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숲 속의 방’(1992년, 오병철 감독/작고)은 영화화 기획단계부터 캐스팅, 촬영, 심지어는 개봉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낳았던 작품입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학생운동과 소비적인 가치관의 충돌’ 사이에서 갈등하던 부잣집 여대생이 그 어느쪽에서도 삶의 진실을 찾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되는 강석경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영화의 토대였습니다.
강석경 작가의 소설 ‘숲 속의 방’은 1985년 발표되어 그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이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사회가 맞닥뜨려야 했던 혼돈과 모순을, 그 정치적 압정 속에서 좌절과 방황을 거듭하다 스러지고 마는 한 여대생의 비극적인 삶과 병치시킨 소설로 대학생들에게 많이 읽혔지요. 학생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도, 그저 마음으로만 동조하던 대학생도, 심지어는 아예 시국문제엔 관심조차 없던 대학생도 ‘숲 속의 방’을 읽었으니까요.
이런 배경 때문에 강석경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보려는 영화계의 움직임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쉽게 영화화되지 못했습니다. 원작 소설의 내용이 무거운 탓도 있었고, 제작비 재원 조달과 캐스팅 문제가 좀체로 해결되지 않은 탓도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숲 속의 방’은 영화보다 먼저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1987년 극단 산울림에 의해 공연된 연극 ‘숲 속의 방’은 예상(?)대로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같은 연극에 대한 호평이 영화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도록 영향을 끼쳤지요.
'숲 속의 방'의 주인공 소영 역의 최진실은 촬영 내내 부잣집 딸의 이념 갈등에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숲 속의 방’을 영화로 제작한 곳은 ‘판 영화사’였습니다. ‘판 영화사’는 이장호감독이 1986년 설립한 영화제작사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조감독(오병철)을 감독으로 데뷔시키려고 애쓰던 이장호 감독이 마침내 결단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영화계에 리얼리즘영화의 새 바람을 일으킨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을 비롯해 ‘어둠의 자식들’(1981년) ‘바보선언’(1983년) ‘과부춤’(1983년) 등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감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 감독은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와 ‘어우동’(1985년)의 엄청난 흥행 성공이 영화제작사 설립을 가능케 한 동력이긴 했지요.
당시 이 감독은 ‘판 영화사’ 설립작품으로 이현세 원작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제목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으로 바꿔달고 최재성과 이보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흥행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영화제작사의 규모를 더욱 확장시켜나갔습니다. 이때 제작된 영화들이 ‘Y의 체험’(1987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숲 속의 방’과 ‘핸드백 속 이야기’(1987년, 송영수 감독/작고) 등으로 이어졌지요.
훗날 영화제작사 ‘기획시대’의 대표가 된 유인택 기획실장을 기용하여 이같은 영화들의 제작과 홍보 등을 맡기면서 특히 ‘숲 속의 방’에 많은 관심을 갖도록 주문했습니다. 그만큼 이 감독은 오병철 감독을 아꼈습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때가 1989년이었는데, 정작 영화가 완성되어 개봉하게 된 것은 2년여나 지나서 1992년 1월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큼 영화화 작업에 사연이 많았던 겁니다.
당시의 영화제작 시스템은 시나리오와 감독, 주연배우 등의 영화기획 프로젝트를 지방흥행업자들에게 보내면, 그들의 흥행예상도에 따라 지역상영판권료를 선불금으로 받아 영화제작비 재원을 마련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으로 볼 때, ‘숲 속의 방’은 이른바 ‘운동권 영화’로 비쳐진 데다 연출을 맡은 오병철 감독은 데뷔하는 신예였으니 ‘후한 값’을 받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었지요.
다만 여주인공으로 故 최진실을 캐스팅한 것이 그나마 지방흥행업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최진실은 당시 신인이긴 했지만 “남자 사랑은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가전제품 CF를 통해 단박에 연예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르던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주인공 소영(최진실)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첫 시위를 목격하고 사진 써클에 들어가 이념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사진은 사진 써클에서의 장면.
그렇게해서 촬영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이 가까스로 마련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나리오 작업에서 적잖은 진통을 겪었습니다. 지방흥행업자들에게 보여주었던 시나리오는 지역상영판권료를 선불로 받기 위해 쓴 ‘초고’였고, 이를 토대로 ‘촬영고’를 완성해내는 과정이 의외로 난산이었던 겁니다.
시나리오를 쓴 공지영 작가는 당시 오병철 감독의 아내이자 실제로 대학의 운동권 출신이었던 터라 순조롭게 ‘촬영고’를 뽑아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공지영 작가 역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대학에 들어가면서 학생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던 이력의 소유자였으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자신과 너무 흡사한 ‘숲 속의 방’의 주인공 소영의 캐릭터가 발목을 잡았던 거지요. 작품 속의 소영이 부유한 집안의 딸로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모순과 혼돈에 직면하게 되었던 상황이 공 작가에게는 꽤나 신경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남편의 감독데뷔작이라는 부담도 만만찮았겠지요.
'숲 속의 방'의 소영(최진실)의 언니 미영으로 출연한 김성령(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그리고 오병철 감독(오른쪽 끝).
그리고 시나리오작업의 산고 이후에는 여주인공 소영 역의 최진실이 촬영을 힘들어하는 문제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최진실의 건강이상이었습니다만 사실은 ‘숲 속의 방’의 소영 캐릭터가 자신에게 원활하게 이입되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진실은 당시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오며 마침내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었던 ‘또순이 캐릭터’였는데, 영화 속의 소영은 부족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부잣집 딸래미였으니까요. 배역에 대한 지나친 신경과민이 툭 하면 복통을 일으켰고, 증세가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병원신세도 여러차례 져야 했습니다.
예정됐던 촬영을 부득이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숲 속의 방’ 촬영을 힘들어했는지는 훗날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TV프로그램에서도 드러난 적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대학진학이나 시국문제 등엔 관심조차 가질 여유가 없었던 그녀로서는 소영이라는 캐릭터가 마냥 겉돌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었지요.
그리고 당시 매스컴에 한창 시끌벅적하게 오르내렸던 최진실과 그녀의 매니저 故 배병수, 김희애의 ‘하얏트호텔 주차장 사건’ 또한 ‘숲 속의 방’으로부터 비롯된 해프닝이었음이 밝혀져 눈길을 끌었지요.
‘숲 속의 방’의 출연과 촬영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던 최진실이 하얏트호텔 주차장 입구에서 매니저 배씨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타고 있던 차 뒤쪽에서 차량을 빼달라고 김희애가 경적을 울리면서 시비가 붙었던 사건입니다. 경적소리에 격분한 배씨가 차에서 내려 김희애의 차로 다가가 욕설을 퍼부었고, 김희애 역시 배씨의 안경을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차를 빼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배씨가 김희애의 차를 발로 걷어차 파손시켰습니다.
결국 김희애가 경찰에 신고하여 배씨는 불구속입건되었고,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됐지요. 경찰조사에서 배씨는 ‘숲 속의 방’ 출연 문제로 최진실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고 진술하여 당시 최진실이 얼마나 ‘숲 속의 방’의 출연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숲 속의 방' 촬영현장을 지휘하는 오병철 감독.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건 이후에 최진실과 김희애가 함께 TV드라마에 출연했다는 점입니다. MBC TV의 인기 드라마 ‘폭풍의 계절’(1993년)에 동반 출연한 것인데, 이 두 톱스타를 캐스팅하기 위해 MBC의 모든 임원들이 총동원됐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처럼 적잖은 진통을 겪으며 2년에 걸쳐 ‘숲 속의 방’은 완성됐습니다. 당시 보통의 영화가 5~6개월의 촬영과 후반작업을 거쳐 완성되던 것에 비추어보면 굉장히 오랜 기간이 걸린 영화작업이었지요.
그리고 극장에서 개봉된 결과 역시 썩 좋지 않았습니다. 작품성과 흥행에서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데뷔작이었던 오 감독으로서는 “여성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여성문제에 접근했다”는 연출력을 다소나마 인정받았다는 게 위안이었습니다.
인생의 아이러니 한 토막. 당시 ‘숲 속의 방’의 실패에 대해 공지영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최진실을 겨냥한 듯한 표현을 한 적이 있는데(이 일로 공 작가는 한동안 최진실의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음), 최진실의 동생 故 최진영은 정작 생전에 자신의 미니홈피에 공 작가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한 구절을 남겨놓았다는 겁니다.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걸 늦어서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1980년대 당시 '판 영화사'를 운영하면서 조감독 오병철(오른쪽)을 감독으로 데뷔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던 이장호 감독(왼쪽), 가운데는 최진실.
'숲 속의 방'을 통해 여성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해냈다는 평가를 들은 오병철 감독. 그 후 아내였던 공지영 작가의 원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년)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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