 재미있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라는 평가를 얻기까지 했습니다. 데뷔작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촬영현장에서의 장악력도 노련했다는 게 당시 스태프들의 전언이었지요. 여기에다 한석규와 김혜수 커플의 감칠 맛 나는 연기까지 덧입혀져 닥터 봉은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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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봉'은 치과에서 흔히 의사와 주고 받는 "크게 벌리세요"라든가 "아프더라도 소리지르지 말고" 등의 대사를  영화 포스터에 써넣어 관객들의 야릇한 상상을 자극했다.

  

아내와 사별하고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훈(최정)과 둘이서 빌라에서 살고 있는 치과의사 봉준수(한석규)는 여러 애인을 사귀는 바람둥이입니다. 어느날 이 빌라 아래층으로 콧대 센 노처녀 가요작사가 여진(김혜수)이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주차장에서 여진의 고물차가 준수의 고급차에 흠집을 내면서 서로 인상을 붉히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첫 만남부터 감정이 좋을 리 없는 가운데, 여진은 만화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준수의 아들 훈과 친해집니다. 물론 훈이 준수의 아들인 줄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여진과 친하게 지내는 동안 훈은 상냥하고 따뜻한 여진이 엄마가 됐으면 하고 바랍니다. 준수 또한 훈을 통해 여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근한 기대감과 환상을 갖게 됩니다. 준수 역시 여진이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에 흠집을 냈던 주인공인 줄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훈은 아빠 준수가 여전히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 데이트를 하는 게 못마땅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아빠와 여진을 짝지으려는 훈의 중매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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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봉'에서 호흡을 맞췄던 김혜수와 한석규는 2010년, 영화 '이층의 악당'(손재곤 감독)에서 재회할 때까지 15년 동안 단 한 번도 함께 출연한 적이 없었다.

  

영화 '닥터 봉'은 바람기 많은 홀아비 치과의사가 콧대 높은 노처녀 작사가와 티격태격하며 지내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다분히 진부한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였습니다. 당시 영화포스터에는 이러한 내용의 진부함을 덜어내 보려는 듯 섹슈얼 이미지가 가득했습니다.

멕 라이언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차용한 듯한 헤픈 치과의사와 센 노처녀가 만났을 때라는 메인 카피는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속을 보여줍시다라는 서브 카피 아래로 자 크게 벌려요라든가 아프더라도 소리 지르지 말고”, 또는 처음엔 다 그래등의 야릇한 대사들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던 겁니다


닥터 봉은 한석규의 영화 데뷔작입니다

MBC TV 20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활동을 펼치던 한석규는 닥터 봉의 캐스팅 직전에 출연한 MBC TV드라마 서울의 달’(1994)을 통해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연말의 방송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지요. 당연히 영화계에서는 그에게 수많은 시나리오를 건네면서 스크린 진출을 부추겼습니다


한석규도 스크린 연기에 대한 욕심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첫 영화는 웬지 센 작품보다는 부담없는 작품으로 시작하고 싶었던 터라 로맨틱 코미디 장르인 닥터 봉을 선택했던 거지요

이 작품의 성공으로 한석규는 이후 은행나무 침대’(1996, 강제규 감독)를 비롯해 초록물고기’(1997, 이창동 감독), ‘넘버3’(1997, 송능한 감독) ‘접속’(1997, 장윤현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 감독) ‘쉬리’(1998, 강제규 감독) 등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독보적 주연배우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닥터 봉에서의 케미넘친 커플연기를 펼친 김혜수와는 그 후 무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커플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지난 2010년 개봉된 영화 이층의 악당’(손재곤 감독)에서 어렵사리(?) 재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지난 해 SBS TV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한석규의 첫사랑이자 옛 연인 역으로 잠깐 특별출연했던 게 전부입니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닥터 봉인연이 사뭇 이채롭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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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봉'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광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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